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당당하게 금메달을 걸고 돌아온 강현 형은 곧바로 내 목에 메달을 걸어줬다. 그에 질세라 유찬 형까지 걸고 있던 은메달을 내게 건네준 통에 나는 두 개의 메달을 걸게 됐다. 움직일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서 신경이 쓰였다.
“하온아, 진짜 소원 들어줄 거야?”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요?”
과한 걸 요구할 사람은 아니니까 괜찮겠……지? 강현 형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말했다.
“나랑 커버 댄스 하나 하자.”
고작? 커버 댄스는 하자고 하면 언제든지 들어줄 수 있는 건데? 긴장하고 있던 것에 비해 너무 쉬운 소원이라 이상한 소리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엥?”
“곤란해?”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 소원이니까 뭔가 더, 음. 다른 걸 말할 줄 알았어요.”
“다른 거라면.”
강현 형이 턱을 쓰다듬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스킨십 같은 거?”
“…….”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일시적으로 영혼이 가출해서 대답도 못 하고 굳어 버렸다. 나는 고장 난 기계라도 된 것처럼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 아니요? 아니, 무슨 소리를…….”
“푸흡. 농담이야. 페어 댄스 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동작이 좀 과격해서 선뜻 말하기 어려웠거든. 그거 같이 해보고 싶어서.”
“네. 할게요. 무조건할게요.”
또 엄한 소리를 하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에 다급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러자 강현 형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또 나만 놀랐지!
“그만 웃어요.”
“귀여워서 그러지.”
“으으…….”
나는 멤버들에게서 도망치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형들이 날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민망하다.
“그만 웃고 빨리 가요…….”
“그래그래. 가자.”
유찬 형도 얼굴에 웃음기를 달고는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다같이 걸어가는 내내 간간이 풉, 하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자꾸 귀에 들렸다. 으으. 당황한 티를 너무 냈어…….
***
블루 팀 진영과 가까워지자 나는 곧장 딥컬러 대기석을 찾았다. 팬들과 놀고 있던 딥컬러 멤버들은 우릴 발견하고 반갑게 마중을 와줬다. 흑강이 안 보여서 두리번거렸더니 주홍이 내게 다가왔다.
“하온아~ 또 보네! 정수는 경기하러 갔어.”
“아, 그래? 흑, 아니. 정수가 선배님들 소개해 준대서 왔거든.”
“어어. 들었쥐.”
주홍도 흑강처럼 내게 스스럼없이 굴었다. 혹시 얘도 나를 친구라고 여기는 걸까?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친구냐고 물어보기엔 그렇지 않나……. 주홍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헷갈려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을 때였다.
“너 진짜 인기 많더라! 이런 애가 내 친구라니! 내가 다 뿌듯하더라니까?”
주홍이 가슴을 쫙 펼치며 호쾌하게 웃었다. 친구, 맞구나. 그저 몇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주홍도 날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기분 좋다…….
“아니? 사람 심장 떨리게 왜 그렇게 웃냐?”
“내가 뭘…….”
아, 내가 너무 좋아한 티를 냈나? 민망함에 양 뺨을 문지르면서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홍은 두 손으로 제 심장께를 꾹 누르며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후, 어후. 진하온 인기 많은 이유 알 것 같다니까, 진짜.”
“……그만해. 부끄러우니까.”
“아니! 귀엽기까지 해? 너어는 도대채에~ 부족한 게 뭐냐? 응? 나도 그 비법 좀 알려줘!”
옆에서 딥컬러 막내 멤버인 레드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일단 형은 얼굴이…….”
“야! 내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
“……형이 객관적으로 알고 싶으시다면, 하온 형이랑 투샷 찍어드릴까요? 오징어 변신 쌉가능인데.”
“찬형아! 단어 선택 주의하랬지!”
어느새 다가온 딥컬러의 리더 블루가 레드에게 호통을 쳤다. 레드가 입술을 쭉 내밀고는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톡톡 때렸다.
“으으! 우리 레드 귀여워!”
이서호가 그런 레드를 꼭 끌어안고 부비적거렸다.
“와앙! 우리 서호 형이 제일 멋있어!”
쟤들은 또 시작이네. 나는 얼싸안고 서로를 추켜 세워주는 두 사람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딥컬러 멤버들과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을 때였다.
“앗, 준 선배님! 안녕하세요!”
주홍이 내 뒤를 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디아스뿐 아니라 딥컬러 멤버들도 순식간에 자세를 고치고 준 선배님께 인사를 했다.
“디아스 멤버분들 온 것 같아서 사찰 왔는데, 괜찮죠?”
“네! 그럼요.”
딥컬러의 리더인 블루가 나서서 대답했다. 선배님이 건네준 쇼핑백 안에는 자판기에서 막 뽑아온 듯한 차가운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하온 씨.”
유찬 형이 내미는 음료를 받아 들다가 날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넵!”
준 선배님은 내 손에서 음료 캔을 가져가더니 뚜껑을 따서 다시 내게 쥐여줬다. 왜 굳이 이걸 가져가서 따주는 거지?
“음. 말 편하게 해도 되죠?
“아, 네. 괜찮습니다!”
“어어. 하온아. 아까 나랑 부딪힌 뒤에 아픈 덴 없고?”
미안해서 그런 건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굳이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적당히 선을 긋기 위해 대외용 미소로 나를 무장했다.
“네. 괜찮아요. 아픈 덴 없습니다.”
“아~ 말투 너무 딱딱하다.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되는데.”
“그러기엔 너무 대선배님이셔서…….”
나는 손을 시리게 만드는 차가운 캔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뭔가 되게 불편하네.
“아직 불편한가. 그럼 호칭이나 말투는 좀 더 친해지면 바꾸는 걸로 하고. 하온이한테는 내가 애들 좀 소개해 줄게. 블루야, 괜찮지?”
저걸 어떻게 거절하겠어. 당연히 블루는 “넵!”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준 선배님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이런 거 불편한데…….
“자자, 가자.”
게다가 선배님은 한술 더 떠서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나는 다급히 뒤를 돌아 우리 형들을 찾았다. 으아, 정이한이랑 강현 형 표정 관리 못 하고 있잖아! 저런 거 사진 찍히면 큰일인데.
“저, 선배님.”
“응?”
“저희 형들도 같이 가도 될까요?”
준 선배님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걸음을 멈췄다.
“아, 그럼 당연하지.”
“감사합니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올라와 있던 팔이 떨어졌다. 행여라도 또 같은 짓을 할까 봐 얼른 형들을 향해 뛰어 정이한과 강현 형 사이로 들어가 형들의 팔을 양쪽으로 꿰찼다.
“형들, 빨리 가요!”
이걸로 완벽하게 방어한다.
***
준 선배님을 따라다니며 다른 선배님들께 인사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어느새 다음 경기에 참가할 시간이 되어 우리는 양해를 구하고 방향을 틀었다.
“의외로 좋은 분이었어…….”
정이한이 머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준 선배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계셨다. 옆에 있는 텐스타 멤버와 사이좋게 어깨동무한 채였다.
한동안 이상한 사람들만 겪는 바람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나 봐. 만나는 사람들이 전부 변태일 리는 없는데. 준 선배님은 내가 경계한 게 무색하리만치 소개해 주는 사람마다 포옹하고,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저 스킨십을 자주 하는 사람일 뿐이었구나.
“그보다 강현 형이랑 이한 형. 아까 표정 관리 못 했던 거 알아요? 사진 찍히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마 두 사람도 나처럼 준 선배님을 경계했던 거겠지만, 그래도 이런 장소에서 표정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윽. 그걸 잊지 않고 있었어……?”
“당연하죠. 다음엔 조심해요.”
“응. 그럴게. 미안해.”
“강현 형도요.”
“……어. 노력은 해볼게.”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 노력을 해보는 게 아니라 꼭 그래야만 했다. 괜히 선배님을 노려보는 후배라면서 사진이라도 돌면 우리만 곤란해지는 게 아니다. 무조건 우리 편을 들어주는 디어리들이 텐스타의 팬덤과 맞서 싸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도 디어리한테 항상 고맙다면서요. 좋은 것만 주고 싶다고 했잖아요.”
“……응.”
“그럼 노력이 아니라 무조건 표정 관리해야죠. 우리를 위해, 그리고 디어리를 위해서요.”
강현 형은 한숨을 푹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죠? 잘 할거죠?”
“응. 잘할게.”
“그럼 됐어요.”
나는 강현 형을 보고 방긋 웃었다.
- 양궁 준결승전과 농구 결승전 선수들은 경기 구역으로 이동 부탁드립니다.
“아, 저 다녀올게요!”
유찬 형과 이서호가 나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우리 농구 결승전 있어서 가야 하니까 끝나면 이쪽으로 와.”
“네!”
씩씩하게 대답하며 나는 유찬 형과 이서호와 함께 양궁 경기 구역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과 헤어진 뒤 선수들 틈에 멀거니 섞여 있다 보니 자꾸 잡생각이 들었다.
준 선배님은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친해져도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나를 포함한 멤버들 전원이 번호를 뜯긴 탓에 이게 또 곤란해졌다. 텐스타 멤버들 중 누가 시한폭탄인지 모르겠으니 조심해야 하는데…….
나는 과거의 기억을 뒤적거려 열 명 중 어떤 멤버가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떠올려 보려고 애를 써봤다. 하지만 전생에서 데뷔 년도로만 따지면 내가 텐스타보다 선배였다.
그러니까……. 텐스타가 데뷔했을 때 나는 이미 그룹이 해체된 뒤 집에 틀어박혀 있던 시기였다. 아무리 애써 본들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온 선배님.”
“어? 아, 재혁 씨. 안녕하세요.”
“위험한 길이 있다면 돌아가는 게 낫겠죠? 하물며 그 길의 끝이 목적지도 아니라면, 후진하는 게 좋을 테고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회귀 목표 알려주기 싫다는 걸 이렇게 말하는 건가? 그거라면 나중에 연락해도 될 텐데 지금 굳이?
“못 알아듣네.”
교주는 번듯한 미소를 유지한 채 좀 더 내게 바짝 붙어 귓가에 속삭였다.
“열 명 중 세 명. 나중에 터질 겁니다. 선배님. 저는 경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