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24살에 죽은 거야?”
“맞아. 19살부터 24살까지 두 번을 살았어. 아니, 세 번인가. 첫 번째 삶을 포함하면 이제 네 번째라고 봐야겠네.”
어쩐지 사람이 능구렁이 같더니. 상당히 오래 묵은 뱀이었네. 나는 이런 생각은 쏙 뺀 채 “그래서 어떻게 했어?”하고 무던한 어투로 물었다.
“첫 번째는 그냥 살았어. 원래 살던 대로. 하고 싶었던 양궁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님과 약속한 대학에 들어가야 했거든. 눈에 거슬리는 창이 떠 있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으면 사라지니까 쭉 잊고 살았지. 그리고 24살의 봄이 되었어. 내가 죽었던 바로 그날이.”
교주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어이없다는 듯 “그런데 죽었어.”하고 말했다.
“뭐? 어떻게?”
앞뒤 다 빼먹은 설명에 내가 되묻자 교주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갑자기 눈앞에 실패라고 뜨더니 다시 과거로 돌아왔어. 그때 깨달았지. 저 창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걸.”
교주는 자기가 멍청하게 한 번의 기회를 날렸었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두 번째가 되어서야 나는 창을 꼼꼼하게 확인했어. 그때 나한테 남의 마음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게이지의 존재를 알았지. 게이지에 음각된 것처럼 새겨진 ‘체인지’라는 글자를 본 것도 저때야. 저걸 달성해야만 내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지.”
체인지? 바꾸라고? 뭘?
“어때? 난해하지? 뭘 바꾸라는 건지 전혀 감도 안 오잖아. 그래서 나는 내 삶을 바꿨어. 양궁을 포기하고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았지. 참 희한하더라. 그전의 내 삶은 그렇게 찬란하게 빛났는데, 부모님이 깔아 둔 레일 위에 서 있으니 세상이 모노톤으로 바뀌더라고.”
교주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 속에 그가 느꼈던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교주를 미워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교주는 꿈을 좇을 처지가 아니었다. 실패하면 검은 공간에 갇히게 되는 미래가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가 왜 타인을 짓밟으면서까지 삶을 이어가려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그때는 게이지가 어떻게 됐는데?”
“안 움직이더라. 그 덕에 내 삶을 바꾸라는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지. 나는 답을 내렸어. 내가 아닌 타인을 바꿔야 한다는 걸. 그것도 내 능력을 이용해서.”
……이건 좀 맞는 것 같은데? 교주가 내린 답이 꽤 타당하게 들려서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부터 내 힘을 사용했어. 하지만 그래도 게이지는 영 움직이질 않았지. 그렇게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또 한 번 24살의 봄을 맞이하고, 과거로 돌아왔어.”
교주는 눈을 내리깐 채 입을 다물었다. 그는 목이 막힌다는 듯 이제는 몇 잔째인지 모를 와인을 따라 마셨다. 어느새 와인병은 절반 이상이 비어 있었다.
“내 주변 사람들 몇 명만으로는 부족했던 거야. 좀 더 광범위하게,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고른 게 아이돌이야. 아이돌 팬은 그 누구보다도, 어떤 팬보다도 가장 깊게 대상에게 빠져들고 모든 걸 바칠 듯이 마음을 주잖아. 그들을 이용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
“……연습생 때 디아스 멤버들을 조정한 건, 그 밑 작업이었던 거야?”
“맞아. 오직 나만을 위해 굴러가는 팀이 필요했어. 팬덤의 인기도 내게 집중될 필요도 있었고. 그래야 내가 힘을 이용해 그룹을 터트리면, 급격하게 변화할 팬들의 감정이 내 게이지가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머리에 무언가를 맞은 듯한 띵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일부러 그룹을 터트려서 절망 포인트를 모을 계획이었다는 거야? 그럼 우리가 크는 게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고 했던 말은…….
“너 우리 그룹도 터트리려고 했어?”
“응.”
너무 산뜻하게 인정해서 나는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입술을 벌리고 연거푸 헛숨을 내쉬었다.
“허. 그걸 내가 그냥 두고 볼 리 없잖아.”
“두고 볼 수밖에 없었을걸. 내가 공격하려던 건 너였으니까.”
“……뭐?”
교주는 여유를 되찾은 것처럼 날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게 타격을 입혀서 너를 잃게 된다면 디아스는 공중분해 돼. 네가 그룹의 중심이니까.”
“아, 잠깐. 지금 그걸 나한테 말한다는 건 이제 그 계획은 진행 안 한다는 거지?”
교주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교주를 쏘아봤다. 내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며 미소 짓던 교주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안 할 거니까 말한 거야.”
“믿어도 돼?”
“이미 말했으니 경계심이 맥스일 텐데, 진행할 계획이라면 너한테 말할 필요는 없지.”
마음이 바뀐 건 참 다행인데……. 근데 진짜 왜 마음을 바꾼 거지? 교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은 빌드업 구간이었다. 아직 자신의 한 방을 제대로 터트리지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뭘까.
“그런데 너 왜 마음 바꾼 건데?”
교주가 와인잔을 흔들었다. 그 안에 담긴 와인이 출렁이며 소용돌이치며 돌았다.
“게이지가 올라갔어. 아주 조금.”
“언제?”
“널 도왔을 때.”
“……나? 언제?”
교주는 와인잔을 크게 흔들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김호채 애프터서비스했던 것 기억해?”
“응.”
“그때 게이지가 올라갔어. 그래서 나는 내가 능력을 써서 타인을 바꾸면 된다는 내 가설에 힘을 얻었지. 그런데 말이야.”
교주가 움직이자 소파 가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교주는 상체를 숙여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기댄 채 내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세를 조금 바꾼 것뿐인데 거리가 성큼 가까워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상하잖아. 이전에도 똑같이 힘을 사용했지만 꿈적하지 않던 게이지가 이번에는 움직였다는 게. 그래서 생각해 봤지.”
교주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경우의 수를.”
확신에 찬 어조는 이미 결론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이미 답을 내린 거야?”
최소한 처음에 계획했던 방향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린 거지? 아니, 애초에 저 혼자 답을 냈다면 나를 찾을 필요도 없지 않나? 지금 이렇게 힘겹게 제 과거를 털어놓을 필요도 없을 거고.
“어느 정도는. 하지만 오늘 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확신은 없었어.”
내 이야기? 내가 환생한 것과 교주가 회귀한 건 아무 상관이 없을 텐데……. 나는 의아해하며 교주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답이 뭔데?”
“너.”
“……나?”
예상할 수도 없었던 엉뚱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갑자기 내가 왜 나와?
“너와 관련된 일을 하니까 게이지가 올라갔잖아. 그리고 신들이 네 꿈을 이뤄주려고 널 환생 시켰다면서. 그러면 나 또한 널 위해 준비된 피스가 아닌가, 하는 거지.”
교주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쯧, 하고 혀를 찼다. 그의 결론에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 지금까지 내내 움직이지 않았던 게이지가 널 도운 직후에 움직인 이유가 뭔데?”
……이렇게 바로 묻는다고? 들어온 정보들을 처리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야. 나는 대답을 미룬 채 머릿속에서 내용을 정리했다. 일단 교주의 회귀와 내 환생에 상관관계가 없다는 건 분명했다. 교주는 벌써 세 번째 삶이고 나는 아직 첫 번째니까.
SR을 고른 것 또한 나의 의지였다. 내가 다른 소속사를 선택했다면 지금처럼 교주와 얽힐 일은 없었을 터였다. 만남 자체가 우연인데 교주가 날 위해 준비된 사람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지. 나는 일단 지금의 내 생각을 교주에게 전했다.
“하지만 게이지가 움직였어.”
“내가 아닌 다른 이유겠지.”
“그럴까? 김호채 같은 인간들한테 스킬 쓴 게 한두 번이 아니야. 하지만 게이지가 움직인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때와 지금. 유일하게 다른 건 너밖에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건 내 심증일 뿐이라 무작정 아니라고 우기기엔 나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확인해 보면 되겠지. 내 도움이 필요한 인간이 있으면 말해 봐. 확인해 보게.”
“……지금은 딱히.”
없는데. 정리가 필요한 사람은 모두 정리가 됐고, 현재 내게 남은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해 봐.”
“그래도 없는…… 아.”
“생각났어?”
교주가 반색하며 물었다. 이걸 또 억지로 쥐어 짜내려고 하니까 나오긴 나오네. 지금의 내게 유일하게 남은 숙제가 하나 있긴 있었다. 아직은 소속사에서 막아주고 있는 것 같지만,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응. 내 가족. 그들이 나한테 가지는 모든 관심을 끊었으면 좋겠어.”
“……가족이라고?”
“응. 안 돼?”
조금 어렵긴 하겠다. 교주가 스킬을 사용하려면 상대방에게 신뢰를 쌓아야 하잖아. 그런데 연예인과 일반인. 심지어 나이가 있는 어르신들이다.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신뢰를 쌓기엔 무리가 있었다. 형과 동생은 어떻게 한다 쳐도 말이지.
“흠.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닌데, 내가 너희 가족을 만나려면 자리를 만들어줘야 할 텐데?”
“……아.”
역시 그런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연락처도 알려주지 말라고 해서 내가 먼저 연락하는 건 좀 껄끄러운데.
“좀 고민되네…….”
“생각해 보고 말해. 난 만났으면 좋겠지만.”
“……그런데 이유는 안 물어봐?”
궁금해할 법도 한데. 아닌가. 나한테 관심이 없을 테니 궁금하지도 않겠네.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 교주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개인사잖아.”
“의외네.”
“뭐가.”
“너한테도 배려심이라는 게 있구나.”
교주는 구겨진 종이처럼 얼굴을 찡그린 채 나를 쏘아봤다. 그 눈이 꼭 욕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너무 솔직하게 대답해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