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박현철 씨와 통화를 끝낸 직후, 강현 형이 나를 불렀다.
“커버 댄스 해보고 싶다고 한 거 기억해?”
“아! 물론이죠.”
강현 형은 내게 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멤버들도 궁금해하는 바람에 우리는 휴대폰 하나에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1분 정도 되는 짧은 영상을 다같이 봤다. 멤버들과 나는 연신 감탄하며 영상 속 남녀의 페어 댄스를 홀린 듯 바라봤다.
“어때?”
……이걸 나랑 하자고? 일단 나는 강현 형을 절대 못 들 테니까, 내가 들리는 사람이 되는 건가?
“정열적인데 우아한 느낌이 꼭 탱고……같아요.”
“맞아. 그걸 베이스로 만든 거래.”
강현 형은 이 안무를 고안한 사람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안무가라며 조금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나는 좀 자신 없었다.
정면을 보고 서 있는 남자와 손을 잡고 사선으로 누운 채, 서로의 발을 얽다가 남자를 기준으로 한 바퀴 도는 동작은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거기에 남자의 뒤에서 다리 사이로 슬라이딩하며 통과해 점프하는 동작도 있었다. 내가 점프하자마자 강현 형이 내 허리를 잡고 들어 올리면, 나는 다리를 뒤로 접어 형의 허리에 걸고 고정.
이 느낌을 제대로 살리려면 몸의 선을 제대로 활용해야 하는데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고민하는 걸 눈치챘는지 강현 형은 멋쩍은 듯 헛기침하며 말했다.
“이 정도로 다리 찢을 수 있는 사람이 하온이밖에 없어서 그래.”
그건 그렇긴 해. 이 춤은 유연성이 생명인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 멤버들 중 제일 유연한 건 나였다. 그리고 이런 격한 댄스를 하려면 멤버 중 제일 가벼운 내가 하는 게 강현 형한테도 부담이 덜할 테고. 그렇다고 걸그룹이랑 이런 페어 댄스를 춰서 올릴 순 없으니 소거법으로 따져봐도 형과 함께 저 커버 댄스를 할 만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꼭 해보고 싶은데. 안 될까?”
소원권을 쓴 거니까 더 당당해도 될 텐데 형은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언제나 대형 육식 동물 같은 강현 형이 오늘은 꼭 토끼처럼 작은 소동물처럼 느껴졌다. 그게 귀여워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해볼게요.”
그 순간 강현 형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겠다고 대답하길 잘했네. 형이 기뻐하는 걸 보니까 나도 기쁘다. 뭐 어떻게든 차근차근하면 되지 않겠어? 모르는 건 강현 형이 알려주겠지.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유찬 형이 걱정되는지 슬쩍 말을 얹었다.
“이거 위험하지 않아? 너한테 매달리는 게 많아 보이는데.”
“처음에는 바닥에 매트리스 깔고 연습할 거야. 넘어져도 아프지 않게.”
그래, 좀 푹신하면 떨어져도 괜찮겠지. 무엇보다 강현 형이 날 팽개칠 리가 없다. 같이 넘어지면 넘어졌지. 나는 공중에 번쩍 들린 채로 둘이 같이 넘어지는 걸 상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언제부터 연습할까요?”
“일단 정곤 형한테 매트리스 구해달라고 말하고 준비되면 바로.”
“전 아무 때나 좋아요.”
강현 형은 곧바로 정곤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보다 톤이 한 단계 올라가 있어서 잔뜩 흥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뭐래요?”
통화를 끊은 형에게 물었더니 강현 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숙소에서 기다리는데?”
“응? 저희 숙소에 있는 거랑 매트리스가 무슨 상관이에요?”
“……그러게.”
우리는 모두 알쏭달쏭한 마음으로 매니저 형이 돌아오는 것만 손꼽아 기다렸다.
***
아침 일찍 나갔던 매니저 형이 숙소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궁금했던 참이라 우리는 평소보다 열렬하게 매니저 형을 환영했고, 형은 조금 얼떨떨한 듯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너희 뭐 사고라도 쳤어?”
“네? 아니요!”
“그럼 왜 이렇게 반겨주는 건데?”
매니저 형은 뒤꿈치로 구두를 벗어내며 우리를 관찰하듯 살폈다.
“형이 아까 궁금하게 했잖아요!”
이서호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한쪽 발만 들인 채 잠시 굳어 있던 매니저 형은 이내 “아하!”하는 소리를 내더니 파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이 귀여운 녀석들.”
형은 우리를 거실로 몰며 운을 뗐다.“전달 사항이 있어서 기다리라고 했지.”
어? 설마 스토커 잡힌 건가? 기대감을 품은 채 매니저 형의 뒷말을 기다렸는데 형이 내민 건 패드였다.
“너희 새 숙소 계약했다.”
“헐!”
“와!”
“……이사.”
멤버들이 전부 기뻐하는 와중에 정이한 혼자만 탐탁지 않은 듯했다. 그러다 나를 한 번 보고는 “안전한 게 더 중요하니까…….”하고 스스로를 달래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사하면 나랑 방 같이 못 쓸까 봐 저런 거야, 지금?
“근데 되게 빠르네요?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계약만 빨리 됐어. 이사 날짜는 내년이나 되어야 할 것 같다.”
“엥? 왜 그렇게 오래 걸려요?”
매니저 형은 패드를 향해 턱짓했다.
“앨범 봐봐. 너희 이사 갈 숙소 사진 찍어왔으니까.”
유찬 형이 곧장 패드를 조작했다. 사진 속의 숙소를 보고 우리는 입을 떡 벌렸다.
“헐! 여기, 여기! 테오스 형들 사는 데 아니에요?”
이서호가 손가락질하며 눈의 크기를 키웠다.
“같은 단지는 맞는데, 테오스는 아니야. 지금 쓰고 있는 그룹이 올해 말까지 숙소 쓰고, 내년엔 독립한다고 하더라고. 이것도 아는 사람 통해서 매물 내놓기 전에 인터셉트한 거야.”
헐. 우리 매니저 형 진짜 능력 좋네. 여기라면 진짜 안심이지. 언젠가 이서호가 꼭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하면서 사진을 보여줬던 기억이 났다.
우리의 새 숙소는 아이돌이나 배우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고급 빌라 단지였다. 그만큼 보안도 완벽했고, 매물이 잘 나오지도 않는다고 들었다. 가격이 어마어마할 텐데…….
“이렇게 비싼 데서 저희가 살아도 돼요?”
“당연하지. 그만큼 회사에서 너희에게 갖는 기대가 크다는 거야. 나는 이 매물이랑 후보 몇 개를 더 추려서 가져갔거든. 사실 너무 고가라 안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만큼 안전하고, 방송국 다니기 좋은 곳도 없어서 일단 올려봤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라 우리는 매니저 형에게 집중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매니저 형의 입꼬리가 뿌듯하게 말려 올라갔다.
“대표님 픽으로 정해졌다.”
“우와아!”
“대표님 감사합니다!”
“회사가 어느 쪽이지? 대표님한테 절해야 해!”
이서호는 방향치라 어딘지 모르겠다며 사방으로 굽신거렸다.
“그럼 방 몇 개예요?”
“2층까지 합쳐서 5개.”
“우와아…….”
전원 독방이네. 나도 모르게 정이한을 힐끔거렸다. 때마침 정이한도 날 보고 있었던 듯 눈이 딱 마주쳤다. 정이한이 먼저 웃음 짓자 반사적으로 나도 웃어 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 용건. 이번 비시즌 스케줄 잡으려고. 너희 인기가 올라서 섭외 건이 꽤 많이 들어왔거든. 제일 먼저 서호.”
“넵!”
“드라마 들어왔어. 해볼래?”
“드, 드라마요?”
“응. 청소년 성장 드라마라 이미지에도 좋을 거야. 동명 웹툰 원작인데 꽤 인기가 있었나 보더라고.”
매니저 형은 가방에서 대본을 하나 꺼내 이서호에게 건넸다.
“읽어보고 생각 있으면 말해.”
“어, 네, 넵! 언제까지요?”
“이번 주말까지.”
매니저 형은 이어서 멤버들의 스케줄을 줄줄이 읊어줬다. 뭔가 이것저것 엄청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이걸 다 해요?”
표를 들여다보는 유찬 형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중에 골라야지. 이거 다 하면 너희 쓰러진다.”
매니저 형은 잠시 우리가 쓰러지는 생각을 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고는, 스케줄을 몇 개 추천해줬다. 한동안의 상의 끝에 멤버들의 스케줄이 하나씩 결정되고 있었다.
“하온이는 하고 싶은 거 있어?”
“저는…… 이거요.”
나는 가면가왕을 가리켰다. 실력파 아이돌 그룹 메인 보컬이라면 한 번쯤 거쳐 간다는 프로그램. 욕심나는 건 이거 하나뿐이었다. 내가 잘하면 그만큼 홍보가 확실히 될 테니까. NBC라는 건 좀 마음에 걸리지만, 스토커 무서워서 내 활동 못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럼 하온이는 가면가왕이랑…… 개인적으로 나는 립스틱 광고도 같이했으면 좋겠는데.”
매니저 형이 추천한 건 화장품 명품 브랜드의 립스틱 광고 모델이었다.
“광고 콘티 봤는데 괜찮을 것 같더라고. 무엇보다 하온이만큼 이 광고에 어울리는 사람이 없어.”
“어, 이거 진짜 하온이랑 어울리겠는데? 예쁠 것 같다.”
콘티를 보던 유찬 형이 해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광고의 메인 카피는 ‘아름다움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라는 거였다. 콘티 내용은 긴 생머리의 여성이 서 있다가, 점차 머리가 짧아지고. 마지막으로는 같은 립스틱을 바른 남자로 바뀌는 거였다. 긴 머리의 여성과 짧은 머리의 남성,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어야 했고.
이미 여장 한 번 했으니 두 번은 어렵지 않지. 매니저 형이 추천하는 거라서 나는 그냥 빠르게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알았어요. 해볼게요. 그리고 매니저 형.”
“응?”
“저희 이번 주말에 박현철 씨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때 가드분들 어떻게 해야 할지…….”
“아, 그건 내가 같이 가면 될 것 같다. 대신 멤버 전원은 말고 하온이랑 나. 둘만 가는 게 좋겠어.”
“네에? 왜요! 저도 갈래요!”
이서호가 매니저 형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안돼. 하온이는 내가 딱 붙어서 지킬 테니까 나한테 맡겨두고, 너희는 얌전히 숙소에 있어. 괜히 걱정되게 쫓아올 생각 말고. 알았어?”
“……걱정되는데. 같이 가고 싶어요.”
정이한이 슬그머니 손을 들며 말했다.
“사람이 늘어나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야. 나한테는 너희도 지켜야 할 아티스트니까. 형 믿고 맡겨줘.”
“……네.”
정이한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