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진하온!”
“하온아!”
멤버들이 목소리가 순서대로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모든 힘을 짜내 소리를 내질렀다.
“읍! 으읍! 읍!”
“씨발.”
박현철이 팔뚝으로 내 가슴을 꾹 눌렀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내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녹음기를 찾는 거야. 증거를 인멸하려고? 그럼 나는?
녹음기를 찾아 부순 뒤 나를 어떻게 할지 모른다. 형들한테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야 해! 나는 필사적으로 문에 머리를 갖다 박았다.
쿵!
“씨발, 미쳤어?”
박현철이 내 머리카락을 잡아 세웠다. 두피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고통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무식하게 문에 머리를 갖다 박은 효과는 있었다. 비품실 문고리가 철컥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쾅쾅쾅!
문 두들기는 소리는 덤이었다. 사색이 된 박현철은 그 와중에 내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즈려밟아 부서트렸다.
“더러운 루머 붙기 싫으면 내 말에 입 맞추는 게 좋을 거야. 너도 알겠지만 루머라는 건 팩트 보다 얼마나 자극적인지가 중요하거든.”
이쪽 업계에 있으면서 들은 게 많다며 박현철은 자긴 뭐든 갖다 붙일 수 있다고 내게 경고했다. 그저 우습기만 했다. 박현철이 눈치채지 못한 단추 카메라, 그 속에 든 유심만 있으면 낱낱이 밝혀질 일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쏙 숨기고 나는 겁을 먹은 것처럼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문을 열어줘. 날 형들에게 보내.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형들에게 돌아가도 백 퍼 상태 이상 터질 각이었다.
갑자기 박현철이 주먹으로 제 뺨을 날렸다. 금방 입술이 터져 피가 비쳤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이어서 제 머리와 옷을 헝클어트렸다.
또 무슨 쇼를 하려고 저러는 거야? 방송국 직원이 아니라 배우가 됐으면 대성했을 것 같은데. 형들이 문 너머에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안정을 되찾은 나는 영화를 감상하듯 한결 편한 마음으로 박현철을 지켜볼 수 있었다.
박현철은 내 옆에 엎드린 채 팔을 뻗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컥, 크윽, 여, 여러분 도와주세요…….”
와. 진짜 연기 잘하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나와 같이 이곳에 갇힌 피해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멤버들이 비품실로 들이닥쳤다. 귀신같이 무서운 얼굴을 한 강현 형은 들어오자마자 박현철부터 제압했다.
“악! 가, 강현 씨, 왜……! 으윽.”
“시끄러워! 하온아, 괜찮아?”
날 보는 강현 형의 미간에 주름이 가득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 곁으로 온 정이한이 내 상체를 받쳐 일으켜줬다. 덜덜 떨리는 따스한 손가락이 내 입가에 닿았다. 계속 날 답답하게 했던 천을 풀어주며 정이한은 나를 꽉 안아줬다.
“무서웠지…….”
“괜찮았어요.”
“일단 이것부터 풀자.”
유찬 형은 내 손목에, 이서호는 내 발목에 묶인 천을 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얼마나 꽉 묶어 놨는지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와중에 정이한이 계속 내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 이제……. 이제 무사해…….”
정이한이 잔뜩 겁먹은 채 중얼거렸다. 나한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저, 저도 피해자입니다! 연휘가, 저와 하온 씨를……!”
박현철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하온 씨! 하온 씨! 제발 말 좀 해주세요! 강현 씨가 오해, 아악!”
손목이 비틀렸는지 박현철이 비명을 질렀다.
“당신이 스토커라는 거 아니까 다물어.”
박현철이 한 차례 더 소리를 질렀다. 이러다가 누구 오는 거 아니야? 괜히 강현 형이 스태프를 폭행했다는 이야기가 돌면 어떡해. 일단 강현 형을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내 몸이 좀 이상했다. 입만 뻐끔거릴 뿐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약효가 다시 돌기 시작하는 건지 몸이 벌벌 떨렸다. 이빨이 따닥따닥 부딪혔다. 안정되었던 가슴이 나를 공격하듯 다시 한번 거세게 요동쳤다.
“일단 하온이부터 옮기자.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정이한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유찬 형과 이서호가 내 머리맡에 동그랗게 모여들었다. 그제야 나는 손과 발이 자유를 되찾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정이한을 꽉 끌어당겼다.
정이한은 품에 파고드는 나를 온몸으로 감싸듯 안아줬다. 천천히 내 등을 쓸어 주는 손길이 무척 상냥했다.
아, 나.
되게 무서웠었구나.
약효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어떻게든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공포였다. 안심되니까, 이제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이제야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떨어지면 죽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내게 안도감을 주는 품에 매달렸다.
정이한은 내가 안심할 수 있도록 계속 나를 쓰다듬어줬다. 그렇게 조금씩 두려움이 걷힐 무렵이었다.
<시스템: 상태 이상 발생!>
아, 역시. 나는 정이한의 손길을 느끼면서 또르륵 굴러가는 돌림판을 바라봤다.
<시스템: 상태 이상 ‘발열’에 걸렸습니다.>
순식간에 열이 몰렸다. 몸 안쪽에서부터 달궈진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열 때문에 몸이 예민해졌나. 손목과 발목이 욱신거렸다. 아까 문에 박은 머리도 심장이 달린 것처럼 두근거렸고. 혹시 혹이라도 났나…….
“형…….”
“응, 하온아.”
“저 열 나는 것 같아요…….”
나는 정이한의 가슴에 얼굴을 뭉개며 중얼거렸다.
“빨리 병원부터 가자!”
정이한이 나를 번쩍 안아 올리려고 했다. 나는 정이한의 팔을 밀어내며 고개 저었다. 방송국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괜히 목격담이라도 떴다간 디어리들이 걱정할 터였다.
“부축만 좀 해주세요. 조용히 가고 싶어요…….”
병원은 가야 했다. 나한테 먹인 게 어떤 약인지 모르니 검사는 받아야겠다. 나도 내 몸 소중한 건 아니까.
“정곤 형.”
험상궂은 얼굴로 입구를 지키고 있던 매니저 형이 강현 형에게 다가갔다. 매니저 형에게 박현철을 인계하듯 넘긴 뒤 강현 형은 나를 살폈다.
“다른데 아픈 곳은?”
강현 형이 내 손을 잡아 올렸다. 열기가 느껴졌는지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손목을 살살 쓸었다. 아, 열이 아니라 흔적 때문이었나. 내 손목에 남은 자국은 누가 봐도 묶여 있었다는 티가 팍팍 나고 있었다. 이거 병원 가도 되는 건가……?
“상주야, 전화해 둘 테니까 네가 책임지고 애들 데리고 병원에 가. 나는 실장님 오시면 이 자식 끌고 경찰서에 갈 테니까.”
“네, 형님.”
낯선 사람이 얼굴을 슥 들이밀었다. 누군지 몰라서 경계하는 내게 형들이 우리 로드 매니저라고 설명해줬다. 매니저 형이 오래 꼬셨다는 말에 그럼 믿을만한 사람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호야, 지금 울면 안 돼.”
유찬 형이 이서호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역효과였는지 이서호는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저 울보가 또 우네.
“서호 형, 또 울어?”
“너, 너 때문이잖아, 이 멍청아……! 빨리 가기나 해!”
거친 말과 달리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부축을 자처하고 나섰다. 정이한과 함께 양쪽에서 나를 단단하게 부축해줬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발을 움직여 한 걸음 겨우 옮겼을 때였다.
“또!”
박현철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모두 굳은 채 박현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 그렇게 억울한지 박현철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너희가 또! 내게서 빼앗아? 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헛소리.”
“하온아, 듣지 마.”
유찬 형이 내 귀를 손으로 막아버렸다. 이런다고 들리지 않을 리 없는데. 나는 유찬 형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 상황에도 웃음이 나와?”
나를 타박하는 목소리와 달리 걱정이 가득한 눈동자가 날 위로했다.
“내가 가만히 안 둘 거야!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서 퍼트릴 거라고!”
음. 아무래도 박현철이 보는 앞에서 넘기는 게 좋겠네. 현실을 깨닫게 해줘야겠어.
“잠시만요.”
나는 형들을 멈춰 세운 채 셔츠 깃을 뒤집어 진짜 단추 대신 끼워 넣은 렌즈 카메라를 떼어냈다. 앞에서 보면 그저 단추일 뿐이지만, 뒤에는 얇고 작은 사각 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이 속에 담긴 유심칩에는 박현철의 모든 것이 녹화되어 있었다.
“이게 뭔지 알아요?”
나는 박현철에게 유심칩을 보여주며 흔들었다. 머리가 나쁘진 않은지 곧바로 제게 앞으로 닥칠 상황을 깨달은 듯 박현철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매니저 형. 여기 다 녹화되어 있어요.”
“그래.”
매니저 형에게 유심칩을 넘기려고 손을 뻗자 박현철이 발악했다. 매니저 형은 가차 없는 손놀림으로 박현철을 제압한 뒤 여유롭게 내게서 유심칩을 받아 갔다.
***
방송국을 빠져나가는 건 의외로 쉬웠다. 매니저 형은 진짜 대단하다. 내가 형들에게 양쪽으로 팔이 꿰인 채 끌려가도 주위에 카메라가 있으니 아무도 우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타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는 참았던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이젠 시야가 슬슬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빨리빨리.”
유찬 형이 초조해하면서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바뀌는 걸 응시했다. 내 이마를 짚어본 정이한은 제 어깨에 날 기대게 해줬다. 나는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뜨거운 눈을 감았다.
진짜 기절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릎이 푹 꺾였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휘청이는 내 팔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하온아!”
“괜, 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아 보여.”
강현 형이 내 앞에서 등을 돌린 채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팔을 뒤로 돌린 후 내 쪽을 힐끔거렸다.
“강현이한테 업히자.”
“밴까지는 제 발로…….”
“고집부리지 말고.”
“무적의 카메라가 있잖아. 내가 호들갑 떨면서 잘 찍을게, 업히자, 진하온. 응?”
이서호가 카메라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나를 설득했다. 결국 형들의 기세에 떠밀려 나는 강현 형의 등에 몸을 맡겼다.
“……미안해요.”
“뭐가.”
강현 형은 내가 편하도록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여줬다.
“그냥,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