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61화 (261/320)

261.

이서호를 배웅한 뒤 오후 1시가 넘은 시각. 이제야 멤버들이 한두 명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퀭한 눈을 반쯤 감고 돌아다니는 멤버들을 보니 여기가 숙소인지, 아니면 아포칼립스 속 좀비 세계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하온이 좋은 아침.”

정이한이 늘어지게 하품하며 욕실에서 나왔다. 세수까지 해서 얼굴은 뽀송뽀송해졌는데 눈동자는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제대로 앞은 보고 다니는 건지. 저러다가 벽에 박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나는 비몽사몽으로 돌아다니는 정이한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려 버렸다.

거기엔 또 1인 소파에서 접은 다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툭 올라온 무릎에 뺨을 기댄 채 졸고 있는 유찬 형이 있었다. 다들 엄청 피곤해 보이네.

“아으으, 삭신이야.”

강현 형이 스트레칭을 하며 방에서 나왔다. 왜인지 그 소리에 유찬 형이 화들짝 놀라 파르르 떨었다. 꼭 높은 데서 떨어지는 꿈이라도 꾼 사람 같았다.

“아, 안 잤어!”

누구한테 하는 변명인데……?

“……형, 피곤하면 침대에서 주무세요.”

“아니야. 정신 차려야지.”

유찬 형은 제 뺨을 양손으로 두어 번 찰싹찰싹 내리친 뒤 벌떡 일어났다. 형은 보는 내가 다 불안할 정도로 몇 번 비틀거리며 정수기를 향해 갔다. 냉수를 따라 마시는 형에게 늦은 점심이라도 챙겨 주려고 따라 일어났을 때였다.

“……어? 샌드위치네?”

“제가 만들었어요. 드실래요?”

“하온이가? 당연히 먹어야지.”

샌드위치를 먼저 발견한 유찬 형이 의자를 쓱 빼 앉고 샌드위치의 랩을 벗겨 크게 한입 물었다. 조금 긴장되는 마음으로 형의 맛 평가를 기다리며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와, 하온아, 이거, 맛있다. 진짜.”

나는 다람쥐처럼 볼을 부풀린 채 샌드위치를 먹는 형의 맞은편에 앉아 흐뭇하게 웃었다.

“음료수랑 같이 마셔요.”

“하온이가 뭘 좀 아네. 역시 샌드위치엔 오렌지 주스지!”

그저 취향껏 선별했을 뿐인데. 맛있게 먹어주니 기분은 좋다. 역시 이런 맛에 요리하는 거지. 이어서 정신 차리고 돌아온 정이한과 강현 형에게도 샌드위치를 하나씩 대접했다.

“형들 오늘 늦게 나가요?”

“이제 슬슬 가야지. 하온이는 오늘 광고 찍는다고 했나?”

“네. 저는 4시에 나가면 돼서 여유로워요.”

“아, 저녁 촬영이야?”

“네. 노을이랑 같이 찍는대요. 그래서 좀 부담돼요. 시간제한이 있다는 게 너무 피부에 와닿는다고 해야 하나.”

노을이 사라지면 하루 촬영을 공치는 거니까.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면 압박감에 긴장해서 제대로 못 할까 봐 걱정이었다. 나를 믿고 광고 모델로 발탁한 건데,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잘해야 하는데.

막연하게 시스템은 내가 죽을 때까지 평생 따라다닐 줄 알았는데, 요새는 왠지 그게 아닐 것 같단 말이야. 그래서 단 ‘1’만 남겨 둔 채 승급이 멈춘 춤과 노래 스탯도 포인트를 사용해 올리지 않고 멈춰버렸다.

이게 지금 당장 급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걸 내 실력만으로 올리겠다는 오기에 차 있었다.

내가 뭘, 어떻게 더 해야만 승급시켜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서 오로지 내 실력만으로 승급한다. 그래야만 시스템이 사라진 뒤에도 스탯이 고스란히 내 실력으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까?”

아, 생각에 빠져 있다가 정이한이 한 말 못 들었다. 눈동자를 굴려 쳐다봤더니 정이한이 날 보고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느라 못 들었어?”

“……그냥, 광고 생각이요.”

“걱정되면 같이 가줄까?”

“아, 아니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이한은 우유 잔을 비운 뒤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말을 바꿔서. 나 따라가도 돼?”

“오늘 쉬어도 돼요?”

“응. 경연 준비는 끝났거든. 오늘은 컨디션 회복할 겸 쉬려고.”

“모처럼 쉬는 날인데 그냥 편하게 숙소에 있는 게 낫지 않아요? 형도 피곤할 텐데…….”

아무래도 촬영을 걱정하는 나 때문에 없는 시간을 쪼개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정이한이라면 그럴 만하니까.

“모처럼 쉬는 날이니까 하온이랑 있고 싶은 건데.”

“윽.”

정이한은 굳이 상체를 숙여 날 올려다보며 애처로운 눈길로 “안 돼?”하고 물었다. 진짜 약았어. 저렇게 나오면 거절 못 하는데!

“와, 정이한. 그렇게 안 봤는데 하온이한테 하는 거 보니 완전 여우네.”

옆에서 유찬 형이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오늘 시간 되는데.”

강현 형이 불쑥 끼어들었다. 무덤덤한 눈으로 날 응시하는 형은 나도 같이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너도? 으아, 나만 안 되는 거야?”

유찬 형이 서운해하며 고개를 떨궜다. 왜 내가 형들 데리고 가는 게 확정된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나도 광고 촬영쯤은 혼자 할 수 있다. 물론 혼자 있으면 조금 외롭지만, 언제까지나 계속 형들이랑 같이 다닐 순 없으니까 자립해야지. ……이것도 자립이라고 할 수 있으면 말이야.

“그냥 저 혼자 다녀올게요.”

“왜에. 보고 싶은데.”

정이한이 조르듯 칭얼거리자, 강현 형이 그 뒤를 이어받은 듯 슬며시 어필했다.

“얌전히 있을게.”

“애들 데리고 다녀와. 저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유찬 형은 가지 못해서 아쉬워했으면서도 다른 형들 편에 서서 나를 설득했다. 그런 점이 참 유찬 형답다고 해야 하나.

“방해 안 하고 진짜 얌전히 있다가 올게.”

“첫 광고잖아. 응원도 하고, 구경도 하고 싶어서.”

“음. 그럼 형들 둘 다 오늘 시간 되는 거예요?”

내가 묻자 두 형들이 동시에 “응.”하고 대답했다. 아, 그러면.

“그럼 서호 형 촬영장에 응원 가주시면 안 돼요?”

“어? 서호……, 아.”

뒤늦게 생각난 건지 정이한이 말을 하다 말고 탄성을 냈다. 이서호가 알면 얼마나 서운하겠어. 왠지 내가 이서호한테 형들을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말이지…….

“헐. 그러네. 우리 서호 촬영장 한 번도 안 갔네?”

유찬 형이 눈을 홉 뜨고는 입을 벌렸다.

“전 며칠 전에 다녀왔거든요. 서호 형이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형 촬영 시기에 다들 바빠서 저희 커피차만 보내주고 제대로 못 갔잖아요. 형들 시간 나면 서호 형 보러 가주세요. 전 괜찮으니까.”

“형이 먼저 말했으니까 내가 서호한테 갈게. 이한 형은 하온이랑 가.”

“어? 나도 서호한테 가는 게 좋지 않나…….”

“멤버 한 명 정도는 하온이랑 있어야지. 그리고 나도 서호한테 갈 거니까.”

“유찬 형이?”

“형 바쁘다면서요?”

나와 정이한이 동시에 묻자 유찬 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지. 바쁘긴 한데 잠은 좀 미뤄도 되지만 서호 촬영은 더 미뤘다간 끝날 것 같아서. 우리 서호 첫 촬영인데 형으로서 응원은 한 번 가야지. 간다고 생각은 했는데, 생각만 하다가 끝날 뻔했네.”

유찬 형 건강도 소중한데. 피곤함도 상태 이상의 일종이라고 하면 내가 회복시켜 줄 수 있으려나. 나는 오늘의 내 체력이 아주 빵빵한 걸 확인한 뒤에 유찬 형에게 구원 스킬을 한번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시간 끌 것 없이 지금 바로 확인해 보면 되겠지?

나는 내 몫의 접시를 들고 일어나 싱크대에 넣어둔 뒤 유찬 형의 뒤로 가서 어깨를 짚었다.

“형,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어깨를 주물러주는 척하면서 슬쩍 스킬을 발동해봤다. 성공적으로 발동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내 예상보다 더 많은 체력이 빠져나갔다. 대략 10퍼센트쯤은 빠진 것 같은데…….

엄청 피곤했나 보다. 다음에는 이렇게 피로가 누적되기 전에 틈틈이 풀어줘야겠다. 내친김에 다른 멤버들도 해주고 싶었는데, 광고 촬영할 체력은 남겨둬야 해서 뒤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 신기하네. 하온이가 어깨 주물러 주니까 뭔가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야.”

유찬 형이 목을 좌우로 푸는 것처럼 움직이다가 날 향해 고개를 틀고는 눈을 반짝였다. 나는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정말요?”하고 기쁜 듯 웃으며 어깨를 계속 주물러줬다.

“응. 진짜. 몸이 완전 가벼워졌는데?”

유찬 형은 더는 안 해도 된다면서 벌떡 일어나 제 자리에서 콩콩 뛰어 봤다. 그러더니 몸이 너무 가볍다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지난번에 나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때 강현 형이 툭,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냈다. 괜히 나 혼자 찔려서 어색하게 반응할 뻔했다. 상식적으로 내 스킬 효과에 단어를 붙인다면 초능력 말고는 없으니까 알아차릴 리 없다. 초능력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영역이잖아.

“강현이도?”

“응. 우리 아추대 나갔을 때 팔이 좀 시큰거렸는데, 하온이가 손잡아 준 뒤에 나았거든. 오히려 컨디션도 더 좋아졌었어.”

“하온이 손이 약손이네~”

유찬 형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 유찬 형에게 정이한이 “형 그런 표현 좀 할머니 같아.”하고 팩트 폭행을 하는 사이 나는 형들 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우리가 하온이를 좋아해서 그런가.”

“……그, 그게 왜 거기로 가요.”

“맞잖아. 내가 하온이 좋아하는 거.”

갑자기 훅 들어온 말에 나는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확 내리깔았다. 내가 아직까지도 적응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날 칭찬하는 거고, 두 번째는 바로 이거였다. 방심하고 있을 때 형들의 마음을 상기시키려는 듯 내게 훅 들어오는 한 마디!

“……저는 방에 들어가서 쉴게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