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62화 (262/320)

262.

어디선가 징징거리는 울림이 들려서 눈이 떠졌다. 눈을 뜨고 나서야 난 내가 잠이 들었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형들한테서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는데, 그새 잠들었나?

나는 어둑한 방안에서 몸을 일으키며 정이한이 그새 왔다 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이한이 끄고 간 게 분명한 방 불을 다시 켜고, 계속 존재감을 발하며 진동하는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아, 교주다.

이제야 시간이 좀 나나 보네. 아추대에서 만난 이후로 처음인가. 텐스타 마약 멤버에 대해 물어보려고 다음 날 전화했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었다. 한참 뒤에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문자 온 게 끝이었다.

뭐, 준 선배님도 아추대 이후로 연락이 없어서 나도 급할 건 없었으니까.

교주와의 통화 중에 멤버들이 들어오면 곤란하므로 문단속을 하면서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 30분. 생각보다 오래 잤네.

30분 뒤에는 매니저 형이 데리러 올 테니 통화 가능한 시간은 대략 20 여분 정도려나.

“응.”

- 이젠 ‘여보세요.’도 안 해?

“우리가 서로 예의 차릴 사이는 아니잖아.”

- 그건 그렇지. 왜 전화했는데?

……자기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은 까먹었나?

“……내가 언제 전화 걸었었는지부터 확인하고 올래?”

- 시간이 얼마나 지났든, 네가 나한테 전화 걸었던 목적은 여전할 텐데?

자신이 아니면 내 궁금증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다고 확신하는 어투였다. 솔직히 맞는 말이긴 한데, 맞는 말이라서 기분이 좋진 않네.

“아닐 수도 있잖아.”

- 그럼 말고. 끊는다.

“그러던가.”

첫인상이 그래서 그런가. 나는 유달리 교주한테 틱틱거리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바뀐 지금, 이렇게 굴 필요는 없을 텐데. 하지만 매번 내 성미를 돋구는 건 교주였다.

……그런데 설마 진짜 끊는 건 아니겠지? 이왕 연락된 김에 텐스타 마약 멤버가 누구인지 정도는 듣고 싶은데. 교주도 저를 돕겠다는 내 말에 혹하는 눈치였으니까 아쉬운 건 본인도 마찬가지일 거 아니야. 게다가 교주는 제 목숨이 달린 일인걸. 나는 조금 뻔뻔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느긋한 마음으로 교주가 어떻게 대답할지 기다렸다.

그런데…….

“……끊었어?”

교주가 ‘어, 그럼.’하고 통화를 툭 끊어 버렸다. 나는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황망한 눈으로 내려봤다. 이 자식이, 이걸 진짜 끊어? 어이없네?

나는 곧장 교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을 기다린 끝에 아주 여유만만한 교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지금 ‘여보세요.’가 나와?”

- 안 나올 이유는 없지.

“너 진짜 짜증 나.”

휴대폰 너머에서 ‘푸흡.’하고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웃는 타이밍하고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었다.

“나 20분밖에 통화 못 해. 아니, 이제는 15분이네.”

- 잘됐네. 나는 10분밖에 못 해.

“생각해 보니까 나도 5분밖에 안 될 것 같은데.”

- 아, 나는 3분.

“나랑 장난해?”

- 응. 놀아주니까 좋지?

“하나도 안 좋거든!”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잔뜩 숨죽인 채 거실의 분위기를 살폈다. 형들이 내 목소리 못 들었겠지?

- 푸흐. 형들 눈치 보는 중?

“그렇게 하나하나 다 아는 척 안 하면 대화가 안 돼?”

- 아는 걸 또 어떻게 모르는 척해?

“사회성이라는 걸 좀 길러 봐.”

- 이미 충분해. 너한텐 그런 걸 할 필요 없으니까 안 하는 거지.

“……이거 어째 내가 처음에 한 말이랑 같은 뉘앙스같은데.”

교주는 아무 말 없이 야트막한 웃음소리를 흘려보냈다. 아, 지금 영양가 없는 대화로 몇 분이나 소비한 거야. 이상하게 오늘따라 내가 교주에게 좀 말리는 느낌이라 빨리 통화를 끝내는 게 내게 이로울 것 같았다.

“어쨌든, 나 스케줄 가야 해서 시간 없는 건 진짜야.”

- 그럼 나중에 다시 해도 돼. 난 어제 활동기 끝나서 당분간 여유로우니까.

“그래?”

- 검색하면 아는 걸 거짓말할 이유 없지.

시간이 넉넉하다니 잘됐네.

“그럼 일단 텐스타 요주의 인물이 누군지부터 알려줘.”

- 맨입으로?

“아직 내 스킬 필요해?”

교주는 “흐음.”하고 소리를 내며 잠시 고민하는 듯 시간을 끌었다.

- 나중에 내가 해달라는 거 해주기 어때.

교주가 뭘 부탁할지 모르니 덥석 알겠다고 하기엔 곤란하고…….

“거부권 있음으로라면 오케이.”

- 그런 게 어딨어. 해달라면 해줘야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걸로 가져오란 이야기야. 말귀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면서 꼭 설명하게 하지?”

- 뭐, 나도 당장은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건 없으니까 빚으로 달아두지. 한 번만 말한다.

“어.”

- 준, 강조, 사윈.

아, 망했다. 준 선배님도 마약으로 터지는 멤버였어?

- 게이트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언젠데?”

- 내년 3월.

그나마 다행이네. 준 선배님이 이대로 날 찾지 않는다면 베스트고, 그게 아니어도 몇 개월만 버티면 된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선배에게 철벽을 쳐도 될 것 같았다. 처음에는 구설수에 오를지 몰라도 막상 마약 게이트가 터지고 나면 대중의 평가는 반전될 테니까.

“하아, 진짜 큰일 날 뻔했네. 고마워.”

- ……신기하네.

신기할 게 뭐가 있지?

“뭐가?”

- 너 그동안 솔직한 마음 내비친 적 없었잖아. 그런데 방금은 좀 진짜 같았거든.

“아닌데. 내가 너 도와주고 싶다고 한 거. 그것도 솔직한 마음이었는데?”

- 그거랑은 느낌이 달라.

나는 잘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렇다면야 그런 거겠지. 이건 내게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럼 나 스케줄 끝내고 시간 될 때 아무 때나 전화해도 되나?”

- 전화 말고 만나자.

“……어디서?”

- 내 오피스텔.

“내가 거길 왜 가?”

- 내가 가장 안심할 수 있는 곳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까.

아, 그런 거라면 내가 이해해줘야지. 나도 교주랑 통화할 때면 멤버들 피해서 하니까. 그나저나 혼자 외출할 수 있으려나. 요즘 멤버들 바쁘니까 몰래 나갔다 오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거짓말하고 도망치듯 나가고 싶진 않았다. 예전에도 내가 사라져서 숙소가 뒤집힌 적 있었고, 스토커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멤버들이 예민한 상태였다.

“문제는 내가 혼자 외출하는 게 좀 힘들어.”

- 멤버 데려와도 돼.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

- 방법은 많아.

“스킬 쓰려고?”

- 그것도 방법의 하나긴 하지. 가장 확실한.

“안 돼. 우리 멤버들 더 못 건드려.”

- 그럼 재워도 되고. 필요한 건 있으니까.

약을 쓰겠다는 건가? 이 녀석, 진짜. 교주는 교주구나. 나는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됐어. 우리 멤버들한테 수상한 짓 하는 걸 내가 어떻게 봐. 생각 좀 해볼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일단 네 오피스텔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는 알았고, 그건 나도 이해하니까 내가 혼자 나갈 수 있을 때 다시 연락할게. 괜찮지?”

- 네네. 그러시지요, 선배님.

순순한 대답이라기보다는 비아냥대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이걸 따질 시간은 부족했다.

“그럼 끊는다.”

- 어.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내려놓기 무섭게 문고리가 덜컥거렸다. 으아, 정이한인가 봐!

“아, 형. 잠시만요! 저 옷 갈아입는 중이라서요!”

나는 허둥지둥 옷장을 열어 대충 아무거나 꺼내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얼른 문을 열자 정이한이 그 앞에 서 있었다.

“급하게 안 나와도 되는데.”

정이한이 손을 뻗어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줬다. 스웨터를 꺼내 입는 바람에 정전기가 일어난 머리카락이 정이한의 손바닥에 달라붙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앗, 따가!”

“윽. 정전기 심하네. 잠깐만.”

정이한은 화장대에서 미스트를 가져와 내 머리를 정갈하게 만들어 준 뒤 만족스럽게 웃었다.

“됐다. 오늘도 예쁘네.”

“……아하, 하. 고마워요…….”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겉옷만 걸치면 돼. 지금 나가?”

“매니저 형 오려면 아직 5분 정도 남았어요. 강현 형이랑 유찬 형은요?”

“아까 너 잘 때 나갔어.”

“아하.”

마스크와 모자를 챙겨 거실로 이동하자 정이한이 나를 따라 움직였다.

***

광고 촬영장은 고층 빌딩 안에 있는 전세 스튜디오였다. 통유리 너머로 빌딩이 가득한 서울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스튜디오 내부는 조명을 켜지 않았음에도 무척 밝고 화사했다. 통유리가 햇볕을 빨아들이는 느낌이랄까. 여기 노을 지면 예쁘긴 하겠다.

광고대행사 직원분들과 촬영 스태프분들께 열심히 인사하고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작은 소란과 함께 광고대행사 팀장님이 벌떡 일어나 스튜디오 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어째 딱 봐도 중요한 사람이 등장할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했다.

나도 바짝 긴장한 채 슬그머니 팀장님을 따라 움직였다. 높은 사람한테 잘 보여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려면 인사를 잘해야 한다.

“이사님 오셨어요.”

팀장님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상대를 맞이했다. 그 중요한 인물은 무려 광고주 이사님이셨다. 뒤로 미팅 때 함께 보았던 직원분들을 대동한 상태였다. 이사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디아스의 진하온입니다.”

내 옆을 따라다니며 같이 인사했던 정이한도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 멤버분과 함께 오셨군요. 오늘 촬영 기대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말고, 잘하는 쪽으로 해주세요.”

이사님의 말투는 상당히 느긋하고 느린 편이었지만, 내게는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열심히 말고 잘……. 잘해야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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