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32화 (232/320)

232.

멤버들 모르게 빠져나갈 기회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생겼다. 사전 예선전을 거친 농구 준결승전 덕분이었다. 그것도 무려 그린 팀과 옐로우 팀의 경기. 유찬 형은 개인전을 하러 떠났고, 정이한과 강현 형은 선수로 출전했다. 남은 건 나와 이서호뿐이었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응원석의 열기가 뜨거워졌다. 이서호는 잔뜩 흥분해서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멤버들이 활약하고 있었으니 나도 흥분이 되긴 했지만…….

이성을 찾자. 그나마 다행인 건 교주도 농구 경기를 응원하러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거였다. 교주가 농구 선수로 출전했으면 이 기회도 못 잡았겠지. 나는 깡총거리며 열띠게 응원하는 이서호 몰래 슬쩍 뒤로 빠졌다.

몇 번 뒤를 돌아봤으나 농구 코트에 빠져들 것 같은 이서호는 내가 사라진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사람들을 비집고 교주가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등을 콕콕 찌르자 교주가 뒤를 돌아봤다. 교주는 멤버들을 확인하듯 다시 앞을 살펴본 뒤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의 멤버들도 하나 같이 이서호처럼 흥분해서 난간에 쪼르륵 매달려 있었다.

“이쪽으로.”

교주가 앞장섰다. 나를 데려간 곳은 스태프도, 출연진도 거의 보이지 않는 으슥한 장소였다.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보이 그룹 멤버 한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왜인지 모르지만 그대로 유턴해서 돌아나갔다.

“여기가 만남의 장이거든. 데이트 약속이 있었나 보네.”

교주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때마침 걸그룹 멤버 한 명이 기웃거리다가 우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 사라졌다.

“……너는 별걸 다 아네.”

이서호한테 강현 형에게 대시하려는 걸그룹 멤버가 많다고 알려준 것도 교주였으니.

“언제 누가 필요할지 모르니 평소에 밑 작업하는 거지.”

인싸가 아니라면 교주의 스킬을 받아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는 소리군. 교주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을까? 아니면 스킬 때문에 달라진 거였을까.

“그래? 스킬 쓰는 것도 고생이네.”

“딱히. 원래 주변에 사람은 넘쳤으니까.”

타고난 인싸라는 거네. 그럼 교주가 쓰기 좋은, 어떻게 보면 자기와 어울리는 스킬을 받았다는 건데. 그런데도 회귀 목표 달성을 두 번이나 실패했다고? 교주 같은 남자가?

“네가 부탁한 사람.”

“아, 응. 왜 안 되는 건데?”

“폐쇄적이어도 너무 폐쇄적인 성격이야. 남을 믿지 않고, 불신에 가득 차 있어. 그런 사람한테는 내 스킬이 안 먹혀.”

이건 딱히 도움이 안 되는 정보인데.

“너처럼.”

“나는 너 한정이야.”

반사적으로 나간 삐딱한 대답에 교주가 코웃음 쳤다. 그게 꼭 나라는 사람을 파악한 듯, 확신에 찬 반응이라 괜히 찜찜해졌다.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도 하나는 알아 왔어.”

“뭔데?”

“위험할 정도로 널 좋아해.”

내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스토커는 이연휘가 맞다는 확답을 받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알았는데?”

“영업비밀.”

“그럼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믿든 말든, 그거까진 내 알 바 아니지.”

교주는 단조롭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 하겠네. 이건 내 문제니까 교주랑은 상관없는 게 맞지. 그래도 영업비밀이라는 게 뭔지 궁금하니 살짝 도발이라도 해볼까.

“……하아. 너라면 뭔가 알아 올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번에 교주의 눈썹 한쪽이 날카로운 각도로 치켜 올라갔다.

“참나. 그러면 부탁하질 말든가.”

“부탁이 아니라, 거래였잖아? 이건 너무 쓸모없어서 수지가 안 맞는 것 같은데.”

교주는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짜증스러워 보이는 눈길로 날 쏘아봤다. 자존심 하나는 어마어마하단 말이야. 하지만 교주는 길게 숨을 내쉰 뒤 평소처럼 멀끔한 얼굴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네 도발에 안 넘어가. 영업비밀 알아내려고 그러는 거지, 지금?”

하여간 눈치 좋은 자식.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교주를 쳐다보며 “어.”하고 대답했다. 교주는 황당해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그걸 또 솔직하게 말하냐?”

“너한텐 잘 보일 필요 없으니까. 어쨌든 도와준 건 고마워. 나 간다.”

“잠깐.”

교주가 내 팔을 잡으며 불러세웠다. 용건이 더 남았나?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었더니 교주가 저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 녹화 중인데 휴대폰을 들고 다녀?”

“난 너처럼 정직하지 않거든.”

교주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조작했다. 그리고는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아, 맞다. 보여줄 거 있다고 했었지.

“……이건.”

“조심해야 할 또 다른 사람.”

휴대폰에는 소파남이 교주에게 보낸 문자가 담겨 있었다. 온통 저주 섞인 내용들은 전부 자신은 잘못한 게 없어서 억울하다는 거였고, 나와 교주 때문에 자신이 망했다는 하소연과 분노의 글이었다. 나 진짜 번호 바꾸고 이 사람 차단하길 백번 잘한 것 같아.

“너한테도 이런 걸 보냈어?”

“나한테도? 나 말고 또 누구한테 보냈는데? 너?”

나는 문라이트의 멤버 정다금을 떠올렸다. 나한테 울고불고 사과해도 절대 받아 주지 말라고 경고해줬던 사람. 그 사람도 이런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보여줬었다. 하지만 굳이 교주에게 시시콜콜 말할 필요는 없으니…….

“영업비밀.”

“이렇게 되돌려 주신다?”

“궁금하면 너부터 풀어.”

“그렇게까지 궁금하진 않은데 어쩐다.”

“그럼 말면 되지.”

나는 교주에게 손을 흔든 뒤 농구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아, 잠깐. 생각해 보니 우리 같은 장소로 돌아가는 거잖아.

“너도 농구장으로 갈 거지?”

“난 대기실. 남자들 땀 냄새 질색이야.”

“아, 오케이. 그럼 간……, 잠깐만. 나 하나만 물어보자.”

이번에야말로 정말 떠나려고 했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또 왜.”

다분히 귀찮아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할 말은 해야지.

“내가 네 회, 그러니까. 그 목표를 도와줄 의향이 있다면 그게 뭔지 나한테 알려줄 수 있어?”

각 잴 것도 없이 돌직구로 날려버렸다. 교주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당황해했다. 진심으로 당혹스러워하는 거 처음 보는 것 같네.

“……도와준다고.”

교주는 그 말을 곱씹으며 나를 봤다. 마치 뭔가를 읽어내려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교주의 시선을 받아냈다.

“내가 마지막이라고 말했던가.”

“응. 들었어.”

“남은 시간은?”

“그건 못 들었는데…….”

항상 걸쳐 있던 매끄러운 미소가 사라졌다. 백지 같은 무표정을 한 교주는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졌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처음 만나는 듯한 그런 느낌.

“2년. 아니, 이제 1년 2개월.”

“……어?”

아무렇지 않게 시한부 선고를 한 교주는 무덤덤한 눈으로 나를 봤다.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다.

“내 목숨. 앞으로 1년 2개월 남았다고. 처음 내가 죽었던 날, 그날을 기점으로 끝나더라.”

“아…….”

“말했지? 나 절박하다고. 네가 날 도와줄 수도, 방해할 수도 있는 이상 무턱대고 네게 정보를 공개할 순 없어.”

교주는 무언가를 짓씹는 듯 이를 으득 갈았다. 형형하게 타오르는 안광은 교주의 각오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일을 갖고 싶거든.”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교주를 나도 모르게 붙잡았다. 제 팔을 잡은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본 교주가 “왜? 할 말 안 끝났어?”하고 말하며 내 손을 쳐냈다.

“어. 안 끝났어.”

교주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걸 보니 어쩐지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이 녀석도 어쩌면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그냥 가버리면 되는 거잖아. 지금처럼 내 말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그동안 교주를 싫어하고 경계한 건 우리 멤버들을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목표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자신이 살고자 한 일이라면…….

“사람 불러 세워 놓고 왜 말을 안 해?”

그래도 교주의 방법은 잘못됐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유린하지 않아도 목표에 도달할 방법이 분명 있었을 테니까.

신들이 교주에게 준 세 번의 기회. 그게 다른 사람을 헤치면서 목표를 달성하라고 주는 기회 같진 않았다. 나는 데우스에게 끌어안겼을 때 처음 느꼈었던 온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네 방식대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잖아. 효과는 있었어?”

내 말에 교주는 허를 찔린 것처럼 몸을 굳혔다. 잠시 후 눈동자가 허공을 배회했다. 마치 무언가를 읽어나가는 것처럼. 나는 교주가 그의 눈에만 보이는 시스템을 보고 있다고 확신했다.

“……아니.”

이건 진실이다.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그럼 네 방식이 틀렸다는 거 아니야? 다르게 접근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교주가 매달리는 듯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나, 나야 모르지.”

“……장난해?”

“아니. 목표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그걸 같이 고민해 주겠다는 거잖아.”

“왜?”

“네 목표를 해결하는 게 디아스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회귀 목표를 달성하고, 교주에게 내일이 생긴다면 앞으로 교주가 우리 멤버들을 건드릴 일은 없을 거 아니야. 이게 가장 확실하게 교주에게서 멤버들을 지키는 방법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내가 한 말 아니냐?”

“그럴지도?”

교주는 푸흐, 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더니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생각해 볼게.”하고 말한 뒤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나는 멀어지는 교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 진짜. 사람 헷갈리게. 이게 만약 교주가 내 마음을 얻기 위한 연기고 함정이라면 정말 제대로 걸려든 건데. 이 상태에서 교주가 내게 스킬을 쓰면 바로 당하는 거 아냐? 하지만 교주가 하는 말이 거짓말 같진 않았는데.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같은 난제 앞에 부딪힌 것 같았다. 한참을 서서 고민하던 나는 내 직감을 믿기로 했다. 원래 믿을 건 나밖에 없잖아. 나를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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