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어? 하온 씨.”
서둘러 농구장으로 돌아가던 나를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아직 사람들이 띄엄띄엄 다니는 곳이라 한껏 경계하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낯익은 얼굴이 살갑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상자남이잖아?
“아, 안녕하세요.”
이 사람도 여기 있었네. 이름이 뭐더라……. 나는 얼른 스태프 명찰을 확인했다. 박현철. 아, 진짜 다행이야. 여기저기 이름을 붙이고 다녀서.
“아, 드디어 만났다. 은근히 찾기 힘드네요.”
“저를 찾았어요? 왜……요?”
우리가 뭔가 용건이 있을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 상자남이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상자남은 곤란한 듯 나를 보고, 주변을 휘둘러 본 뒤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온 씨, 혹시 스토킹 당하고 있지 않아요?”
“……아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다행히 이번에는 뻔뻔함으로 무장한 채 부정했다.
“어? 아니에요? 이상하다. 분명 스토킹하는 것 같았는데.”
중얼거리는 말 중 내 귀에 때려 박히는 말이 있었다. ‘스토킹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의 의미는 상자남은 제보자 혹은 증인이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아직 모르는 걸지도 모르니까 일단 이야기는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솔깃한 제안에 나는 못이기는 척 “뭔데요?”하고 물었다.
“이런 장소에서 말해도 괜찮으세요? 직업이 직업인 만큼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
확실히 여기는 내 스토커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교주와 은밀히 이야기했던 곳처럼 폐쇄된 느낌도 없었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제 친구 일이라……. 저도 좀 조심스러워서요.”
상자남의 친구, 이연휘. 모든 게 이연휘가 스토커가 맞다고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한테 이야기해 주시려는 거예요?”
상자남은 우리가 피처링을 부탁했을 때 이연휘가 데리고 온 사람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친분은 각별하다는 의미겠지. 그런데 내게 이연휘가 내 스토킹을 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건 친구를 배신하는 행위 아닌가?
“친구라서요.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는데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잖아요.”
상자남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른 눈동자로 대답했다. 마치 준비된 듯한 정석적인 대답에 오히려 조금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나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았다. 우리 멤버 중 한 명이 길을 잘 못 들어선다면 어떻게든 바로 잡아주고 싶어지겠지. 설혹,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하더라도.
“이걸 그 친구가 알게 된다면 절 증오하겠지만, 그래도 저한텐 소중한 친구라서요. 대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그 친구, 일에 진심이거든요. 제가 도와드리는 대신 그 친구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공론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자남은 말끝을 흐리면서 ‘염치없지만요.’하고 말을 덧붙였다. 이유도, 목적도 확실했다. 그렇다면 상자남의 말을 조금 믿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 친구분이 정말 절…….”
마침 스태프분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바람에 나는 말을 멈췄다. 근처에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말을 이었다.
“스토킹하는 게 맞아요?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증거. 증거가 필요해. 빠져나갈 수 없는 증거가.
“제가 가지고 있는 게 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보여드리기는…….”
“저도 가봐야 해서요. 녹화 끝나고 내일이나 모레쯤 연락해 주실 수 있어요? 지금 저한테 휴대폰이 없어서요.”
상자남은 내게 휴대폰을 내미는 대신 다시금 약속해 달라고 강조했다. 어차피 나도 이런 걸 떠벌릴 생각은 없었기에 끄덕였더니 그제야 휴대폰을 건네줬다. 나는 빠르게 내 번호를 찍어준 뒤 상자남에게 내밀었다.
“시간은 언제가 괜찮으세요?”
“아무 때나요.”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한 뒤 미련 없이 헤어졌다. 상자남과 만날 약속은 멤버들이랑 같이 정하면 되겠지만, 가드가 문제네. 증거 확보를 위해 나는 내가 스토킹 당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모른척했다. 그런데 개인적인, 그것도 ‘내 스토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가드를 대동하면 이상하잖아.
차라리 회사로 부를까…….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농구장으로 되돌아갔다. 경기가 막 끝난 듯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겼지?
“진하온!”
사색이 된 이서호가 날 발견하자마자 달려들었다. 이서호는 내 양팔을 꽉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아, 나 없어진 거 알아차렸구나. 금방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너, 너어, 너, 이씨이…….”
“미안. 화장실에 다녀왔어.”
“장난하냐? 10분 전부터 찾았는데! 왜 거짓말해? 솔직하게 말해. 어디 갔다 왔어!”
이서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이서호의 팔을 토닥거렸다.
“진짜야. 도중에 길을 좀 잃었지만. 그리고 형, 목소리 낮춰라.”
“우윽. 윽. 그러면 말을 해야지. 내가 얼마나…….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진짜 미안. 경기 재미있게 보길래 방해하기 싫어서 조용히 다녀오려고 했는데…….”
이서호는 연거푸 한숨을 내쉰 뒤에야 내 팔을 놓아줬다. 그러더니 제법 매서운 눈길로 날 쏘아봤다.
“넌 유찬 형한테 죽었어.”
“……유찬 형 왔어?”
“당연하지. 준결승전 티켓 들고 왔는데 너 없어서 난리 났다. 나는 길 엇갈릴까 봐 여기서 너 기다린 거고, 형은 너 찾으러 갔어. 아마 정곤 형도 찾고 있을걸?”
으어, 맙소사. 일이 커졌다.
***
나는 이서호에게 연행되다시피 대기실로 끌려갔다. 휴대폰을 찾은 이서호가 매니저 형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넣었다. 잠시 후 매니저 형은 서슬이 퍼런 유찬 형을 대동하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진하온.”
뚝뚝 끊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싸늘했다. 어떡하지. 형 진짜 화 많이 났나 봐. 내가 잘못한 게 맞았으므로 나는 유찬 형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떨궜다.
“죄송해요, 형…….”
“화장실이 제일 위험하다고 이야기했어? 안 했어.”
“했……어요.”
“그런데 뭐? 화장실에 혼자 가? 게다가 길을 헤맸어? 너 그 자식이 여기 있는 거 알면서 어떻게 혼자 다닐 생각을 해! 꼭 멤버 한 명 데리고 다니라고 했잖아! 너는 왜 매번, 매번 걱정을 끼쳐, 왜…….”
유찬 형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떡하지. 진짜 어떡해. 안절부절못한 나는 이서호에게 도움을 청하듯 바라봤다. 하지만 이서호는 침만 꼴딱 삼킬 뿐이었다.
에이씨. 이서호는 글렀어.
공기가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나는 간절한 눈으로 매니저 형을 바라봤다. 매니저 형도 화가 많이 난 듯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난 이한이랑 강현이 데리고 올 테니까 너희끼리 이야기하고 있어.”
급기야 자리를 피해버렸다. 매니저 형이 대기실을 나간 뒤에도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울상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유찬 형에게 다가갔다.
“……유찬 형.”
“…….”
대답 없는 형을 한 번 더 불렀다. 그제야 유찬 형이 고개를 들었다. 혈색이 다 빠져나간 듯 창백한 얼굴을 보니 죄책감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저 진짜 뉘우치고 있어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죄송해요…….”
말을 하다 보니 점점 더 속상해져서 내뱉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를 물끄러미 올려보던 유찬 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유찬 형이 갑자기 나를 훅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네…….”
날 끌어안은 팔에 힘이 가득했다.
“그래…….”
형은 짙은 한숨을 내쉰 뒤 내 등을 토닥거렸다.
“너 울상인 거 보니까 더는 화를 못 내겠다. 진하온, 오늘 진짜 미웠던 거. 그것만 기억해라. 내 속이 다 녹아내리는 줄 알았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는 유찬 형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촬영이 끝날 때까지 형들한테 찰싹 달라붙어 있을 거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 좀 부탁이다.”
유찬 형이 웃으면서 나를 놓아줬다. 평소의 유찬 형이었다. 그제야 안도한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상자남 만났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지금 해도 되나. 타이밍 놓치면 말 꺼내기 애매해질 것 같으니 말해야겠다.
“아, 그리고요. 저 돌아오는 길에 그, 박현……찬?”
“……그게 누구야?”
이 이름이 아닌가? 분명 아까 봤는데도 상자남 이름을 또 잊었다. 이제는 중요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름을 외워야겠어.
“아니, 전에 그 사람이랑 같이 저희 녹음실 왔던 분이요.”
“박현철?”
“아, 네. 그 사람 만났어요.”
나는 유찬 형에게 상자남, 아니. 박현철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 이야기를 들은 유찬 형은 “그게 진짜야?”하고 놀라워했다. 형의 반응에 괜히 뿌듯해서 웃었다가 이마에 딱밤을 맞았지만.
“잘했다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웃지 마라.”
“넵…….”
“가드 없이 만나야 한다는 건 이해했고, 이따 멤버들이랑 정곤 형 돌아오면 같이 이야기해 보자.”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대기실 문이 열렸다. 호랑이 세 마리가 어흥거리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정이한과 강현 형도 매니저 형한테 다 들었는지 표정들이 심상찮았다.
2차전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에 마른침을 삼켰을 때였다. 이서호가 쾌활한 목소리로 형들을 불렀다.
“어! 형들! 때마침 잘 왔어! 우리 그 스토커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뭐?”
“어떻게?”
고맙다, 이서호. 스페셜 땡큐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