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38화 (238/320)

238.

내가 말하고도 놀란 나머지 숨을 들이켰다. 정이한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심술궂은 말을 해 버렸다. 나는 미안함과 당혹감에 수습할 생각도 못 하고 굳어 있었다.

날 보는 정이한의 눈빛에 섭섭해하는 기색이 읽혔다. 그걸 보니 표백제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에이, 나도 열심히 했는데. 칭찬해주라~”

정이한이 장난기가 듬뿍 묻어나는 어조로 칭얼거렸다. 그게 굳어 있던 나를 풀어주는 신호라도 된 듯, 나는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혀를 굴릴 수 있었다.

“당연히 형도 잘했죠…….”

사과, 해야 하는데. 장난으로 넘기려는 지금 분위기에서는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웃고 있었지만, 미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진짜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변명할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자.”

강현 형이 정이한의 머리에 수건을 덮어씌웠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짚으며 나를 지나친 뒤 유찬 형을 불렀다. 형들이 먼저 앞장서고 우리 눈치를 보던 이서호가 두 형들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정이한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낸 뒤 날 향해 미소 지었다.

“우리도 갈까?”

“……네.”

나는 면목이 없어 나란히 걷지도 못하고, 반걸음 정도 뒤처진 상태로 정이한을 따라갔다. 정이한은 앞서 걸어가는 와중에도 계속 내 쪽을 힐끔거렸다. 잘 따라오는지 보는 건가. 내가 서운하게 했는데도, 여전히 날 세심하게 살피는 정이한을 보니 가슴 안쪽이 지끈거렸다.

더는 못 참겠어.

“……이한 형.”

정이한은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세웠다.

“응. 하온아.”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 찰나에 드러냈던 서운함은 말끔히 숨겼는지 지금 형의 목소리에선 찾아볼 수도 없었다.

“미안해요…….”

“그게 신경 쓰여서 어색하게 굴었어?”

“형 멋있었다고. 잘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저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정이한은 천장 쪽을 향해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게 고정했다.

“음. 그럼 진심은 아니었어?”

“네. 아니에요. 심술……같아요.”

“심술?”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이한의 눈치를 봤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갸웃거리는 정이한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전했다.

“형들 경기하는 내내 계속, 뒤에서 걸그룹 멤버들이 형들 멋있다고 했어요. 고백……하고 싶다고.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는데. 형들 데리러 왔더니 이한 형이…….”

나는 진지하게 말하는데 정이한이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고 정이한을 노려봤다. 내가 성이 난 걸 알아차린 정이한은 숨을 헙, 들이킨 뒤 살살 눈웃음치며 나를 달랬다.

“미안, 미안. 웃으려던 건 아닌데, 푸흐, 미안. 흠흠. 그럼 혹시 여기 왔는데 내가 선배님이랑 대화하고 있어서 기분 나빴던 거야?”

“……기분이 나쁜 건가. 그냥, 좀 그랬어요.”

“나는 기분 나빴는데.”

“네? 제가 그런 적 있어요?”

정이한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걸음을 옮겼다. 엉거주춤 따라가다가 보폭을 맞췄더니 정이한이 내게 기대듯 상체를 기울였다. 한껏 볼륨을 낮춘 목소리에 귀를 쫑긋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하온이한테 관심 보일 때마다 그랬어. 아까 준 선배님도 그랬고. 훨씬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세화 형 때도 그랬지. 내가 널 좋아하니까 질투한 거야.”

질투……? 정이한이랑 나랑 같은 건 아니지 않나? 형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멤버로서. 그리고 형으로서 좋아하는 거였다. 아. 그런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뺏기기 싫었던 건가? 처음으로 먹어본 달콤한 사탕을 뺏기기 싫어하는 어린애와 같은 마음인 건가.

내게 멤버들은 사탕 같은 사람들이다. 다정함, 아늑함, 애정, 따스함 같은 예쁜 감정들은 전부 멤버들이 처음 느끼게 해준 거니까. 다른 사람에게 뺏기기 싫은 게 당연하지. 그저 내겐 이런 적이 처음이라 몰랐던 것뿐이었다. 아, 속이 다 시원하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저 이제 알았어요.”

“뭔데?”

어쩐지 나를 채근하는 정이한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하기 부끄러워진 나는 일부러 알쏭달쏭하게 말했다.

“형들이 제 사탕이라는 거요.”

“응? 무슨 소리야?”

마음이 개운해진 나는 정이한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속도를 올렸다.

“빨리 가요!”

“어? 잠깐. 뭔가 내 예상과 다른데? 사탕은 뭔데? 어? 하온아? 하온아! 같이 가!”

서둘러 형들을 향해 뛰어가는 나의 뒤를 정이한이 쫓아왔다.

***

[제목] 디아스 역조공 레전드다 ㄹㅇ (댓글 999+)

!!!사진스압 주의!!!

아침: 한식 도시락, 아메리카노, 티백(페퍼민트, 자스민), 사과, 방석, 무릎 담요.

점심: 토마호크 스테이크 정식, 메론, 케이크와, 음료(탄산과 커피)

저녁: 치킨, 강정, 밥과 국, 쿠키, 음료(탄산과 커피)

─ 스테이크 크키 뭔일;;; 얼굴보다 크네 ㄹㅇ;;

┗ 님 얼굴 작네요

┗ ? 스테이크가 큰 건데요

─ 무릎 담요랑 방석 삽니다ㅠㅠㅠㅠㅠㅠ

─ 애들 진짜 센스있는겤ㅋㅋㅋ 방석에는 애들 싸인만 있고, 담요에는 얼굴 프린트된거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방석에 애들 얼굴 프린트했으면...ㅎㅎㅎ

┗ ㅋㅋㅋㅋㅋ 아무도 못 앉앜ㅋㅋㅋㅋㅋㅋ 감히 어떻게..!!

┗ 난 싸인도 소중해서... 엉덩이가 뿌셔질 것 같아도 방석 품에 안고 있었음ㅋㅋㅋ 나 같은 사람 많았닼ㅋㅋㅋ

─ 이게 찐 1인분 같은 2인분이넼ㅋㅋㅋㅋㅋㅋ

─ 지나가던 타 팬인데... 진짜 부럽다ㅠㅠ 우리 애들 역조공도 좋았는데 여기는 걍 넘사네

┗ 근데 스테이크... 시간 지나면 식어서 별로지 않나

┗ 윗댓) 따뜻했어! 고기 진짜 맛있었다ㅠㅠ 육즙도 살아있고 입에서 살살 녹았음ㅠㅠㅠㅠ

┗ 윗댓 얘기만 봐도 애기들이 얼마나 신경 써서 준비했는지 알 거 같아..ㅠㅠ 개감동이다 진짜

[제목] 우리 애들 못 하는 게 모야? (댓글 999+)

본업. 얼굴. 성격. 운동까지...

결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너란 남자

내가 조오오오오오오오오온나게 사랑한다!!

(500미터 계주 1위_얼싸안고 방방 뛰는 내 남자들.gif)

─ 혹시 직관 다녀오셨어요? 강현이 씨름하다 부상 입은거 사실인가요? 혹시 심각한 건 아니죠?ㅠㅠㅠㅠ 별일 아니었죠?ㅠㅠㅠㅠㅠ(기도)

┗ 좀 웅성웅성 하긴 했는데 별일 아니었던 거 같아요 강현이 그 뒤에 종목들도 전부 참가하고 날아다녔어요!

┗ 허미.. 다행이다ㅠㅠㅠㅠ 저 진짜 가슴 벌렁거려서 심장 멎을뻐뉴ㅠㅠㅠ 감사합니다ㅠㅠㅠㅠ

┗ 안녕하세요! 지나가던 뿔리입니다! 오늘 다현이 크게 다칠 뻔했는데 디아스의 백강현님이 구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이 보답은 다음 앨범 스밍으로 할게요ㅠㅠㅠ

─ 우리 하냥이 100미터 선빵했다!!! (100미터 1위 서호, 2위 준, 3위 하온 시상대.jpg)

┗ 와 우리 와기강강쥬 달리기도 잘했어요? 우쭈쭈

─ 내 기준 아추대 베스트는 양궁 풀샷임

(눈 깜박거리다가 사르륵 웃는 하온이 햇살 미소_녹아내림 주의.gif)

┗ 하온이 풀샷 잡힌순간 거짓말 1도 안 보태고 체육관 조용해짐ㅠㅠㅋㅋ

┗ 나도 심멎할 뻔; 무슨 매일매일이 리즈야.. 근데도 카메라가 하냥이 찐 미모를 못 담아내.. 어쩔 거야 진짜 내 심장 남아나질 않아ㅠㅠㅠ 미처벌임ㅠㅠ

┗ 아.. 이 움짤 안 본 눈 삽니다.. 일상생활x

┗ 윗댓) 움짤 보기 전으로 돌아간다 vs 일상생활 포기한다

┗ ㅎ 밸붕이네요 일상x

─ 우리 갓기들 진짜 활약 엄청해서 본방도 기대됨(뺨 붉힌 채 웃는 이모티콘)

┗ 사진 좀 풀어주세요ㅠㅠㅠㅠㅠ 본방 어케기다류ㅠㅠㅠ

프리랜서촤 @free_home

아추대 떡밥 진짜 보면 볼수록 찐임

(이한이 가슴에 기댄 채 고롱거리는 하냥.mov)

(강현이 허벅지 베고 누운 하냥.jpg)

(유찬이랑 손 꼭 잡고 있는 하냥.jpg)

(서호 등에 기댄 채 눈 감고 있는 하냥.jpg)

∞ 2,319 ♡ 5,121

***

아추대에서 너무 열심히 달린 탓인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에도 숙소는 고요하기만 했다. 춤출 때와 운동할 때 쓰는 근육의 종류가 다른가 봐. 낯선 분위가 쑤시는 통에 나도 아침을 거른 채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배고파.”

이서호가 어기적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웬일로 형들보다 일찍 일어났나 했더니 배고파서 그랬던 거군. 냉장고를 뒤적거리던 이서호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물만 벌컥벌컥 들이마신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잠잠해지길래 슬쩍 문을 열어 들여다봤다. 잠깐 사이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몽유병 수준 아닌가?

형들도 배고플 텐데.

냉장고에 식자재는 들어 있었지만, 조리된 음식은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점심이나 준비해야겠다. 대충 있는 재료로 만들어 먹으면 되겠지.

만만한 건 김치찌개나 김치볶음밥인데. 어느 쪽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김치찌개에 넣을 돼지고기나 참치가 없길래 볶음밥으로 결정했다. 김치볶음밥이랑 계란국 해야지!

먼저 밥을 얹히고 기다리는 동안 목욕을 하고 나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니까 근육통이 좀 가신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어깨를 한 번 풀어준 뒤 갓 지은 쌀밥으로 김치볶음밥을 조리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서 그런지 형들이 한, 두 명씩 일어났다. 다들 배고파하면서 내 근처에 와서 코를 킁킁거리더니 바로 씻으러 갔다. 형들이 씻으러 간 사이에 계란프라이까지 부친 뒤 접시에 예쁘게 담았더니 그럭저럭 볼만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맛있는 냄새 난다. 도와줄 거 있어?”

강현 형이 상큼한 스킨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아, 형. 그러면 계란국 좀 마무리해 줄래요? 저 이한 형 깨우고 올게요.”

“오케이.”

나는 강현 형과 교대하듯 방으로 들어가서 베개를 끌어안고 곤히 잠든 정이한의 뺨을 검지로 콕콕 찔렀다.

“으응…….”

정이한은 잠결에 내 손을 치우고는 뺨을 긁적였다.

“이한 형.”

“응……. 하온이…….”

작게 불렀는데도 귀신같이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대꾸하는 게 신기했다.

“형, 형. 일어나서 점심 먹어요.”

“하온아…….”

몽롱한 눈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뭔가 좀 귀여운 것 같아. 감상하듯 그 모습을 지켜볼 때였다. 갑자기 정이한이 나를 확 잡아끌었다. 나는 순식간에 정이한의 가슴 위로 엎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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