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다음 날 멤버들이 모두 일어나자 매니저 형이 우리를 불러 모았다. 매니저 형은 새벽에 내게 전달한 이야기를 멤버들에게도 전했다. 멤버들은 나처럼 박현철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고, 옆집 남자가 우리 숙소의 비밀번호를 팔았다는 이야기에 충격받은 것처럼 하나같이 입을 벌렸다.
“믿을 사람 하나 없네…….”
허탈한 듯 중얼거리는 유찬 형의 시선은 벽 너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꼭 기다렸다는 것처럼 현관 벨이 울렸다. 순간 가슴이 펄떡거렸다. 내가 옆에 있던 정이한의 팔을 움켜잡았다는 걸, 정이한이 내 손등을 감싼 뒤에야 알아차렸다.
“누구지?”
이서호가 멀뚱거리는 사이 매니저 형이 인터폰을 확인했다.
“옆집 아주머니랑 아들 같은데.”
우리는 동시에 경직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매니저 형은 어떻게 할 건지 묻는 듯한 눈으로 돌아봤다. 우리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서로 눈만 마주칠 뿐이었다. 우리 비밀번호를 팔아서 사생이 집에 들어오게 한 범인이었다. 솔직히 마주치기 무섭기도 했고,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사실 그냥 보고 싶지 않았다.
“너희가 대면하기 싫다고 하면 돌려보낼게.”
“지금은 좀…….”
유찬 형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며 난처해했다. 우리는 그에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이야기하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네.”
매니저 형이 문을 연 순간, 아주머니의 오열이 열린 문을 타고 여과 없이 흘러 들어왔다.
“죄송, 해요. 죄송합니다……. 자식 교육 제대로 못 한 제 잘못이에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흐윽…….”
그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얼마 전 아주머니가 가져다주셨던 식혜를 떠올렸다. 착한 청년들이 열심히 산다며 마주칠 때마다 인자하게 웃어주시던 분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아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 나 눈물 날 것 같아…….”
이미 커다란 눈물방울을 매단 이서호가 웅얼거렸다. 이서호는 눈매를 잔뜩 찡그린 채 계속 현관 쪽을 힐끔거렸다.
“마음이 불편해요…….”
불편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 가슴 한쪽을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연거푸 한숨 쉬던 유찬 형도 내게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는 좋은 분이셨는데…….”
“그렇지.”
정이한도 씁쓸하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주머니 봐서 용서해주면 안 되나?”
그때 이서호가 형들의 눈치를 보면서 은근슬쩍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유찬 형이 벌떡 일어났다.
“그럼 이야기 들어볼까? 다들 괜찮아?”
“전 좋아요.”
“나도.”
멤버들이 전원 찬성하자 유찬 형이 얼른 현관을 향했다. 집에 마실 게 있으려나. 아주머니께 드릴 음료라도 좀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온아, 어디가?”
정이한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올려봤다.
“음료수라도 있나 보려고요.”
“아, 같이 가자.”
부엌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이걸 같이 가? 좀 의아하긴 했으나 곧 들어오실 것 같아 알아서 하라는 의미로 끄덕거렸다. 다행히 냉장고에 알로에 음료수가 남아 있었다.
“아들 것도 챙겨야 할까요?”
걔는 주기 싫은데. 아주머니가 좋은 사람일 뿐, 아들은 아니잖아.
“어…….”
정이한은 컵 두 개를 챙겨 든 채 멀뚱히 서 있었다. 그중 하나를 내려놓을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아주머니만 드리기엔 좀 그렇지?
“음. 그냥 두 잔 챙기죠.”
“응. 그러자.”
우리가 컵에 음료수를 따르고 있을 때, 아주머니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당황한 유찬 형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 이러지 마시고 일어나세요.”
“제가 무슨 낯으로……. 죄송합니다. 학생들, 정말 미안해요…….”
“아, 엄마! 엄마가 왜 무릎 꿇어!”
신경질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짜증을 내곤 있었지만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자식새끼가 잘못한 건 부모 탓이야. 그러니까 엄마가 무릎 꿇어야지. 누가 하겠어. 너한테 해도 되는 거, 하면 안 되는 거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내 잘못이야.”
“……그, 그게 왜 엄마 탓이야! 내가, 씨이, 내가 잘못한 건데, 내가…….”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일단 진정하세요.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매니저 형이 침착한 어조로 두 사람을 달랬다. 나와 정이한도 거실로 돌아와 테이블에 음료수 두 잔을 내려놓았다. 여덟 명이 전부 앉을 자리는 없어 보여 나는 소파 뒤에 자리를 잡았다.
“하온이는 앉자.”
정이한이 내 어깨를 감싸 소파 앞쪽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강현 형이 당연하다는 듯 일어나 제 자리에 나를 풀썩 주저앉혔다.
“이런 건 막내가 서는 거 아니에요?”
“아팠잖아. 아픈 사람은 편하게 있어야 해.”
“……내가 일어날까?”
이서호가 슬쩍 엉덩이를 떼자 강현 형이 이서호의 어깨를 꾹 눌러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앉아 있어.”
“으응……. 근데 형, 나 좀 불편한데?”
이서호의 호소는 매니저 형이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면서 묵살되어 버렸다. 자리를 만들어 준 의미도 없이 아주머니는 우리를 보자마자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나와 이서호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어른이 무릎 꿇고 있는데, 그 앞에서 태연히 앉아 있을 순 없었다. 당황한 내가 아주머니를 일으켜 드리려고 했으나 한사코 거절하셨다. 결국 우리는 모두 어정쩡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석찬, 너도 꿇어.”
“…….”
김석찬이라 불린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느다랗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모아 보였다.
“사과드려. 얼른.”
“죄, 죄송, 죄송합니다…….”
“……아.”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타이밍이었지만, 괜찮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내 스킬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스토커와 사생에게 내 사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줄 뻔했으니까.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했다.
“미안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부 들어서 압니다. 우리 애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또 여러분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제 아들이라. 제 자식새끼인지라…….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어요……. 이런 말 드리기도 죄송하지만……. 하, 합의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제 고작 스무 살이에요…….”
아주머니는 말씀하시던 와중에도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어쩐지 부러웠다. 잘못한 것까지 모두 품어주고, 무한한 사랑을 퍼부어 주는 엄마가 있다는 게.
나에게 엄마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히스테리와 고함뿐이었다. 김석찬에게는 드라마 속에나 있을 법한 꿈에 그린 듯한 자상한 엄마가 있으면서. 그런데 너는 왜 그랬을까. 뭐가 부족해서. 왜 우리의 정보를 판 걸까.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돼요?”
나는 김석찬을 향해 물었다.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석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아주머니가 솔직하게 대답하라며 김석찬의 등을 내리쳤다.
“아! 아파!”
“아파? 아파? 너 아픈 건 아파? 너 아픈 건 아는데 왜 다른 사람한테 상처 줄 짓을 했어! 왜! 솔직하게 말해.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드려.”
“도, 돈 준다고 해서 그랬어!”
아주머니가 어마어마한 눈빛으로 김석찬을 노려봤다. 그러자 김석찬은 다급하게 나를 보며 “……요.”하고 말을 덧붙였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김석찬은 침을 꿀꺽 삼킨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비밀번호만 알아내면 50만 원 준다고 했어요. 저, 저도 여자 혼자 살았으면 안 해줬을 텐데 남자가 다섯이나 사니까 괜찮을 줄 알고…….”
김석찬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금액이 커서 욕심이 났다며 이실직고했다.
“어느 날 집에 들어왔는데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있었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아요? 그쪽도 남자잖아요. 아무렇지 않을 것 같나요?”
김석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주머니를 생각하면 용서해주고 싶지만, 이 사람의 안일한 생각으로 우리가 느껴야만 했던 공포를 떠올리면 쉬이 용서해줄 수가 없었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 사람뿐 아니라 박현철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생각해야 하는데.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온아.”
정이한이 뒤에서 나를 끌어당기더니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나를 소파로 이끌어 주저앉혔다. 왜 이러는가 싶어서 멀뚱히 정이한만 올려봤다.
“무리하지 마.”
정이한은 그렇게 말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내 앞을 막아서며 무릎 꿇고 앉은 모자를 향해 말했다.
“저, 아주머니.”
“네…….”
“지금 당장 용서해 드린다고 말하긴 힘들 것 같아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죄송합니다.”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음료수는 대접해 드리지도 못했네. 나는 내가 따라 놓은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 머리가 복잡했다.
“다들 어떻게 하고 싶어?”
유찬 형이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멤버들이 하나, 둘 자리에 앉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현철 쪽도 생각해야 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끝을 응시했다. 그냥 평소의 내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런 문제들은 다 없던 일로 치부하고, 평소처럼 지내고 싶을 뿐이었다.
“매니저 형.”
“응. 하온아.”
“형들만 괜찮다면 박현철, 김석찬. 전부 회사에서 결정하고 처리해 주시면 안 돼요?”
“너희가 원한다면 그래도 돼.”
“그럼 저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제가 왜 그 사람들 때문에 계속 생각하고 신경 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내가 사랑하는 지금의 내 삶.
소중한 나의 일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