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55화 (255/320)

255.

“다른 애들 생각은?”

매니저 형이 멤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전 하온이 의견에 따를게요.”

“진하온이 제일 피해 많이 봤으니까 진하온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요.”

“상관없어요.”

정이한, 이서호, 강현 형이 순서대로 말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직 의견을 말하지 않은 유찬 형을 바라봤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찬 형은 잠시 고민하는 듯 “흐음.”하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형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하온이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괜찮긴 하지만…….”

유찬 형은 나를 한 번 바라본 뒤 매니저 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박현철, 그 사람은 확실히 처벌했으면 좋겠어요. 용서가 안 돼요.”

매니저 형은 가벼운 어투로 “알았다.”하고 대답했다.

“어차피 재판이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건 아니라 오래 걸릴 테니 너희 신경 쓸 일 없도록 회사에서 조용히 처리할게. 재판 결과는 공유해줄까?”

“전 그것도…….”

난 싫다고 했고 이서호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 건은 나중에 결과가 나오면 듣고 싶은 멤버들에게만 따로 전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이제 내 마음에 걸리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매니저 형.”

“응. 하온아.”

“저는 이 사건이 꼭 묻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주실 수 있어요?”

매니저 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하온이한테 말한 뒤 밤새 생각해 봤어. 박현철을 제대로 처벌하면서 조용히 묻을 방법을. 실장님과 의논해 봐야 하겠지만 최선을 다해볼게.”

“만약, 어려울 것 같으면 전 합의해도 괜찮아요.”

“하온아.”

유찬 형이 날 말리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유찬 형을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형, 저는 형들이랑 보내는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해요. 디어리에게 우리를 보이는 그 순간이 행복하고요. 저는 앞으로도 좋은 것만 보고, 즐거운 것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어요.”

유찬 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처벌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당사자인 내 의사가 너무 확고했다. 나는 이제 이번 사건을 전부 잊고 나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

나를 비롯한 멤버들의 일상은 다시 정신없이 굴러갔다. 나는 가면가왕 다음 촬영에 선보일 곡 연습과 강현 형과 페어 댄스 연습을 병행했다. 노래 진도는 쭉쭉 빠지는데, 페어 댄스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서 그게 너무 뿌듯했다.

이서호는 본격적인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어 우리 중에 제일 바쁘고, 얼굴 보기 힘든 멤버가 되었다. 유찬 형도 다음 앨범 타이틀곡 작곡에 매달려 있어서 정신없었고, 정이한도 래퍼 경연곡 작곡에 시간을 쏟는 중이었다. 강현 형은 춤 선을 더욱 정교하게 만든다며 연습실에 콕 박혀 버렸고.

그래서인지 다들 숙소에 돌아오면 피곤함에 지쳐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멤버들과 함께 있지만 따로 지내는 듯한 뭔가 기묘한 일상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의 가면가왕 2회차 촬영일.

나는 매니저 형과 함께 단둘이 방송국을 향했다. 언제나 북적거렸던 밴이 고요했다. 고개만 돌리면 보이던 멤버들이 없으니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참 중증이다. 스케줄 혼자 뛰러 가는 것뿐인데 이게 이렇게 외로울 일인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멍하니 있었더니 자연스럽게 멤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형들의 고백도.

좋아하는 것과 연애하고 싶은 건 뭐가 다른 걸까. 나도 이론으로는 사랑이 어떤 건지 알지만, 내 안에서 무엇이 어떻게 변해야만 형들의 마음에 답을 줄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누군가한테 물어봐야 하나.

매니저 형……은 안 되겠지.

그럼 이서호밖에 없는데. 이서호도 나처럼 잘 모를 것 같긴 하고. 그렇다고 멤버 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역시 이서호밖에 없네. 나중에 도움을 좀 청해봐야겠다.

***

[힐러] 라고 쓰여 있는 대기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 속의 나는 게임 속 프리스트가 입을 법한 품이 크고 넓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몸의 라인을 가리기 위해 겹겹이 껴입은 탓에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자, 가발 쓰자.”

“넵.”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가발이 내 머리에 얹어졌다.

“어우, 예쁘다. 하온이 오늘도 미모가 열일하는구나.”

코디 누나가 날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민망함에 같이 웃고 있었더니 코디 누나가 금빛 왕관이 장식된 가면을 흔들었다.

“이런 걸로 얼굴을 가려야 한다니…….”

코디 누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내 얼굴에 가면을 씌워줬다.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하온아, 파이팅!”

“감사합니다.”

변조된 목소리가 영 어색했다. 남은 시간에 연습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목이나 아껴둘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멤버들의 응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한참 촬영 중인 이서호까지 응원 메시지를 보내줬다. 아!

“매니저 형.”

“어? 어우. 목소리 적응 안 된다. 왜?”

“오늘 서호 형 촬영 언제 끝나요?”

“자정까지 예정되어 있어. 가려고?”

“네. 내일 저 스케줄 없잖아요. 서호 형 응원하러 가고 싶어서요.”

“서호가 좋아하겠네. 피곤하면 도중에 돌아와도 되니까.”

예전에 내가 드라마 촬영할 때도 멤버들이 번갈아 가면서 와줬었다. 그게 꽤 힘이 나고 기뻤던 기억이 있다. 나 때와 다르게 이번엔 다들 바빠서 커피차만 보내고 가지 못했으니까 오늘 촬영 끝나면 가봐야겠어.

“네. 그럼 저 가면가왕 촬영 끝나고 서호 형 촬영장으로 데려가 주세요.”

“오케이.”

흔쾌히 허락받은 뒤 나는 이 사실을 숨긴 채 멤버들과 톡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힐러님 이동 하실게요.”

“네.”

***

“아름다운 음색과 신비로운 분위기로 화제의 중심이 된 분이죠! 과연 성공적으로 가면가왕의 자리를 방어하실 수 있을지! 너무 기대되는데요! 123대 가면가왕 힐러님! 박수로 맞아주세요!”

나는 천천히 무대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패널석과 방청석에서 열렬히 환호하며 환영해줬다. 자리를 잡고 선 나는 얌전히 들고 있던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갔다.

“안녕하세요. 노래로 여러분의 마음을 치유해줄 힐러입니다.”

“키야! 음색 깡패 힐러님!”

“나 지난주에 고막 완전 녹았잖아!”

“아, 그래서 힐러님 여자? 남자? 힌트 좀 주세요!”

패널석에서 정신없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가면가왕에서 나는 성별이 모호한 중성적 이미지를 내세웠다. 그래서 긴 머리 가발도 사용했고, 노래도 평소와 달리 가성 위주로 부르면서 발성법도 바꿔 나라는 존재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습니다.”

나는 애매하게 대답한 뒤 마이크를 내렸다. 그러자 다들 자신이 생각한 가수가 맞다면서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중 내 이름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잘 숨긴 건지 인지도가 낮은 건지 모르겠네. 우리 디어리 중에는 알아차린 사람도 있다던데…….

내가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MC가 떠들썩한 분위기를 잠재운 뒤 내 무대 시작을 알렸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이크를 꽉 움켜잡았다.

이번 내 방어전에 부를 노래는 임선희 선생님의 ‘그대를 만나’였다. 가사가 마치 지금의 나를 표현하는 노래 같아서 꼭 이 노래를 하고 싶었다. 사실 1회차 촬영 때 부르고 싶었지만, 도전자로서는 큰 임팩트가 없는 것 같아서 나중에 가왕이 되면 꼭 이 노래로 방어전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곡이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가사를 떠올렸다. 감정을 잡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너무나 소중한 나의 멤버들. 노래 가사 그대로 내게 기적 같은 사람들을.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좌중은 조용했고, 어느새 내 목소리와 멜로디만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마지막 소절만 남겨 둔 채 나는 마이크를 내렸다. 이어지던 멜로디가 점차 흐려질 무렵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내가 너의 기적이었다면…….”

담백하게 마지막 소절을 부른 뒤 마이크를 내렸다. 방청석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하자 사람들의 함성과 환호가 이어졌다.

역시 나는 노래가, 무대가 좋았다. 가면 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바라봤다. 나를 가장 충만하게 해주는 곳, 내가 제일 행복한 장소는 역시 무대였다.

“허……. 절절하고 애절한 느낌이 진짜…….”

“저 소름 돋았어요…….”

“여기 휴지 좀 주세요! 다들 눈물샘 터졌는데?”

“어우. 진짜 그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서……. 아, 왜 이렇게 눈물이 안 멈추죠?”

“저기저기, 방청석도 휴지 좀 갖다줘요! 우는 사람 많네!”

어, 음. 민망하다…….

나는 머쓱한 마음으로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서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못 이길 것 같은데. 내가 듣기에도 도전자분이 부른 ‘그래도 넌.’은 정말 대단했다.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도전자는 이별을 선언한 연인에 대한 광기와 집착, 집념을 폭발적인 고음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내 임팩트가 많이 약한 것 같긴 했다. 그래도 가왕도 한 번 했고, 무대 반응도 좋았으니 애초 목표로 했던 홍보는 확실하게 한 셈이었다. 이 정도면 만족해.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전광판을 바라봤다. 우리 두 사람의 투표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124대 가면가왕은……!”

잠시 후 내 득표가 멈추고 도전자의 득표수가 움직였다. 놀랍게도 고작 3표 차이였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전광판을 들여다봤다.

“와우, 고작 3표 차이로! 시계틱톡님! 124대 가면가왕에 등극했습니다!”

나는 열심히 박수치며 축하해줬다. 그래도 내 예상보다 훨씬 좋은 성적이었다. 이제 다음은 드디어 가면을 벗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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