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정말 다행히도, 박현철이 내게 먹인 약은 정신과에서 쓰는 신경 안정제의 한 종류로 결론이 나왔다. 복용량이 많아서 순간적으로 몸을 제어할 수 없었던 것뿐이라 안심해도 된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내겐 내색하지 않았었는데, 마음 졸이고 있었는지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머리 CT 예약을 하니 퇴원까지는 일사천리였다. 퇴원 수속 중에 실장님에게 전화가 왔었다. 내가 무사하면 됐다는 말과 아직 진술이 끝나지 않아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에 우리는 로드 매니저의 인솔하에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집이다!”
잔뜩 신난 이서호가 신발을 내팽개치듯 벗어 던지고 뛰어 들어갔다. 층간 소음 주의하라는 유찬 형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며칠 만에 돌아온 것 같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역시 집이 최고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이 숙소였다. 몸도 마음도 편히 쉴 수 있는 제대로 된 안식처.
고단한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병원에서도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병원은 영 불편해서 제대로 쉰 것 같지 않았다.
“저 먼저 씻어도 돼요?”
“어, 하온아. 잠깐만.”
정이한이 부엌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별생각 없이 정이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갈아입을 옷을 챙기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씻는다고 하면 좀 기다리면 되니까.
“하온이 여기 있어?”
정이한이 우리 방문을 두들겼다. 왜 안 들어오고?
“네. 들어와도 되는데요?”
“아, 옷 갈아입는 줄 알았어.”
머쓱하게 웃으며 정이한이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랩이 들려 있었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시선을 강탈했다.
“물 닿았다가 상처 덧나면 어떡해. 그거 방수 붕대 아니잖아. 그렇지?”
정이한은 내 손목과 발목에 감긴 붕대를 가리키며 랩을 쭉 찢어냈다.
“이걸로 감아줄게.”
“어, 그럴 필요는 없어요. 풀려고 했으니까.”
“안돼. 진짜 덧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솔직히 말해서 붕대는 오버였다. 내가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쓸린 탓에 자국이 좀 남았을 뿐이지, 상처가 생긴 건 아니었다.
“덧날 만한 상처는 아니에요. 그냥 멍 빠지는 약 발라준 게 다인데, 샤워하고 다시 바르면 돼요.”
나는 정이한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한쪽 손목의 붕대를 풀어버렸다.
“봐요. 별거 아니죠?”
하지만 내 의도와 달리 정이한은 내 손목을 보자마자 착잡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많이 아프지…….”
조심스럽게 내 손가락을 건드리며 묻는 말에 나는 일부러 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하나도 안 아파요. 그냥 좀 쓸린 것뿐이에요.”
정이한의 고개가 아래로, 그리고 좀 더 아래로 숙여졌다. 당당하고 밝아진 정이한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의 정이한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한없이 우울해 보였다. 이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안쪽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저릿했다.
“미안…….”
작은 웅얼거림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나는 고개를 기울여 정이한의 얼굴을 올려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형이 왜 미안해요.”
“무서운 경험, 하게 해서…….”
정이한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왜 자책하는 걸까. 내가 우긴 거고, 내가 방심한 결과고, 내 오만함이 불러일으킨 일이었다.
“저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형들이 와줄 거라고 믿었거든요.”
“거짓말.”
다른 말은 잘 믿으면서 이건 또 안 믿네. 나는 정이한의 뺨에 손을 얹어 나를 보게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손길에 따라 순순히 턱을 올린 정이한의 눈가는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정말이에요. 저 믿죠?”
“하온이는 항상 믿어. 하지만, 지금은 거짓말이야. 너, 떨고 있었잖아. 나한테 안겨서 겁에 질려 덜덜 떨었잖아.”
……아, 맞다. 나 그랬었지. 이건 할 말이 없네. 나는 난처하게 웃으며 어떻게 정이한을 달래줘야 하나 고민했다.
“어음. 사실대로 말하면 그 당시에는 안 무서웠어요. 그런데 형들 보니까 안심이 돼서 그때부터 무섭더라고요.”
“…….”
정이한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또르륵 흐르는 눈물을 엄지로 스윽 쓸어 내고는 방긋 웃었다.
“그래서 이젠 괜찮아요. 이리 와봐요.”
나는 두 팔을 벌린 채 정이한을 내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키와 덩치 차이 때문에 내가 안긴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정이한을 위로할 목적으로 꼭 안아줬다.
“아까 안아준댔는데 어영부영 넘어갔잖아요. 유찬 형 다음, 이한 형. 맞죠?”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방금 기억났어요.”
“푸흐.”
정이한이 내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를 흘렸다. 나는 정이한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그에 질세라 정이한도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한 건 저예요. 항상 제 고집 때문에 형들 마음고생하는 것 같네요…….”
똑똑.
“얘들아, 뭐해?”
유찬 형이 밖에서 문을 두들겼다. 나는 마지막으로 정이한을 한 번 더 꽉 안아 준 뒤 방문을 열었다.
“어……. 이한이 울었어?”
“……조금.”
정이한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유찬 형은 그런 정이한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해주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건지 이내 내게 물었다.
“하온이 씻을 거지? 씻고 밥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배달시킬 거거든.”
“어, 저는 괜찮아요. 형들 먹고 싶은 거 시켜요.”
“안 먹는다는 건 아니지?”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내 식사 여부를 확인하는 유찬 형에게 “먹을 거예요.”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메뉴가 상관없다는 거였지 안 먹는다는 게 아니었다. 형들을 여기서 더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치킨 시킨다?”
“네, 좋아요!”
“오케이~”
유찬 형은 발랄하게 대답하며 바로 어플을 켰다. 그사이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오늘 어떻게 나를 찾았는지 궁금했는데 물어보면 안 될 것 같네.
정이한은 말 꺼내면 또 울 것 같고, 유찬 형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구는 걸 보니 언급하기 싫어할 것 같았다.
음. 대답해 줄 사람이 딱 한 명 있긴 하네. 저녁 먹고 이서호한테 슬쩍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나한테 상기시키려는 듯 손목과 발목이 따끔거렸다.
***
저녁을 다 먹어갈 때쯤이었다. 손과 입에 잔뜩 묻히고 먹는 이서호에게 물티슈를 갖다준 뒤 다시 의자에 앉았을 때 강현 형이 입을 열었다.
“하온아. 오늘 같은 일, 앞으로 또 없으리란 보장은 없어.”
“아…….”
다들 이 화제는 피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이한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유찬 형도 먹던 치킨 조각을 그대로 접시에 올려놓았다. 유일하게 씩씩하게 뜯어 먹던 이서호마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치킨을 내려놓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우리 데뷔 초에 주차장에서 마주쳤던 남자 사생 기억해?”
“……어, 네. 형이 말하니까 기억났어요.”
리얼리티 찍을 때였나? 촬영 가려고 이동하던 때였나?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았지만,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면서 덮치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김호채, 이번 박현철까지. 벌써 세 번째야.”
“……죄송해요.”
“하온이가 미안할 게 아니지. 널 탓하려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 건 그 사람들이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강현 형은 곧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네 번째도 있을 수 있다는 거야.”
“…….”
아니라곤 말 못 하겠다. 내 매력 수치가 다운그레이드 되거나 예쁜 척 스킬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또 새로운 스토커가 생길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스토커가 아니더라도 꽤 위험한 사생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이런 말을 몇 번 들었었지.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그게 정말 실제로 이뤄질 줄이야. 내가 다 잘못한 거니까 여기서 어떤 말을 듣더라도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다음에 또 같은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보호할 거야. 이번처럼 스토커 앞에 널 내미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아. 그런 무기력감과 두려움을 또 느끼고 싶진 않다.”
“네…….”
“하온아. 나는 널 나무라는 게 아니야. 지키고 싶은 거야.”
“알아요.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제 잘못이었어요. 다음엔 이런 일 없게 할게요.”
절대로 나대지 말자. 결과적으로 내가 나서면서 일을 더 크게 키운 셈이다. 앞으로는 진짜 절대로. 내 생각이 무조건 맞는 것 같아도 형들이 하지 말라면 정말 하지 않을 거다.
“그럼 됐어.”
강현 형이 날 보고 웃었다. 나도 형을 향해 미소로 화답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만약. 형들과 나를 저울에 올려 두고 한쪽만 구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를 버리는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 거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라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런 상황이 일어나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형들의 미래를 선택할 터였다.
“……나 치킨 계속 먹어도 돼?”
이서호가 우리 눈치를 살피며 접시를 톡톡 건드렸다. 유찬 형이 웃음을 터트리며 먹어도 된다고 대답하자 대번에 얼굴빛이 밝아진 이서호가 치킨을 다시 들고는 크게 한 입 뜯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내가 쓸데없는 가정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살면서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잖아. 형들과 나, 둘 중 한 명을 골라야 하는 일 말이야.
“형들도 더 먹어요.”
형들의 접시에 치킨 조각들을 더 올려줬더니 치킨 세 덩어리가 돌아와서 나는 한동안 그걸 난처하게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