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멤버들의 얼굴에는 온통 구멍이 나 있고, 나는 통째로 오려져 있는 사진이 보였다. 온통 꾸깃꾸깃한 걸 봐서는 버려진 사진을 주워서 찍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사진에서 오려낸 나를 벽에 붙인 건가.
……잠시만 이거 설마 칼로 찢은 거야?
너덜너덜한 구멍은 칼로 무자비하게 그어서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였다. 나는 텅 비어 있는 형들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 떨림이 머리를 사정없이 흔들기라도 한 것처럼 어지러웠다.
이렇게까지 형들을 싫어한다고? 정말 위험한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이러다가 갑자기 테러라도 하면 어떡해? 말로 하기도 끔찍하고,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연휘 집 쓰레기통에서 가져온 걸 찍은 겁니다. 이런 게 가득 있었어요.”
……가득. 아랫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짓씹듯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진정하자.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침착하게 생각해. 형들도 무사하고, 나도 괜찮은 방법을 찾아야 해.
“자세히 봐도 될까요?”
유찬 형의 물음에 박현철 씨는 휴대폰을 유찬 형 쪽에게 밀어줬다. 스르륵 미끄러진 휴대폰이 정확하게 유찬 형 앞에 도달했다.
“……나 소름 돋아.”
이서호가 팔을 문지르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울상이 된 얼굴은 내가 괜찮은지 살피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서호를 향해 웃어줬다. 내가 불안해하는 티를 내면 안 될 테니까.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사진으로 스토커를 잡을 수 있느냐다. 피부에 뱀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쾌감을 내쫓으며 객관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끝에 도달한 결론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요.”
“……부족하다고요?”
박현철 씨는 조금 놀란 듯 당혹감을 내비쳤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 팬이라서 그랬다고 주장하면 되니까요.”
내 개인 팬이라서 내 사진 이외에는 필요 없었다고 박박 우기면, 할 말 없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팬미팅에서 내 악개가 이서호에게 한 짓 덕분에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 사람들이라면 이런 짓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단체 사진에서 멤버들 얼굴에 구멍 낸 게 솔직히 범죄는 아니니까.
“하온아, 이거 그거 아냐?”
그때 유찬 형이 내게 확대된 사진을 보여줬다. 내 사진이 가득한 방, 그 침대 옆 협탁에 새빨간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 비슷해 보이긴 하네요.”
“맞는 것 같은데.”
우리끼리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더니 박현철 씨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뭔가를 발견했나요?”
나는 미리 입을 맞춰둔 대로 박현철 씨에게 설명했다.
“현철 씨한테 이야기 듣고, 매니저 형이 저한테 온 팬레터를 재검수 해봤거든요. 그중에 스토커가 보낸 듯한 팬레터가 있었어요. 그 팬레터 봉투로 보이는 게 이 사진에 찍혀 있어서요.”
이연휘가 스토커인 것 같다고 말해준 건 본인이면서도 박현철 씨는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심 본인의 오해이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만큼 이연휘가 박현철 씨한테는 소중한 친구라는 의미겠지.
“그, 잠시만요. 제가 연휘네 집에 간 게 분명…….”
박현철 씨는 기억을 더듬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그, 예전에 피처링 도와달라고 부르신 날. 그날 둘이 술을 마셨거든요. 둘 다 만취해서 연휘네 집으로 갔었어요. 연휘는 필름 끊겼어도 전 기억하는 타입이라 확실해요. 새벽 3시? 4시쯤 잠결에 화장실을 잘못 찾아서 저 방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은 거니까 그때 당시에도 있었던 건 분명해요.”
잠시 뜸을 들이던 박현철 씨는 “정말 저기 찍힌 게 하온 씨가 받은 팬레터 봉투가 맞나요?”하고 물었다.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아니라는 대답을 받고 싶은 것 같았다.
“확대하는 바람에 해상도가 낮아져서 정확하진 않지만, 색은 비슷해 보여요. 하지만…….”
역시 이것도 결정적인 증거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런 편지 봉투는 어디서나 살 수 있고, 우연히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할 말 없는 건 우리 쪽이니깐.
“심증뿐이라 이거론 안될 것 같은데.”
매니저 형이 침음을 내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당분간은 현상 유지라는 소리네요.”
정이한이 중얼거리며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정이한은 무언가를 각오한 듯 눈매에 힘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정이한의 손등에 내 손을 얹으며 웃었다.
내가 지켜줄 거니까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내 멤버들은 내가 지킬 거니까. 스토커가 머리카락 하나도 헤치지 못하게 할 거야.
“그럼 증거가 더 필요한 거죠?”
박현철 씨는 팔짱을 낀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다가 마음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꽤 기대했는데. 결국 박현철 씨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물증을 만들려면 내가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닐까? 증거 없이는 매니저 형 말마따나 심증뿐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괜히 떠보듯 건드렸다가 악의적인 글이 유포될 수 있는 위험도 있을 테고. 아이돌은 이미지가 중요한 만큼, 이럴 때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건 단점이었다.
이번에는 얌전히 있으려고 했는데 답이 없네. 그렇다고 그쪽이 행동을 시작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는 건 불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어차피 스토커가 움직여야 우리가 대응할 수 있다면, 차라리 잘 짜인 판으로 스토커를 끌어들이는 게 유리하잖아. 나는 결국 내가 움직이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채 운을 띄웠다. 지금부터 전쟁인가.
“증거를 확보하려면 제가 움직이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여요.”
“하온아! 그건 안 된다고 했지!”
제일 먼저 예민하게 반응한 건 유찬 형이었다. 기겁하며 토해낸 어투는 신경질적으로 들릴 만큼 날카로웠다. 나는 애써 유찬 형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고 박현철 씨를 꼿꼿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박현철 씨 도와주실 수 있어요?”
잠시 우리들의 눈치를 살피던 박현철 씨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뭘 도우면 되죠?”
“하온아.”
이번에는 정이한이 날 불렀다. 나는 여전히 박현철 씨만 보고 있었다. 박현철 씨 또한 또렷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번에 제가 가면가왕에 출연하거든요. 그 내용을 이연휘 씨에게 흘려주세요. 일부러 틈을 좀 만들어 볼 테니까 그때 이연휘 씨를 제게 보내주시겠어요?”
“그건 안 돼.”
잠자코 듣고 있던 매니저 형이 서슬이 퍼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오늘 멤버들이 함께 온 게 다행이었다. 이 자리에서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그 후로 두 번 설명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형들을 설득하기 위한 초석을 깔기 위해 일부러 강한 워딩을 사용했다.
“그럼 저는 언제까지 스토킹 당해야 하는데요?”
내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들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자신들은 괜찮다고 말리겠지. 하지만 나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도와줄 거야. 형들의 마음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또…….
고개 숙인 형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말했으니까.
나는 쓰디쓴 침을 억지로 삼켰다. 사약이라도 먹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제가 이연휘 씨가 자백할 수 있도록 떠볼게요. 대화는 녹음할 거고,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GPS 추적할 수 있도록 하면 되잖아요. 방송국 나가는 출구야 뻔하니 사람을 배치해서 지키면 되고요. 호신용 스프레이나 전기 충격기 같은 걸 소지해도 좋겠네요.”
나도 아무 방비 없이 맨몸으로 스토커를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스토커의 목적은 나를 납치, 감금하는 거다. 그렇다면 끌려가는 것만 조심하면 되잖아. 오히려 내가 제일 안전한 거 아닐까? 스토커가 헤치고 싶어 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이연휘 씨는 저를 헤칠 생각 없어요. 이연휘 씨와 둘만 남는다고 위험할 일은 절대 없다는 소리예요.”
나는 멤버들을 슥 훑어본 뒤 마지막으로 매니저 형을 바라봤다.
“매니저 형. 소속사에서 대응하려면 확실한 물증이 필요한 거 맞죠?”
“……그래.”
“박현철 씨가 보여준 증거는 심증뿐이라 안 된다고 형이 말했고요.”
이번에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제가 움직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 있어요?”
“그걸 같이 고민해 보자, 응?”
유찬 형의 목소리는 쥐어 짜내는 것처럼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언제까지요? 스토커가 행동하기 전까지요? 얌전히 기다리다가 당하긴 싫어요.”
“절대 그럴 일 없어. 너는 우리가 지킬 거니까.”
정이한이 내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문득 예전의 정이한이 떠올랐다. 나와 눈도 잘 못 마주치고, 바닥만 보면서 걷던 우울해 보였던 모습이. 하지만 이제는 그때의 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직시하는 정이한에게서 강한 의지가 보였다.
“알아요. 그러니까 저도 형들 믿고, 해보겠다는 거예요. 딱 한 번. 딱 한 번만 시도해 보고 걸려들지 않으면 얌전히 보호받을게요.”
“하온이 생각은 알겠어. 이건 우리끼리 이야기를 좀 더 해볼게. 실장님께도 보고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이후에 다시 결론을 내려보자.”
매니저 형이 나를 달래듯 말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방식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따를 생각이었다.
“좋은 방법이 있다면 따를게요.”
그래도 이왕이면 가면가왕 촬영하기 전에 결론이 났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면 다음 컴백 때까지 계속 걱정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