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56화 (256/320)

256.

새로운 가면가왕이 준비된 자리로 가서 앉자마자 카메라가 나를 잡았다. 나는 마이크를 든 채 MC의 멘트를 기다렸다. 아쉽게 방어전을 실패한 나에 대한 안타까움과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른 ‘그대를 만나.’가 얼마나 좋았는지에 대한 MC의 찬사가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123대 가면가왕! 힐러님의 정체가, 지금! 공개됩니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BGM이 흘러나왔다. 나는 가면의 아랫부분을 잡은 채 시간을 끌었다. 패널들은 안달복달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얹었다.

“으아아! 빨리 보여줘요!”

“아, 저분이 방송을 아네! 걸그룹 맞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가면을 위로 밀어 올렸다. 가면 하나만 벗었을 뿐인데 순간 시원함이 몰려왔다. 땀에 푹 절어 있으면 어떡하지. 보기 흉하지 않으려나.

“……허어.”

“와…….”

순간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곧 곳곳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이, 이런 분위기는 못 참겠는데……. 이럴 땐 빨리 인사해서 화제를 전환 시켜야 한다. 나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가 세운 뒤 방청석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디아스의 메인 보컬, 진하온입니다.”

“꺄아아아악!”

동시에 방청석에서 디어리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날 보고 열렬하게 환호하는 사람들을 찾아 방긋 웃어주었다. 우리 디어리가 여기도 있었네!

“와……. 디아스였구나!”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저 디아스 팬인데! 하온 씨 발성법 완전히 바꾸셨구나. 진짜 못 알아봤어요…….”

“아니, 잠깐. 나 가면 벗었는데도 성별을 모르겠어!”

“형님, 디아스 몰라요? 어휴, 하온 씨가 이해하세요. 할배들은 머리만 길면 여자로 본다니까요?”

“근데 목소리가! 완전 다른데? 노래할 때랑 말할 때 목소리가 전혀 달라요!”

“하온 씨, 혹시 지금 그대를 만나 한 소절만 불러줄 수 있어요? 매칭이 전혀 안 되는데?”

패널석이 떠들썩해졌다. 여기저기서 동시에 말소리가 튀어나와 오디오가 맞물려 들어갔다. 하지만 떠들썩한 분위기 자체를 방송에 내보낼 생각인지 맞물리는 오디오를 지적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나한테 들어오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노래 한 소절 불러달라는 말은 귀신같이 귀에 콕 박혀 들었다.

“넵, 한 소절 불러보겠습니다!”

내가 노래를 부르려고 하자, 거짓말처럼 사방이 조용해졌다. 나는 빠르게 감정을 잡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절을 불렀다. 그러자 감탄이 섞인 탄성이 다시 한번 스튜디오를 채웠다.

“아, 벌써 끝? 너무 아쉬운데…….”

“하온 씨, 지금 몇 살이에요?”

“열아홉입니다.”

“아니, 그 나이에 이 감성이 말이 돼? 감정 어떻게 잡은 거예요, 도대체?”

카메라가 나를 풀 샷으로 잡고 있었다. 멤버들을 떠올리자 내 얼굴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저에게는 저희 디아스 멤버들을 만난 게 정말 기적 같은 일이거든요. 그래서 멤버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멤버들을 좋아하는 제 마음을 담아서 불렀어요.”

“아니, 그걸로 이렇게 가슴에 스며들 정도로 절절한 감성이 나온단 말이야? 원래 아이돌이 저렇게 서로 애틋해? 성유 씨?”

“아, 저희는 만나기만 하면 싸워서 잘 모르겠네요.”

성유 선배님은 익살스럽게 제스처를 취하며 아무렇지 않게 툭 대답했다. 그러면서 특히 자신의 그룹은 형들이 동생 놀리는 데 진심이라며 치를 떨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간단한 토크가 더 이어지고, 가면가왕 촬영이 끝났다. 섭섭한 마음은 없을 줄 알았는데 옷을 갈아입고 나니 조금 아쉬운 것도 같았다. 그래도 후회 없는 무대를 했으니까.

나는 거울 속 나를 보며 방긋 웃어 보인 뒤 휴대폰을 챙겨 나를 기다리는 매니저 형에게 갔다. 이제 서호 형 보러 가야겠다. 선물로 야식 사야지.

“매니저 형.”

“응.”

“서호 형한테 저 간다고 말했어요?”

“하온이 피곤할 수도 있으니까 아직 안 했지. 지금 얘기해 둘까?”

잠깐 고민한 나는 서프라이즈를 할 생각에 방긋 웃으며 고개 저었다.

“아니요! 몰래 갈래요.”

내 꿍꿍이를 알아차린 건지 매니저 형은 날 보고 흐뭇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매니저 형, 가는 길에 백화점 들러도 돼요?”

“선물 사려고?”

“네. 빈손으로 가기는 좀 그래서 간식거리라도 사 가려고요.”

같이 촬영하는 배우분들이랑 스태프 몫까지 사려면 짐이 꽤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나 혼자라 짐 실을 공간이 넉넉한 건 다행이었다.

***

나를 알아보는 촬영장 스태프분들에게 검지로 입술을 누르며 필사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내 신호를 알아차린 스태프분들 덕에 나는 은밀하게 이서호의 대기석을 찾아갈 수 있었다.

늦은 밤 야외 촬영이라 날씨가 꽤 쌀쌀한데도 이서호는 반팔 차림을 한 채 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양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손으로 턱을 감싼 이서호에게서는 평소의 장난스러운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진지한 모습으로 관찰하는 이서호는 낯설 정도였다. 음. 나 방해되는 건 아니려나. 집중하고 있는 이서호를 보니 살짝 걱정이 들었다. 최대한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접근해 이서호의 어깨를 툭 짚었다.

“형.”

“헉! 헙!”

집중하고 있었던 이서호가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나도 덩달아 깜짝 놀라 입을 뻐끔거렸다. 와중에 비명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안으로 삼키는 게 대견할 지경이었다. 이서호는 놀라게 한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아, 진하온. 내가 소리쳤으면 어떡할 뻔했어?”

“미안. 그렇게 놀랄지 몰랐어.”

나는 내 얼굴 앞으로 합장하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이서호가 소리쳤다면 나 진짜 민폐 방문객으로 등극할 뻔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아니야…….”

“그럼 됐어. 근데 너 옷은 왜 그렇게 얇게 입고 있냐? 겉옷 안 챙겼어?”

“반팔 입고 있는 사람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무려 코트를 입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이서호는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벌떡 일어나 내 손을 잡아끌었다.

“상주 형, 제 패딩 어딨어요?”

“아, 여기 뒀어.”

로드 매니저님이 곧장 두툼한 패딩을 이서호에게 내밀었다. 이서호는 되게 편하게 대하네. 나는 여전히 낯설기만 한 로드 매니저님에게 아직도 낯가리는 중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매니저 형이 옆에 있어서 좀 낫긴 한데…….

“입어.”

이서호가 내게 패딩을 내밀었다.

“나 안 추워.”

“여기 가만히 있으면 추워. 너 금방 갈 거 아니잖아.”

“누가 그래? 금방 갈 건데?”

“……갈 거야?”

그렇게 묻는 이서호의 얼굴은 서운함과 섭섭함이 가득했다. 어째 가여운 강아지를 괴롭히는 느낌이 들어서 계속 놀리려는 생각이 쑥 들어가 버렸다.

“아니. 안 가지. 형 보러 왔는데 같이 퇴근해야지.”

“히힛. 빨리 입어. 너 감기 걸리면 나 형들한테 혼나.”

대번에 밝아진 얼굴을 한 이서호가 내 어깨에 패딩을 걸쳐줬다. 겨울도 아닌데 패딩은 좀 오버 아닌가?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일단 순순히 이서호를 따랐다.

“그런데 서호 형, 휴식 시간 언제야?”

“어……. 모르겠어. 왜?”

“선물 사 왔는데.”

“선물? 뭔데? 뭔데?”

“비밀. 나르는 거 도와줄래?”

“엉!”

잔뜩 상기된 얼굴로 궁금해하는 이서호를 매단 채 나는 짐을 나르기 위해 패딩에 팔을 끼워 넣었다.

“지금 가져오려고?”

우리 대화를 듣던 매니저 형이 일어나려고 했다. 나는 형의 양쪽 어깨를 잡아 누른 뒤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서호 형이랑 다녀올게요. 키만 주세요.”

“안 돼. 너희만 보낼 순 없어. 아, 상주야. 네가 같이 다녀올래?”

“네, 선배님.”

로드 매니저님이 단칼에 대답하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 괜찮은데…….

“그냥 둘이…….”

“상주랑 다녀 와.”

매니저 형은 내 말허리를 잘라내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로드 매니저님과 이서호와 함께 움직이려던 때였다. 갑자기 감독님이 이서호를 부르는 바람에 이서호가 떠나 로드 매니저님과 나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가실까요?”

“……아, 넵.”

여기서 싫다고 하면 로드 매니저님 입장이 난처해지겠지…….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어려웠다. 이렇게 계속 어색하면 나중에 로드 매니저님이랑 둘이 스케줄 뛸 때 어떡하냐고!

……설마, 그래서 매니저 형이 로드 매니저님이랑 가라고 떠민 건가? 꽤 그럴듯한 가설을 세우며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을 때였다.

“하온 씨.”

“……네, 넵?”

“저는 하온 씨를 위한 사람입니다.”

뜬금없는 말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로드 매니저님은 나를 올려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렇게 티 났나…….

“죄송해요…….”

“네? 아뇨, 아뇨. 사과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편하게 대하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그렇다고 쉽게 마음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상해. 어쩐지 유독 로드 매니저님께 마음을 주는 게 어려웠다. 왜 이러지. 낯선 사람 어려워하는 거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어, 그럼. 말씀 편하게 하세요…….”

나한테 존댓말을 해서 그런 걸까 싶어 일단 말부터 편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봤다. 나를 뺀 다른 멤버들은 이미 로드 매니저님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오직 나만 로드 매니저님 앞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거라니.

“그럴까요?”

“아직도 존댓말 하시는데요…….”

로드 매니저님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더니 한결 가벼운 어조로 발랄하게 말했다.

“그럼 편하게 해볼까?”

“네!”

“고마워. 하온이한테 신뢰받을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할게.”

이런 말을 들으니까 그동안 낯을 가린 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성격 때문에 그랬던 건데 오해하고 계셨던 걸까.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제가 낯을 좀 많이 가려요……. 로……, 형 잘못이 아니에요.”

“불편하면 로드 매니저라고 계속 불러도 돼.”

“아니에요. 저도 이제 형이라고 부를게요. 그래도 되죠? 상주 형.”

“그럼 나야 고맙지.”

나를 위해 분위기를 편하게 해주려고 애써주시는 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이럴 순 없으니 나도 노력해야지. 매니저 형 후배라고 했으니 믿어도 되는 사람 맞잖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