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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268화 (268/320)

268.

“됐다. 너랑 나 사이에 이미지가 무슨 소용이야.”

교주가 먼저 관심 없다는 듯, 한 발짝 물러섰다. 언제는 노려봐 놓고. 그래도 나는 나름 그런 교주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웃지 마. 정들어.”

교주는 남은 와인도 다 마실 요량인지 계속해서 잔을 채웠다.

“과일이라도 깎아 줄까?”

“네가? 나한테?”

“아니, 뭐. 저녁 대접해줬으니 과일 정도는 깎아 줄 수 있지.”

아무리 와인이래도 안주 없이 알콜만 때려 붓는 게 좀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집들이 선물로 사 온 걸 깎기만 하면 되니 어려운 것도 없고.

“그럼 난 복숭아.”

빼지도 않고 곧바로 시켜 먹는 걸 보니 청개구리 심보가 불쑥 올라왔다. 분명 내가 해주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하기 싫어지는 이유가 뭘까.

“뭐야? 깎아 준다면서 왜 그렇게 뚱한 얼굴로 봐?”

“막상 네가 부려 먹으려고 드니까 하기 싫어져서.”

“인성하고는.”

“선배님, 깎아 주세요~ 해봐.”

“장난하냐?”

교주는 죽어도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었는지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나는 내가 사 온 과일 바구니를 해체하는 교주 뒤를 쪼르르 따라가 기웃거렸다.

“난 사과 깎아줘.”

교주가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날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순순히 사과와 복숭아를 모두 바구니에 담아 씻기 시작했다. 이 녀석도 꽤 귀여운 구석이 있단 말이야. 흐뭇한 얼굴로 과일 깎는 걸 지켜봤는데…….

“야! 내가 할게.”

도저히 끼어들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껍질을 깎는 게 아니라 과육을 썰어서 씨를 발라버릴 기세였다. 심지어 칼질도 어찌나 어설픈지. 저러다 손가락이라도 잘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도대체 아까 요리는 어떻게 한 거야?”

교주한테서 과도를 빼앗아 들며 껍질을 깎아냈다.

“레시피 보고.”

“그때도 칼질 이렇게 했어?”

“뭐. 안 베이고 잘했으면 됐지.”

“너 평소에 밥은 어떻게 먹냐?”

“이모님이 해주셔.”

“넌 무슨 1년 차 아이돌이 그렇게 돈이 많아? 정산금 많이 받았어?”

교주는 손을 씻은 뒤 과일을 담을만한 접시를 꺼내며 대답했다.

“내가 아니라 부모님이 많아.”

“금수저였어?”

“금을 어디다 비벼. 다이아 정도는 돼야지.”

교주는 자긴 이름만 들으면 아는 기업의 자식이라며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재벌가 자제분이셨다, 이거구만. 그래서 아들이 올림픽 금메달을 딸 실력이 되는데도 양궁을 반대한 거였나.

“외동이야?”“내 위로 형. 아래로 남동생. 남자만 셋이야.”

“그런데도 양궁을 반대하셨어?”

국가 대표가 되면 되게 명예로운 거 아닌가.

“부모님은 내가 양궁 하는 것보단 계열사 잇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으니까.”

“……그럼 지금은?”

“간단한 해결법이 있잖아.”

스킬을 썼다 이거군.

“다 물었냐?”

“……어, 응.”

어째 좀 미안하네. 교주는 내 가족에 관해 개인사라고 묻지 않았는데 나만 꼬치꼬치 캐묻는 것 같기도 하고. 묻는 대로 대답해 주니까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물어버렸다.

“내 얘기도 해줄까?”

“무슨 얘기.”

“내 가족. 내가 왜 싫어하는지.”

“딱히 안 궁금한데. 너만의 이유가 있겠지. 나도 내 부모님 싫어해.”

……인정해야겠다. 만약 교주가 우리 멤버들한테 스킬을 쓰지 않았다면 난 이 녀석을 꽤 좋아했을 거라는 걸. 왜 이서호와 유찬 형이 그렇게 교주에게 흠뻑 빠졌는지 알 것 같았다.

“너 나한테 스킬 쓴 거 아니지?”

“왜? 이제 내가 좀 믿음직스러워 보여?”

“조금.”

“……넌 가끔 이상한 데서 솔직하더라.”

교주는 나만 부엌에 버려둔 채 몸을 휙 돌려버렸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겠지? 교주는 내 쪽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서 소파에 앉아 버렸다. 교주의 무표정한 얼굴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부끄러워한 게 아닌가? 하여간 알 수 없는 녀석.

“야! 포크 어딨어?”

“서랍 열어 봐.”

서랍이 한두 개여야지. 교주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여서 서랍을 마구잡이로 열어 수저통을 찾아냈다.

“먹어라.”

테이블 위에 과일 접시를 내려놓은 뒤 나도 소파에 앉아 포크를 집었다. 그리곤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으며 교주의 목표에 대해 생각했다. 저 녀석은 날 도와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이게 아니라는 걸 교주에게 확인시켜주려면 교주를 내 가족이랑 조우시켜봐야 알 수 있을 텐데…….

아삭아삭.

아작아작.

대화가 뚝 끊겨 서로 과일 씹어 먹는 소리만 들렸다. 하지만 그런데도 어색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공기가 편안해져서 졸음이 솔솔 올 지경이었다. 교주랑 이렇게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게 될 줄이야.

정말 인간관계는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평생 경계 대상 1호가 될 줄 알았는데…….

“왜 그런 눈으로 봐?”

“어떤 눈으로 봤는데?”

“친근감 느껴지는 기분 나쁜 눈.”

“그게 기분 나쁘냐?”

“너라면 좋겠어?”

당연히 좋진 않아도 나쁘지도 않겠지. 교주가 나를 친근감 있는 눈으로 본다면…….

상상과 함께 소름이 쫙 돋아서 나는 두 팔을 문지르며 치를 떨었다. 내 발언을 철회한다. 기분 나쁜 거 맞다.

“어, 내가 잘못했네.”

“푸흐흑.”

교주가 가느다랗게 어깨를 떨며 웃었다. 그래, 웃어라. 웃어. 그때 내 휴대폰이 징징거리며 울렸다. 정이한인가 싶어서 확인했더니 준 선배님이었다.

[텐스타 준 선배님: 혹시 이번 주 스케줄 어떻게 돼? 쉬는 날 있어? 시간 되면 얼굴 함 볼까?]

나는 끔벅거리면서 문자를 내려다 보다가 교주를 쳐다봤다. 있었네. 가족 말고 떨구어 낼 사람이. 왜 이 사람을 떠올리지 못했지?

“야. 나 찾았어.”

“뭘.”

교주에게 내 문자를 보여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 사람. 떨어트려 줘.”

“아, 이건 쉽지.”

교주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게이트 터지기 전에 작업하고 정리해야겠네. 기다려.”

“오케이!”

준 선배님을 떠올렸더니 희한하게 연달아 소파남이 떠올랐다. 소파남 그룹도 마약에 연루된 적이 있어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김호채한테 아직도 연락 와?”

“사생 때문에 번호 바꾼 뒤로는 안 와. 넌?”

“나도 번호 바뀐 뒤에는 없었어.”

그럼 소파남은 정말 완전히 끝난 건가. 태평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교주가 포크를 내려놓고는 허벅지를 툭툭 두들겼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한 눈치라 입을 다물고 사과를 한입 더 베어 먹었다.

“너 망하면 나도 같이 망하는 거니까 경고하는 건데. 김호채는 주의하는 게 좋겠다.”

“엥? 왜? 뭐 있었어?”

“원한이 상당해. 너한테 가졌던 집착이 전부 원망으로 넘어갔는데, 그러면서 감정이 더 증폭된 것 같아. 내가 방치해서 수습할 수 있는 기회는 물 건너갔거든.”

“뭐? 왜 방치했는데?”

물어봄과 동시에 답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교주는 김호채를 날 끌어 내릴 화살로 쓰려던 거였다. 참 나. 순순히 도와준 것도 아니었나 보네.

“왜겠어.”

“그건 알았으니까 됐고. 일부러 그런 거야?”

“아니. 나도 이런 건 처음이야. 항상 깔끔하게 끝냈으니까. 의도하진 않았지만 나한테 유리하게 흘러가길래 내버려 뒀지.”

그러니까 지금 교주는 우리 그룹을 터트릴 생각은 접었지만, 교주가 쏘아 올린 화살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는 거잖아. 그럼 교주의 계획이 완전히 물 건너간 건 아니란 소리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김호채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이미 그 사람은 연예계로 복귀할 수 없다. 소속사에서 안 받아 줄 텐데 무슨 수로 복귀하겠어. 평소 행실이 워낙 안 좋았던 데다가 팬들도 이제는 다 돌아서서 소속사도 복귀시킬 필요를 못 느낄 텐데.

나와 소파남의 접점이 없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내가 피해자라는 확실한 증거도 가지고 있으니 소파남이 떠드는 소리는 뭐든 막아낼 수 있고.

“아무래도 조만간 네 가족이랑 만나는 자리 만들어줘야 할 것 같다.”

“갑자기 왜?”

“네가 가족이랑 사이 안 좋은 거. 그거 김호채가 알게 되면 이용하기 좋은 패가 되거든.”

내가 가족이랑 소원하다는 건 우리 디어리라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멤버들은 가족에 관한 정보들이 대부분 오픈됐지만, 나만은 꽁꽁 비밀로 싸여 있었으니까. 내가 가족들을 만나러 간 적이 없었기에, 목격담이 뜨질 않은 게 원인이었다.

그런 가족을 이용한 최악의 상황은…….

“……날 패륜아로 만들 수 있다는 거네.”

아버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확실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들이 어떨지도 모르겠고. 은혜도 모른 채 가족들에게 입 싹 닫고 모른 척한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하면 이미지 나락 가는 건 금방이었다. 어찌 되었든, 가족들이 내게 집을 구해주고 매월 꼬박꼬박 생활비를 넣어준 기록은 있을 테니까.

게다가 나는 유연이로서 살아왔던 기억이 없다. 그들이 마음먹고 내 머리채를 잡는다 한들, 내게는 반박할 수 있는 기억이란 게 없어서 곤란해질 터였다. 생각보다 더 위험한 폭탄이었네…….

“김호채가 알아차리고 접근하기 전에 내가 해결해 놓을 테니까, 자리 만들어 줘.”

교주는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뭔가, 이 녀석 적이었을 땐 골치 아팠는데 같은 편이 되니까 되게 든든하네.

“최대한 빨리 만들어 볼게.”

스케줄 빌 때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면 되려나. 그때 교주를 대동하면 될 것 같긴 한데. 언제까지 피할 순 없으니 결국 부딪혀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자의식 강하면 안 먹힌다며? 자신 있어?”

“일단 해봐야 아니까 너는 자리나 빨리 만들어.”

“……응.”

나는 심란한 마음을 드러내며 짧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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