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43화 (243/320)

243.

내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 사이의 거리는 계속 좁혀졌고, 강현 형과 코가 스칠 듯 가까워진 순간 나는 턱을 바짝 당긴 채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밀어내야 하나? 하지만 그랬다가 상처 주면 어떡하지? 머릿속이 혼란해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내 머리 위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동자를 위로 굴려보니 강현 형이 고개를 돌린 채 웃고 있었다.

“……형?”

“그렇게 얌전히 있다가 진짜로 키스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강현 형이 내 머리를 슥슥 헝클어트렸다. 바짝 긴장한 것과 달리 허무한 결과였다. 안도한 나머지 형에게 투정 부리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놀랐잖아요! 형답지 않게 왜 이런 장난을 쳐요?”

가을바람이 강현 형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형은 눈가를 가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를 보고 눈웃음 지었다. 이 사람이 또 미인계를 쓰네…….

“내가 장난이랬던가?”

“그럼 아니에요?”

강현 형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갑자기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 정곤 형. 저희 지금 옥상이에요.”

강현 형이 눈짓으로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아, 매니저 형 타이밍 안 좋네. 장난이 아니었으면 뭐였다는 거야? 진짜 나한테 키, 키스하려고 했던 거야? 그럼 그만둔 이유는 뭔데?

머릿속에 물음표가 여러 개 떠다녔지만 그렇다고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답을 들으면 강현 형을 보기 불편해질 것만 같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모른 척, 장난으로 넘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또 나만 편한,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형이 휴대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는 걸 보며 강현 형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리고는 옆에 나란히 서서 힐끔, 강현 형의 얼굴을 훔쳐봤다. 옥상 정원의 낮은 조도 아래에서 본 형의 얼굴에는 불그스름한 기가 떠올라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나는 입을 꽉 다물고 말았다.

진심이었구나…….

감정의 일방통행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지금이 제일 좋아? 그래서 선택할 수 없어? 그러면 형들은? 형들의 마음은?

겹쳐 입은 강현 형의 저지가 유달리 무겁게 내 어깨를 꾹 짓누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 해. 그런데 어떻게……?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는데 어떻게 선택해야 한다는 건데?

문득 이대로 질질 끌며 시간만 보내느니 차라리 모두를 거절하고, 놓아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뒤에 형들과의 사이가 지금과 달라진다면, 그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진짜 너무 어렵다. 그래도 나는 나 혼자 편해지는 것과 형들을 놓아주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후자를 선택하고 싶었다.

만약 형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다시 외로워진다 해도…… 그런 건 내게 익숙하잖아.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야.

“……강현 형.”

“응?”

결정했으면 말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마음 접어주세요. 저는 형이랑 연애할 생각 없어요. 그 말이면 되는데, 지금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내가 스스로의 목을 틀어쥐고 더 이상 목소리를 내는 걸 방해했다.

강현 형은 무언가를 직감한 듯 표정을 굳힌 채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런 형을 마주 보며 각오를 다졌다.

방해하지 마. 형들을 좋아하니까 형들을 위한 선택을 하는 거라고. 형들을 놓아주자. 그러니까 지금 바로 말해야 해. 나는 여러 번 나를 달랜 뒤에야 가까스로 쥐어짜 내듯 첫 음을 내뱉었다.

“……형, 절 향한 마음, 그거 접어주세요.”

“결정한 거야?”

“아마도요.”

“이한 형?”

여기서 정이한이 왜 나와?

“아니요? 그건 아니고.”

처음 운을 떼는 게 어려웠지 막상 말을 하고 나니 술술 나왔다. 나는 내 마음을 솔직하게 강현 형에게 털어놓았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하지만 그건 저만 좋은 거잖아요. 형들이 슬퍼하는 게 싫어요. 그래서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오래 기다리게 해놓고 이런 결정 해서 미안해요. 절 미워해도 괜찮아요…….”

가만히 서서 내 말을 들어준 강현 형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에요? 저 지금 형 거절했는데…….”

강현 형은 설핏 웃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온이가 솔로니까.”

“네에?”

“짝사랑의 권한은 나한테 있는 거야. 하온이는 나한테 좋아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널 마음대로 좋아한 건 나잖아. 그러니까 지금이 좋다면 이대로 지내도 돼. 네가 원하는 걸 해. 너만 행복하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어.”

“…….”

정이한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형들의 마음이 아득할 정도로 깊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를 위한 거라면…….”

강현 형이 내 뺨에 손을 얹었다. 엄지로 내 뺨을 쓸어내는 손길은 너무 포근하고 따스했다.

“널 계속 좋아할 수 있게 해줘.”

간절해 보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강현 형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 뺨에서 손을 떼었다.

“강현아! 하온아!”

갑자기 옥상 문이 벌컥 열리면서 매니저 형이 뛰쳐 들어왔다. 형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온다던 애들이 왜 아직도 여기 이러고 있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으아, 매니저 형 얼굴 무서워……!

“죄송해요. 하온이랑 이야기하다 보니…….”

“어후, 진짜. 잘 있으니 됐다.”

***

“하온아, 눈 좀 붙일래?”

나는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채웠다. 그렇게 피곤해 보이나? 어제 강현 형과의 대화를 곱씹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긴 했다. 형들을 위한 선택. 내가 생각한 것과 형들이 바라는 게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이대로 계속 있을 순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게, 내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나도 알 수 없어서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하다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덕분에 체력이 절반도 채 차지 않아 몸이 좀 노곤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뒤에 타서 편하게 자.”

“형도 피곤하잖아요. 다크서클 때문에 뺨까지 시커메요, 지금.”

“어쭈? 그래서 졸음운전 하나 감시하려고?”

“그렇죠?”

“네네. 안전 운전 하겠습니다요.”

매니저 형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떠드니 마음이 좀 평화로워지는 것 같았다. 형이 네비게이션에 약속 장소의 주소를 입력하던 때였다. 갑자기 뒷좌석 문이 벌컥 열리면서 멤버들이 우루루 올라탔다. 순순히 배웅해주길래 다들 납득한 줄 알았는데, 이런 계획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어? 뭐야? 진하온 조수석이네?”

“형, 저희 왔어요.”

매니저 형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형은 뒤를 돌아보며 “너희가 왜 왔어!”하고 큰소리를 냈다. 벌써 자리를 잡고 앉은 멤버들은 딸깍, 소리를 내며 안전벨트를 채우고는 두 손으로 벨트를 꽉 붙잡았다.

“걱정되면 저희는 차 안에 있을게요. 하지만 데리고는 가 주세요. 우리끼리 숙소에 있으려니 너무 불안해서…….”

유찬 형이 짝 소리 내며 두 손뼉을 마주친 뒤 굽신거렸다.

“스토커도 아니고 제보자 만나러 가는 건데 뭐가 그렇게 불안하냐?”

내 말이. 매니저 형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온이가 안 보이면 불안해요. 정곤 형, 부탁드릴게요…….”

대답은 정이한에게서 들려왔다. 초롱초롱하게 쏘아지는 눈빛 공격이 매니저 형을 향했다. 형은 멤버들을 한 명씩 눈에 담는 듯 보다가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 때문에 못 산다, 진짜. 그래, 같이 가자. 가.”

멤버들이 매니저 형을 찬양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좋아할 일인가. 네비게이션에 주소 입력을 끝낸 매니저 형이 차를 출발시켰다.

“좋아하지 마라. 떼어 놓고 가면 너희들끼리 택시라도 탈까 봐 데려가는 거니까.”

“헐! 형 어떻게 알았어요?”

이서호가 즉각 반응했다. 기겁한 유찬 형이 다급히 이서호의 입을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매니저 형의 눈꼬리가 매서워졌다.

“진짜 택시 타려고 했어?”

“아, 아니. 진짜는 아니고요. 그냥 이야기만…….”

쭈글쭈글해진 이서호가 잔뜩 매니저 형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매니저 형의 깊은 시름이 담긴 한숨이 연거푸 들려왔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멤버 전원이 박현철 씨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

예약한 식당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이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도 박현철 씨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고, 음식을 주문한 뒤 매니저 형이 바로 용건을 꺼내들었다.

“하온이한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 네. 그럼 혹시 제가 부탁한 것도 전해 들으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매니저 형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박현철 씨를 보며 말했다.

“이연휘 씨가 스토커로 밝혀지는 경우, 조용히 사건을 끝내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박현철 씨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우리를 봤다.

“그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아티스트 보호가 최우선입니다. 만약 이연휘 씨가 스토커로 확실시된다면 1차로는 사무실 측의 경고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또다시 문제가 생긴다면, 그때는 확보한 증거를 모두 모아 경찰서에 제출할 생각입니다.”

박현철 씨는 시선을 내리깐 채 차가운 물이 든 잔을 매만졌다. 잠시 침묵하던 박현철 씨는 목을 한 번 축인 뒤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기회는 한 번이라는 것. 이해했습니다. 이후 그 녀석을 설득하는 건 제 몫이네요. 저도 친구를 잃긴 싫거든요.”

“가지고 있는 증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박현철 씨는 우리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온통 내 얼굴로 도배 된 방이 찍혀 있었다. 싱글로 보이는 작은 침대도 하나. 하지만 방에 붙어 있는 사진은 전부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뿐이었다. 도촬로 보이는 건 없어서 이것만으로 그를 스토커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연휘의 집에 이런 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이 액정 위를 긁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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