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준 선배님과 화장실에 들어온 건 그렇다 치는데, 저 사람의 시선이 영 내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볼일을 보는 것도 아니고. 내 움직임을 시선으로 쫓는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불쾌할 지경이었다.
“선배님, 이번 컴백곡 잘 들었습니다. 정말 좋던데요.”
그때 정이한이 준 선배님 앞을 가리며 말을 건넸다. 정이한 덕분에 시선이 좀 차단되어 훨씬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 들었어?”
“그럼요. 앨범도 샀습니다. 선배님 만나 뵐 줄 알았으면 가지고 올 걸 그랬네요.”
정이한이 날 위해 준 선배님을 상대하는 사이 나는 화장실 개인 칸으로 들어가 버렸다. 볼일을 보고 곧장 세면대로 가 손을 씻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런데 하온아.”
젖은 손을 말리는 내게 준 선배님이 접근했다. 정이한이 그런 선배님을 경계하며 바로 옆에 따라붙었다. 정이한이 저러고 있으니까 되게 든든하네.
“네, 선배님.”
“속옷도 여자 거야?”
“……네?”
“궁금했는데 네가 들어가 버려서. 여자 속옷 맞아?”
너 변태냐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대신 표정으로 말했는지 준 선배님이 호쾌하게 웃었다.
“으하학! 그런 변태 보는 것처럼 보지 말고.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래. 남자끼린데 뭐 어때?”
진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좀 선 넘은 질문 아닌가?
“……선배님 상상에 맡길게요.”
“확 스커트 뒤집어 보는 수가 있다?”
“…….”
나는 황급히 정이한 뒤로 확 숨어 버렸다. 어투만 보면 농담 같았지만 딱히 받아주고 싶은 종류의 농담이 아니었다. 기분이 나쁘다고.
“응? 내가 진짜 그러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농담이었는데 반응이 좀 이상하네. 아, 혹시 나 좀 진지해 보였어?”
준 선배님은 제 머리를 긁적이면서 갸웃거렸다. 내 태도를 불쾌해한다기보다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듯이 의아한 모습이었다.
“……그건 아니지만 기분이 좀.”
“아, 기분 나빴어?”
준 선배님은 턱을 당기고 으음, 하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뒷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미안. 남자니까 불편해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 용서해주라. 응?”
“……아니에요. 저도 좀 예민했던 것 같아요.”
“그래, 그래. 서운한 거 있으면 다 풀기다?”
“네.”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형이 사줄게. 괜찮지?”
“저 아직 19살인데요…….”
“엥? 억. 그랬어? 그럼 내년에 마시자.”
“하하……하.”
나는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뒤 정이한의 셔츠 뒷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하온이 시간 얼마 안 남지 않았어?”
내 신호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정이한이 먼저 운을 띄워줬다.
“아, 내가 오래 붙잡았나 보네. 나중에 보자. 연락할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준 선배님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는 화장실을 나갔다. 무슨 폭풍에 휩쓸린 기분이네. 기운이 쪽 빨려서 어디 앉아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갑자기 피곤해졌어요.”
내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정이한은 난처한 얼굴로 웃으며 내 안색을 살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좀 곤란한 말씀을 하시네.”
“……그러게요.”
한참 후배인 내 표정에서 불쾌감을 읽었는데도 화를 내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사과까지 했다. 정말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왜 마약을 하게 됐을까. 아니면 이미 하고 있나?
하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완벽히 파악하겠어.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 이외의 이면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화장실에서 돌아와 잠시 쉬고 난 뒤에 촬영이 재개되었다. 먼저 메이크업부터 손을 봤는데 입술 색이 장미 꽃잎을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은 강렬한 레드로 바뀌었다. 광고 내에서는 장미 꽃잎에서 빠진 색이 내 입술로 옮겨지는 것처럼 표현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꽃잎을 물었다가 뗀 뒤 한 번 웃어주고, 등을 돌려 창밖을 보는 것까지가 이번 촬영 내용이었다. 이전 촬영의 감정을 그대로이어야 해서 이번에도 여러 가지 버전으로 촬영을 했다. 여성 버전 촬영이 마무리될 때쯤 슬슬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다음엔 남자 버전 촬영이었다. 원피스의 상의 부분과 완전히 똑같은 하얀색 셔츠를 입고, 새하얀 바지와 구두를 신었다. 연한 분홍색 리본 대신 같은 색의 넥타이를 차고, 입술을 제외한 메이크업도 완전히 바뀌었다.
“이번엔 귀걸이도 찰 거예요.”
내 귀에 만개한 장미꽃 귀걸이가 걸렸다. 코디네이터들이 귀걸이가 잘 보이도록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깔끔하게 고정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딘지 중성적인 느낌이 나는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귀걸이 때문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거울 속의 나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하온 씨도 마음에 들어요?”
“아, 네. 예쁜 것 같아요.”
“그렇죠? 아휴, 진짜 하온 씨를 보면 예쁜 남자가 어떤 건지 알겠다니까요? 잘생긴 남자는 많은데 예쁜 남자는 진짜 흔치 않거든!”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 앞에서 민망해진 나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다…….
“지금 노을 딱 좋거든요! 촬영 바로 시작할게요!”
“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동했다. 이번에는 여성 버전일 때 마지막 자세인 창밖을 보는 장면부터 시작이었다. 이대로 뒤를 돌아보고 웃고 장미꽃에 입맞춤한 뒤 앵글 밖으로 걸어 나가면 끝나는 촬영이었다.
이미 한 번 해봤던 감정 표현을 똑같이 찍는 거라 촬영 자체는 내 예상보다 더 빠르게 끝났다. 이 중 어떤 게 쓰일지 모르겠으나 일단 나는 최선을 다했다. 감독님도 무척 만족스러워했으니 잘했다고 봐도 되겠지?
“고생하셨습니다!”
“하온 씨, 잘했어요. 수고했어요~”
“하온이 수고 많았어.”
정이한은 마치 봉인이라도 풀린 사람처럼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정이한의 입가에 피는 만족스러워 보이는 웃음을 보니 나도 따라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렇게 머리 쓰다듬고 싶었어요?”
“엄청 참았어.”
이제는 아주 헝클어트릴 기세로 내 머리를 문질러댔다. 머리가 흔들려서 어지러워진 내가 정이한의 팔을 꾹 붙잡자 정이한은 그제야 머리를 쓰다듬는 걸 멈췄다.
“어으, 어지럽잖아요.”
“미안.”
정이한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가 재빠르게 수납했다. 하여간 귀엽기는. 정이한과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내 시야에 광고주 이사님이 이쪽으로 오는 게 잡혔다.
“촬영 잘 봤습니다.”
“아, 이사님. 안녕하세요…….”
“내내 같이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또 인사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하, 하하.”
불편하다…….
이사님은 어색해하는 날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나이를 증명하듯 있던 눈가의 주름이 미소를 따라 휘어져 딱딱했던 인상을 부드럽게 바꾸었다.
“여러 명의 후보 중에 최종적으로 하온 씨를 고른 건 저였는데…….”
“아.”
“선택에 후회할 필요는 없겠네요. 제 생각보다 더 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절 믿고 맡겨주셔서 오히려 감사합니다.”
나는 이사님께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사님은 내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한 뒤 광고주 직원들을 이끌고 스튜디오에서 나갔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광고 촬영이 끝나고 며칠이 더 지났다. 이제는 슬슬 교주와 만나야 할 텐데 도무지 틈이 보이질 않았다. 멤버들한테 거짓말하기 싫어서 계속 머리를 굴려봤지만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질 않았다.
전제 자체가 ‘교주를 만나러 간다.’였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해도 내가 교주를 만나러 가는 이유에 대해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만 계속 보내던 때였다.
“아, 하온아. 일주일 뒤에 시간 돼?”
“일주일 뒤에요? 어……. 그때면 유찬 형 시골밥상 촬영가잖아요. 저 필요해요?”
“아니, 그건 아니고.”
유찬 형은 주변 눈치를 살피고는 내게 허리를 숙여 목소리를 낮췄다.
“그 준재혁 기억하지?”
“……어, 네. 기억하죠. 왜요?”
뭐지? 왜 유찬 형 입에서 교주 이름이 나오지?
“일주일 뒤에 재혁이가 예능 촬영하는데, 까메오 출연해 줄 수 있는지 물어봤거든. 다른 그룹 사람이어야 한대서.”
“아…….”
“그런데 나랑 강현이는 시골밥상 촬영이 있고, 이한이는 재혁이를 좀 무서워하는 데다가 서호도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바쁘니까.”
뭔지 알겠다. 저거 대신해달라는 거구나. 이거 혹시 교주가 날 불러내기 위해 판 짠 거 아니야? 그런 느낌이 조금 강하게 들었다.
“그쪽 피디가 디아스 멤버였으면 좋겠다고 그랬다더라고.”
“아아. 하긴 저희랑 인연 있으니까요.”
준재혁이 나가고, 내가 대신 들어가서 만들어진 게 지금의 디아스다. 어떻게 편집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슈몰이는 확실하겠네.
“응. 그런데 우리 다 시간이 안되니까……. 혹시 하온이 괜찮으면 대신 나가줄 수 있을까? 얘기 들어보니까 별 건 아니더라.”
“뭔데요?”
“전화로 재혁이가 퀴즈를 낼 건데, 그거 전화 받아서 퀴즈만 맞춰주면 돼. 성공하면 그만큼 요리 재료를 구할 수 있다더라고. 그걸로 재혁이는 저녁을 만들 건데 그때 손님으로 가도 되고, 안 가도 되고.”
아주 제대로 판을 짜놨네. 이걸 다 예상하고 예능 촬영을 잡은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됐다. 이걸로 교주에게 갈 당위성이 만들어지니까.
“그래요. 그럼 제가 할게요.”
“진짜? 괜찮아? 재혁이 안 불편해?”
“그럼요. 저희 생각보다 잘 지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