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58화 (258/320)

258.

나 장난하는 거 아닌데. 어이없다는 듯 웃는 이서호를 향해 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심각하단 말이야.”

그제야 어떻게 해야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냐는 내 질문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이서호가 미소를 거둬들였다.

“좋아하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거잖아. 누가 등 떠민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장난기나 웃음기를 쏙 뺀 진지한 어투였다.

“너 우리 좋아하지?”

“응.”

“누가 시켜서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진하온 네가 ‘멤버들 좋아해야지.’하고 다짐해서 좋아하는 거야?”

“그건 아니야.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아. 그렇구나. 내가 기본적인 걸 잊고 있었네. 내 안의 무언가를 바꿔 형들에게 답을 주려고 생각한 것부터 틀린 거였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는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조바심이 나서 이런 걸 몽땅 잊고 있었나 보다.

“나 참. 뭘 물어보려나 했더니. 하여간 은근히 허당이라니까.”

“윽. 그렇지만, 계속 기다리게 하는 건 미안해서…….”

“그건 형들의 선택이잖아. 네가 부담 가지는 걸 형들도 원치 않을걸?”

“……그래도. 계속 기다리기만 하다가 내가 싫어지면 어떡해?”

“뭐어?”

이서호는 또 한 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날 보다가 검지로 내 이마를 콕콕 찔러댔다.

“너는 좀, 사랑받는다는 자각을 가져라. 응? 마음이 무슨 빚도 아니고 청산하려고 난리냐? 차라리 ‘내가 이 형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헷갈려. 형아, 도와줘.’라고 했으면 귀여웠을 텐데.”

“딱히 서호 형한테 귀엽게 보일 생각은 없거든?”

“네에네에, 그러시겠지요.”

이서호가 콧방귀를 뀌며 날 흘겨봤다. 나도 그에 맞대응하듯 노려보다가 궁금한 게 있어서 먼저 꼬리를 내렸다. 궁금한 건 못 참지.

“그런데 내가 형 중 한 명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물어봤으면 어떻게 대답했을 건데?”

“연애 테스트 많잖아! 해볼래?”

“하면 뭘 알 수 있는데?”

“지금 네 마음이 어디까지 왔는지 정도는?”

그런 걸 알 수 있단 말이야? 조금 미심쩍은 느낌이 들긴 했으나 밑져야 본전이니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서호가 곧장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나한테는 안 보이게 혼자 이리저리 서치하다가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는지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하는 질문을 잘 듣고, 3초 이내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을 말하는 거야. 알았지?”

“응.”

“자, 첫 번째 질문.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3!”

이서호가 갑자기 카운트를 세니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어, 어!”

“2!”

“아! 잠깐, 잠!”

“1!”

“디, 디어리!”

“진심?”

“……그런 거 같은데?”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으니까.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맞는 것 같아. 멤버들은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고, 나는 항상 디어리가 보고 싶었으니깐.

이서호는 날 보고 갸우뚱거리더니 “일단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하고 첫 번째 질문을 통과시켜줬다. 이게 뭐라고 떨리는 거지?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어.

“두 번째 질문. 이번에도 3초다. 알았지?”

“응.”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이서호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당신에게 기쁜 일이 생겼습니다. 이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요. 이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자신 있지.

“디어리!”

“……야, 진지하게 대답해라.”

“진짠데?”

이서호는 허어, 하고 황당하다는 듯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호 형은 좋은 일 생기면 디어리한테 자랑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지. 우리 디어리는 내 일처럼 기뻐해 줄걸?”

“거봐. 그러니까 디어리.”

“에엥…….”

난 분명 제대로 대답했다. 당당하게 어깨를 쭉 펴고 있었더니 이서호가 날 향해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직 멀었다는 건 알겠다.”

“뭔 소리야?”

“몰라. 다음 질문 들어간다!”

이서호가 내 입을 막으려는 것처럼 빠르게 질문을 이었다. 나는 채근하려던 생각을 접고 이서호의 말을 놓칠세라 집중했다.

“당신은 지금 매우 힘이 듭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온기와 위로를 받고 싶어요. 이때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은?”

온기와 위로, 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선명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 사람의 이름을 입 밖으로 냈다.

“이한 형.”

“드디어 제대로 된 답이 나왔네.”

왜인지 모르게 이서호가 기뻐하며 눈을 빛냈다. 이게 제대로 된 대답 맞는 건가? 내 방에서 몰래카메라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박현철과 일이 생겼을 때 내게 안정을 준 사람이 정이한이었다. 나로서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대답이었는데…….

“그럼 다음 질문. 당신에겐 매우 심각한 고민이 있어요. 그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 이것도 쉽지.

“서호 형.”

갑자기 얼굴을 붉힌 이서호가 무척 당황한 티가 팍팍 나도록 더듬거리며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장난기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숨기는 건 실패했다.

“헐……. 지, 진하온. 너 나한테 마음 있었어? 세상에. 형들이 아니라 나야? 나였어? 맙소사…….”

“뭐라는 거야. 내가 지금 고민 있어서 형 찾아왔잖아. 게다가 장난칠 거면 그렇게 신나서 반짝거리는 눈동자부터 숨기지 그래?”

“아, 들켰네.”

이서호는 혀를 날름 내밀면서 에헤헤, 하고 귀엽게 웃었다.

“그나저나 이런 게 무슨 답이 돼? 난 잘 모르겠어.”

“어이구, 우리 하온 어린이 잘 모르겠어요오. 아직 어려서 연애가 어려워요오.”

“와, 진짜. 때리고 싶다.”

꿀밤 한 대 쥐어박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이서호를 위협적으로 노려보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야, 그럼 이번엔 좀 수위 있는 걸로 해볼까?”

“……그건 또 뭔데.”

“자,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상황을 형들이랑 한다고 생각해봐. 이건 나한테 말 안 해도 되고, 그냥 혼자 생각해. 그리고 마지막에 한 명 남으면 그때 스톱을 외쳐. 오케이?”

“일단 규칙은 알겠는데…….”

“제일 먼저, 손잡아도 거부감이 없다.”

잉? 이건 당연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서 다음 스텝으로 넘기라고 했다. 이서호도 이쯤은 예상했는지 곧장 “포옹해도 괜찮다.”하고 말했다. 이것도 문제없지.

“응.”

“키스해도 괜찮다.”

“……어?”

이, 이건 좀…… 모르겠는데. 형들이랑 그런 걸 한다고 생각한 순간 얼굴에 열이 확 몰렸다. 나는 머릿속에 뭉게뭉게 떠오르려는 이미지를 황급히 머리를 흔들어 날려 버렸다.

“아, 스톱!”

“마지막 한 발 더 남았는데?”

“안 들을래.”

절대.

단호하게 대답했더니 이서호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날 놀리고 싶었던 거군. 내가 이서호를 흘겨보자 나를 피하려는 것처럼 침대에 풀썩 누워 버렸다.

“야, 진하온.”

“왜.”

“나중에 진하온 네가 키스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선택하면 돼.”

나는 허리를 틀어 이서호를 내려봤다. 장난기가 엿보이지 않는 표정을 보니 이건 이서호의 진심 어린 조언인 것 같았다.

키스……하고 싶은 사람이라. 다음 질문은 듣지 않았지만 솔직히 뭔지 눈치챘다. 그러니까 그, 연인들 사이에서 하는 걸 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된다는 거지…….

어렵네.

일단 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알았으니 다음은 이서호 차례였다. 나는 이서호의 옆에 나란히 누워 몸을 모로 돌린 채 이서호를 응시했다.

“……무, 뭐냐? 왜, 왜 그런 그윽한 눈으로 봐? 야, 야야! 난 안 된다. 난 유혹하지 마라! 난 너의 마수에 빠지지 않을 거야!”

이서호는 혼자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구 중얼거리다가 베개를 끌어당겨 얼굴을 푹 파묻어 버렸다. 하여간, 진지한 분위기는 얼마 못 가지. 나는 이서호의 베개를 확 잡아당겨 위쪽으로 던져 버렸다.

“아! 왜에.”

“이제 형 차례야.”

“내가 뭘. 난 없는데? 고민.”

“지난번에 모두가 형을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한 거. 그거 게임 얘기 아니었지? 오늘도 이상했잖아. 연기는 재밌는데, 그리고? 그 뒤에 하려던 말이 진짜 속내 아니었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게임 삼매경에 빠진 이서호를 두고 나 혼자 이서호의 고민이 무엇일지 생각해봤었다. 의미 없이 지나가는 풍경은 터널을 지날 때, 마치 거울처럼 차 내부를 비추어 보여줬다.

그때 이서호는 게임에 푹 빠진 것처럼 보였으나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데뷔 초에 내가 디어리가 만들어준 팬 메이드 영상을 우리 뮤비 조회수로 착각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서호는 자기가 매일 기록을 했노라며 내게 제 갤러리를 보여줬다. 그 안에는 디어리들이 남긴 댓글도 가득 있었다. 당시 나는 악플도 많을 텐데 그런 걸 보고도 멘탈 관리를 잘하는 듯하게 보이는 이서호가 대단하다고 여기고 말았었다.

그런데 만약, 이서호가 지금까지도 디어리들의 댓글을 수집하고 다녔다면? 그렇다면 그 속에서 만난 날 것 그대로의 날카로운 말들이 이서호의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이대로 넘어가선 안 될 것 같았다.

“아……. 아무 일 없어. 진짜야.”

“요즘도 댓글 수집해?”

“어? 어떻게 알았, 아, 아니? 안 해. 그런 걸 왜 보냐?”

하여간 거짓말 못 하는 녀석. 내가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자 이서호는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런 이서호의 뒤통수를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예전에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얼굴도 보이지 마, 목소리도 내지 마, 숨도 쉬지 마, 차라리 죽어버려.’라는 말을 들었어.”

“……뭐? 누가! 감히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벌떡 일어난 이서호는 몹시 화가 난 것처럼 울긋불긋한 얼굴을 하고는 씩씩거렸다. 나는 그런 이서호를 올려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거 말고 또 있어. 나한테 음식물 쓰레기 던지면서 짜증 나게 자꾸 보인다고 화를 냈던 사람도 있었어.”

“……아니, 허어? 아, 너가, 씨이, 너가 왜 그런 일을 겪…….”

급기야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울먹거렸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서호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줬다. 덩치도 산만하면서 진짜 울보라니까. 내 지난 일을 제 일처럼 화내주고 슬퍼하는 이서호는 참, 이서호다웠다. 그래서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런 상처 되게 오래가더라. 근데 난 이제 괜찮아졌어. 형들이 내 옆에 있어 주잖아. 서호 형은? 우리에게 터놓고 싶은 이야기, 정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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