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53화 (253/320)

253.

배가 부른 형들이 하나, 둘 씻으러 가고 식탁에는 나와 이서호, 정이한만 남아 있었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깨끗하게 발라 먹은 이서호가 부른 배를 두들기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다가 주변을 삭 살피더니 내 쪽을 향해 상체를 숙여 속삭였다.

“야야, 진하온. 우리가 너 어떻게 찾았는지 안 궁금하냐?”

나중에 기회 봐서 은근슬쩍 물어보려고 했는데, 고맙게도 이서호가 먼저 운을 띄워줬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궁금해. 어떻게 찾았어? 박현철이 스토커인 건 어떻게 알았고?”

이서호는 입가에 묻은 양념치킨 소스를 혀끝으로 핥은 뒤 나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장난 아니었음! 이한 형 완전 명탐정이었거든!”

“이한 형이?”

의외의 이름이 호명되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이한을 바라봤다. 우리 팀 대표 똑똑이는 유찬 형인 줄 알았는데? 정이한이 다시 보이네. 왠지 내가 다 흐뭇해져서 미소 지었더니 정이한이 민망한지 뺨을 붉힌 채 시선을 피했다.

“잘 들어! 한 번만 말한다.”

“응응.”

그렇게 이서호는 내가 몰랐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박현철이 내 휴대폰으로 나인 척 보낸 톡 때문에 발목이 잡혔다는 이야기였다. 와, 진짜 대단한데.

“그렇게 우리가 2층에 대기했거든?”

“응응.”

“박현철이 우릴 발견하면 너한테 안 갈 거 아냐? 그래서 로드 매니저님이 박현철 미행하고, 우리는 또 거리를 이만큼 벌리고 뒤따라갔지!”

이서호가 두 팔을 쭉 펼쳐 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박현철이 복도로 꺾었을 때 캉캉 소리가 났대.”

“아, 그거 내가 낸 소리였어. 지나가는 사람 있으면 듣고 구해달라고.”

“헐, 진짜? 어떻게?”

나는 카트를 밀어서 선반에 부딪혀 소리 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진하온, 너 독한 건 알았는데 진짜 독하다.”

“뭔 소리야.”

“아니, 나였으면 완전 패닉에 빠져서 엉엉 울고만 있었을 텐데 대단하다 싶어서. 욕 아니라 칭찬이다?”

“그렇다고 하자. 하여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서 다시 원래 대로 돌려놓았다. 이서호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하며 헷갈린다는 듯 갸웃거렸다.

“아, 맞다! 어어, 그 뒤에.”

내 설명에 손바닥을 부딪친 이서호가 말을 이었다.

“캉캉 소리를 누가 내는지 우리는 몰랐잖아. 그래서 로드 매니저님은 공범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진짜 박현철이 딱 꺾자마자 소리 났으니까. 암호일 수도 있잖아.”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와 형들의 이야기인데도 흥미진진해서 자연스럽게 이서호의 이야기에 몰입했다.

“그래서 로드 매니저님이 벽에 붙어 있다가 시간 차를 두고 살펴봤대. 근데 거기서 박현철이 사라진 거야!”

“와, 거기서 놓친 거야?”

“어. 근데 그 복도 어딘가의 사무실로 숨은 게 빼박인 게 복도 앞에 청소 중 출입 금지 표지판이 있었거든?”내가 갈 땐 없었는데. 나 가둬놓고 세워둔 건가?

“근데 박현철이 거길 왜 갔겠어? 직원들 그런데 안가잖아. 그래서 그 복도 어딘가라는 건 확신했지. 근데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겠는 거야!”

“아! 그래서 형들이 내 이름 부른 거였어?”

“엉. 진하온 네가 문 두들겨서 우리가 어딘지 알았잖아. 뒤는 너도 알지?”

“응. 기억해. 형들 고생 많이 했겠네…….”

“장난 아니었음. 넌 진짜 평생 형들한테 잘해야 한다. 앞으로 속 썩이지 말고. 으이구.”

“……알았어.”

이서호한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내가 잘못했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서호한테 한소리 들으니까 더 충격적이었다.

***

잠결에 목이 말라 눈이 떠졌다. 조심스럽게 방에서 나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몇 모금 마셨을 때 갑자기 현관문 비밀번호 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당당하게 비밀번호를 치는 사람은 당연히 매니저 형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치에 맞는데, 왜인지 바짝 긴장돼서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침입자일 수도 있잖아. 이미 사생이 한 번 들어온 적전도 있으니까.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거칠게 요동쳤다. 무기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식탁 위에 컵을 내려놓고는 현관문을 노려봤다.

다행히 현관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피로에 지친 매니저 형이었다. 반가운 얼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매니저 형.”

“흐억!”

“……왜 그렇게 놀라요.”

“새벽 2시다, 이놈아. 다 자는 줄 알았지.”

매니저 형은 넥타이를 잡아 풀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아무렇게나 벗은 슈트 재킷이 소파 등받이 위로 올라갔다.

“왜 아직 안 자고 있어?”

“자다가 목말라서 깼어요.”

매니저 형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도 물 한 잔만 줄래?”하고 물었다. 그 정도야 기꺼이. 나는 곧장 새 컵에 물을 받아 형에게 가져다줬다.

“상주한테 네 상태는 다 들었어. 어지럽거나 구역질 나는 증상은 없었고?”

“네. 없었어요.”

“그래도 내일 병원 가서 검사받아야 한다.”

“그럼요.”

나도 무서우니까 검사는 착실히 받을 거다. 다시 자러 갈까 했는데 매니저 형이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래서 우두커니 서 있었더니 형이 물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졸리면 자고 내일 해도 돼.”

“괜찮아요. 잠 좀 깼거든요.”

“그럼 이쪽으로 와.”

매니저 형이 내게 손짓했다. 형과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시간도 늦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네.”

“박현철 어떻게 하고 싶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매니저 형은 조금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두 가지 선택지에 관해 설명해줬다. 하나는 끝까지 법의 처벌을 받게 하는 것. 이 경우에는 이 사건이 외부에 유출될 위험이 있다고 했다. 내 이름이 언급되지 않더라도 ‘D그룹의 J멤버.’ 라는 식으로 스펠링 정도는 노출된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나라는 걸 추리하게 될 수도 있고.

적당히 합의하고 사건을 빠르게 종결처리하면 외부에 유출될 위험은 낮아지지만, 반대로 합의가 되었기에 박현철의 형량도 낮아진다는 거였다.

“형량 차이가 크게 날까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디아스를 생각하면 후자가 나은 거죠?”

박현철이 방송국 직원이니까 방송국과의 관계도 생각해야만 했다. 이 사건이 외부에 유출되면 범인이 방송국 직원이라는 것 또한 드러날 테니까.

“디아스 말고 너만 생각해.”

허어……. 디아스가 아닌 나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데 어떻게 디아스를 배제하고 생각하라는 거지? 그래도 매니저 형이 나를 중요하게 여겨준다는 사실이 기뻐서 나도 모르게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매니저면서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예요?”

“그럼. 매니저니까 하는 말이지. 디아스는 너희 다섯 명이 있어야 하니까. 그중에서도 너는 디아스의 중심이야. 너도 알지? 멤버들이 널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아요.”

“하온이가 가장 편해질 수 있는 선택지를 골라. 실장님과는 이야기 끝났어.”

내가 편해지는 선택지…….

나는 이 사건이 묻히길 바랐다. 내게 소중한 건 디아스와 디어리뿐이었다. 이미 멤버들을 힘들게 했는데 디어리까지 울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음. 이건 내일 멤버들 모이면 이야기해 주려고 했는데 너희 숙소 비밀번호 판 거.”

“아, 네. 그것도 박현철이에요?”

“응. 그런데 출처가 옆집이란다.”

“옆집이요?”

“어. 그 집 아들한테 박현철이 비번 알아달라고 했나 봐. 당연히 돈 받고 한 거겠지.”

“…….”

이, 이건 좀 충격적인데. 확실히 오고 가며 옆집 남자와 몇 번 인사를 주고받긴 했었다. 우리가 이사 왔을 때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이라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옆집 남자는 우리가 비밀번호 누르는 걸 지켜봤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 끼치는데…….

“그으, 렇군요. 그럼 이연휘 씨는요?”

“그분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지만 사진 속 방은 이연휘 씨 집이 맞대. 네 개인 팬이라고 하더라고. 붉은 봉투는 모르는 거고, 찢어진 사진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어.”

“피처링 부탁했을 때 형들 노려본 이유도 혹시 물어봤어요?”

내 질문에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줬다.

“물어봤지. 널 볼 생각에 너무 떨려서 박현철한테 상담했대. 그랬더니 혼자가 무서우면 같이 가자고 한 것도, 너무 떨리면 렌즈를 빼라고 알려준 것도 전부 박현철이었대.”

잘 안 보여서 찌푸린 걸 우리가 노려본 걸로 오해한 거구나. 이것도 박현철이 그린 큰 그림이었다니. 이연휘는 완전히 이용당한 셈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서운 사람이었다. 진실 속에 거짓을 숨겨 둔 거니까. 만약 우리가 조심만 더 방심했더라면, 이연휘 씨 이름을 언급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형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거고, 나는 지금쯤……. 무서운 생각을 하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리고 이거.”

매니저 형이 내게 스마트 워치를 내밀었다. 박현철이 가져갔던 거였다.

“이것도 이연휘 씨가 갖고 있더라. 박현철이 자기한테 선물이라고 줬다던데…….”

“하…….”

박현철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은 거야. 내 스마트 워치를 갖고 있었다는 건 이연휘를 미끼로 썼다는 뜻이었다. 친구한테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지?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네요.”

“맞아.”

“하지만 디어리를, 속상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이연휘 씨에게는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디어리가 더 중요했다. 디어리는 언제나 내가 행복하면 자신들도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디어리가 행복하길 바라기에 내게 생긴 일을 몰랐으면 했다.

“아직 시간 좀 있으니까 고민해 보고 결정해. 하지만 잊지 마. 하온이의 마음이 편한 길을 선택하는 거,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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