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저녁 간식이라 부담되지 않을 만한 종류로 골랐는데, 들고 보니 부피에 비해 상당히 묵직했다. 밴에 실을 땐 매니저 형이 커다란 쇼핑백 네 개를 들고, 내가 두 개를 들고 날랐지만…….
힐끔.
상주 형은 꽤 마른 편이라서 안 될 것 같지? 트렁크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에그 타르트가 가득 담긴 쇼핑백 네 개를 꺼내려고 했다.
“하온아, 잠깐만.”
상주 형이 나를 부드럽게 옆으로 제쳐 놓으며 차 키를 건네줬다. 왜 주는지 모르지만 일단 주니까 받았더니 형이 단번에 쇼핑백 여섯 개를 전부 들어 버렸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황급히 손을 뻗었다.
“같이 들어요.”
“이 정도는 가뿐하지.”
상주 형은 진짜 가볍다는 듯 쇼핑백을 세 개씩 나눠 든 채 아령이라도 되는 양 위, 아래로 흔들었다. 이 정도면 매니저 형보다 힘센 거 아니야?
“무겁잖아요. 저도 같이 들게요.”
“형님, 아니, 선배님이 이거 들라고 나 보낸 건데 내가 들어야지. 하온이는 트렁크 닫고, 차 잠가줘.”
상주 형은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윙크를 보냈다. 서둘러 형이 시키는 걸 하고 돌아봤더니 상주 형은 그사이 꽤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상주 형을 향해 달려갔다. 아, 저거 진짜 무거운데!
하지만 형은 끝까지 나에게 쇼핑백을 내어 주지 않았다. 결국 형을 따라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지만 내내 마음이 무거워 본심이 툭 튀어나왔다.
“……저 불편해요.”
“왜?”
“형 부려 먹는 기분이라…….”
나보다 눈높이가 낮은 상주 형을 내려 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런 날 올려보던 형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네.”
“도대체 뭐가 좋은 건데요…….”
내가 불편한 게? 아니면 나한테 부려 먹히는 게? 뭐가 됐든 이상한 포인트 아닌가.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말해줘서.”
이, 이거 되게 멋쩍은 걸……. 나는 당혹감에 빠르게 눈을 깜박거리다가 형의 손에서 쇼핑백 세 개를 낚아채듯 들었다.
“저도 들래요. 제 선물인걸요.”
상주 형은 비어 버린 손을 내려 보다가 들고 있던 쇼핑백 하나를 비어있는 손으로 옮겨 들더니 내게 손바닥을 까딱거렸다.
“그럼 하나만 더 줘. 밸런스가 안 맞으니까 영 이상하네.”
무게 중심 잡기가 어렵다며 하소연하듯 말하는 상주 형에게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쇼핑백 하나를 건네줬다. 내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형에게 고마웠다. 나도 잘해줘야지.
훨씬 편안해진 마음으로 걷다 보니 촬영장까지는 금방이었다. 감독님의 용건이 끝난 건지 이서호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서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해맑게 웃으며 우리를 향해 곧장 달려왔다. 근처에 있던 스태프분이 그런 이서호를 향해 귀엽다는 듯 웃는 게 보였다.
“진하온!”
“선물 가져왔어.”
“나 좀 기다리지! 줘줘. 무겁지?”
“응. 무거우니까 형 다 들어.”
쇼핑백 두 개를 건네자 이서호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 갔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한 듯 자꾸 훔쳐보길래 에그 타르트라고 말해줬더니 눈을 반짝거렸다.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케이터링에 먹을 거 없어?”
“있는데 에그 타르트는 없어!”
없을 것 같아서 사긴 했는데, 일단 이서호가 좋아하니 반은 성공이었다.
“음료수는 충분하지? 없으면 지금 사러 갔다 올게.”
“아냐! 종류별로 많아. 앗, 감독님! 감독님!”
나한테 대답하던 이서호가 까치발을 들며 목청껏 감독님을 불렀다. 마침 씬이 끝나고 장면을 돌려보던 감독님이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자고로 뇌물은 권력자에게 제일 먼저 바쳐야 하는 법. 나는 이서호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감독님께 다가갔다.
“우리 막내가 간식 사 왔어요! 에그 타르트!”
이서호가 소포장 된 에그 타르트를 꺼내 건넸다. 무려 감독님한테 건네는 말인데, 이서호의 말끝은 뚝 잘려있었다. 이래도 되는 거야? 걱정스러운 내 마음과 달리 감독님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오히려 내게 관심을 보이셨다.
“오오! 하온 씨, 서호가 멤버들한테도 귀여움 많이 받나 봐요?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이서호의 친화력이란. 감독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다 흐뭇해서 한껏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저희 그룹 공식 귀염둥이예요.”
“으하학! 그거 자칭이잖아!”
이서호가 기분 좋게 웃으며 떠들었다.
“아니야, 내가 인정했으니까 공식 맞아.”
“으히히.”
오늘 이서호 유달리 기분 좋아 보이네. 이거 내가 와서 이런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예전에 나도 비슷한 상황일 때 그랬으니까 그냥 그렇다고 쳐야지.
이서호가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입꼬리에 웃음이 걸려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좋아하니 다음엔 형들이랑 같이 와야겠다. 내심 그동안 한 번도 안 와서 섭섭했을지도 모르겠어.
“사실 하온 씨도 섭외하고 싶었는데, 예산이 부족해서. 쩝.”
감독님은 무척 아쉬워하시며 다음에 드라마 찍을 생각 있는지 넌지시 내게 물으셨다. 난 원래 연기에 뜻이 없다. 지난번에는 서브 미션이 떠서 했을 뿐이지.
시스템에 방치당하는 지금은 서브 미션이 뜰 기미도 안 보여서 드라마는 전부 거절해 달라고 매니저 형에게 말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단칼에 거절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음. 원래 연기보다는 그룹 활동에 더 집중하고 싶어서 전부 거절하긴 했는데요. 감독님 드라마라면 영광이지요.”
“흐흫흐. 이 친구 사회생활 좀 할 줄 아네. 응?”
“에헤헤. 우리 서호 형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당연하지요! 걱정하지 마. 내가 아주 귀하게 모시고 있으니까.”
“어? 에그 타르트예요?”
“작가님도 드실래요?”
“응. 나 먹을래~”
이서호가 잽싸게 에그 타르트를 내밀었다. 작가님도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흡족해졌다. 좋아. 메뉴 잘 골랐어.
***
예정 시간인 자정이 넘어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촬영이 모두 끝났다. 솔직히 패딩은 오버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아니었으면 무조건 감기 걸렸겠다. 패딩을 입었는데도 꽤 추워서 도중에 매니저 형이 챙겨준 핫팩까지 패딩 안에 덕지덕지 붙여놓고 나서야 느긋하게 기다릴 여유가 생겼을 정도였으니까.
“으아……. 내일도 새벽부터 대기야.”
이서호가 기지개를 쭉 켜면서 시트에 기댔다. 패딩을 벗고 안에 붙인 핫팩을 하나씩 떼어내며 이서호를 위로했다.
“많이 힘들지.”
“음. 그래도 재밌어. 재미는 있는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이서호의 눈동자가 흐릿해 보였다. 왜 저러지?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어어엉…….”
이서호는 어리광 부리는 목소리로 잔뜩 투정 부렸다. 기분 탓인가? 아닌데. 예전에도 이런 싸한 기분을 느낀 적 있었는데. 언제였지? 언제 이런 기분을 느꼈더라.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기시감 때문에 그냥 넘기기엔 어딘지 찝찝했다. 나는 열심히 기억을 뒤적거리며 이서호와 있었던 일들을 곱씹었다. 하지만 좀처럼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기억에서 잊혔다면 별일 아니라서 그런 걸까?
하지만 뭔가…….
연신 하품만 하던 이서호가 휴대폰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졸린다면서 게임 할 기운은 있나? 인페르노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액정을 본 순간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사건이 있었다.
전에 정이한이 형들 방에 틀어박혔을 때, 이서호와 게임을 한 적 있었다. 그때 이서호는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제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건 아니라고 말했었다.
그때는 게임하다가 욕먹어서 그랬다고 넘어갔었지. 나도 정이한과 인페르노가 쌍으로 충격을 줘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던 것 같은데. 혹시 이서호 뭔가 있는 거 아니야?
“아, 맞다. 진하온. 너 오늘 촬영 어떻게 됐어? 이겼음?”
“빨리도 물어본다.”
“너 온 게 좋아가지구 깜박했지 모양.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비밀이야. 절대 밝히지 말랬으니까 본방사수해~”
“헐! 너무하다!”
삐죽거리던 이서호는 로딩이 끝나기 무섭게 게임에 집중했다. 익숙한 게임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짓눌리는 것 같아서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생각에 잠겼다.
***
“상주 형 내일 봐요!”
“응. 잘 자고. 일찍 데리러 올게.”
“네엥!”
“형, 조심히 가세요.”
“그래, 하온이도 푹 쉬어!”
“네.”
상주 형을 배웅한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형들은 오늘 아직도 회사에 있어서 지금 숙소에 들어가면 이서호랑 단둘이었다. 이야기하기 편할 테니 차라리 잘 됐다. 졸려서 눈이 풀린 이서호랑 제대로 대화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서호는 하품을 쩍 한 뒤 신발을 대충 벗어 놓고 소파에 엎드렸다. 이서호가 벗어 둔 신발을 정리하고 이서호의 발끝에 앉아 물었다.
“서호 형.”
“응…….”
“고민 있지.”
“……어? 무슨 고민? 내가? 나? 아니? 없는데?”
있네. 누가 봐도 고민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렇게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뱉으면 어떻게 모르겠어.
“털어놓기 곤란한 거야?”
“아니이? 진짜 아무것도 없다니까?”
도망치듯 벌떡 일어난 이서호가 휘파람을 불었다.
“씻고 자야겠다아~”
“난 고민 있는데.”
“어?”
날 피해 도망가려던 이서호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난처한 듯한 얼굴로 날 보다가 뒷머리를 슥슥 긁었다.
“진짜 고민이야? 아니면 나 떠보는 거야?”
“둘 다. 원래 형한테 내 고민 상담하려고 찾아간 건데…….”
“나한테?”
이서호는 많은 형들 두고 왜 자신이냐는 듯,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반문했다. 이서호가 안고 있는 고민이 뭔지 몰라도 내 고민이 훨씬 가벼울 것 같았지만, 내가 먼저 상담하면 이서호도 편하게 자기가 가진 고민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응. 연애 상담.”
“아아. 그래서.”
이서호의 얼굴에 장난기가 들어차더니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럼 내 방으로 들어가자. 형들 오면 좀 그렇잖아~”
“응.”
나는 순순히 이서호의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자 기다렸다는 듯 이서호가 물었다.
“뭔데?”
질문은 되게 짧았는데 반짝이는 눈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보이는지. 다양한 기대감이 내포된 듯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어.”
“엥?”
“……내 질문 이상해?”
반응이 어째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