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디아스는 나의 양궁 예선을 제외한 전 종목에서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따지고 보면 이제 시작인 셈이지만 우리는 메달이라도 딴 것처럼 한데 모여 기뻐하고 있었다.
그때 양궁 예선전을 시작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이서호가 내 양어깨를 짚고는 눈을 빛냈다.
“진하온, 너만 양궁 통과하면 된다!”
“맡겨 둬.”
나는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을 위해 가드분들과 말리던 형들을 귀찮게 하면서까지 양궁장에 가서 연습했다. 형들은 그런 거 못 해도 된다고 했지만…….
양궁은 처음인걸. 못해도 적당히 못해야지. 과녁에 닿지도 못하고 바닥에 툭툭 떨어질 내 화살을 생각하면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런 쪽팔린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 결과 과녁은 맞힐 수 있게 되었다. 더도 덜도 말고 내 목표는 예선전 통과. 연습 다녔다는 소문까지 났는데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지. 최소한 본선은 가야 그래도 연습한 보람이 있구나, 싶지 않겠어?
나는 쫄래쫄래 따라오는 멤버들을 매달고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이미 본선이 시작된 경기도 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예선전 시간에 경기가 잡힌 멤버들이 없어서 우린 지금 다섯 명 완전체였다.
“여기서부터는 참가 선수만 이동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스태프의 제지에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하온! 파이팅!”
“하온아, 잘해!”
“예선 탈락해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마.”
“힘내라.”
형들의 마지막 응원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는 다른 선수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앞 사람의 등을 보며 걷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도 양궁 출전하시네요.”
대외적인 사근사근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네온 건 교주였다.
“아…….”
이, 이름이 뭐였더라? 너무 오랫동안 교주라고 부른 탓에 입 밖으로 뱉으려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입에 착 달라붙는 별명의 폐해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척하며 이름표를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재혁 씨도 양궁이신가 보네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다.
“네. 보다시피. 아, 맞다. 선배님.”
“네?”
“이전에 말씀하신 거, 확인해 봤는데요.”
교주는 내가 알아들었는지 확인하려는 듯 말꼬리를 늘렸다. 한 달 이상은 걸릴 거라더니 벌써?
“아아, 네. 말씀하세요.”
“안 될 것 같아서요.”
뭐? 왜!
“왜……요?”
목소리를 높일 뻔했던 나는 가까스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주는 난처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여기서는 자세히 말할 수 없다는 거지, 저거?
“이따 조용한 곳에서 만나죠. 보여드릴 것도 있고.”
보여줄 거? 혹시 뭔가 알아낸 게 있는 건가? 교주가 우리 쪽으로 오는 건 내키지 않으니.
“좋아요. 제가 찾아갈게요.”
교주는 대답 대신 눈꼬리를 접어 올리더니 “그 사람 스토커죠?”하고 속삭였다. 순간적으로 놀란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우리 두 사람의 대화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삼키는 것도 잠시 교주가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젠장. 날 떠본 거였구나. 어쩐지 여기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더라니. 내가 부탁한 이유를 캐내려던 거였나?
촬영장에 이연휘만 없었어도 느긋하게 굴 수 있었을 텐데. 여기에 이연휘가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조급하게 굴었다. 내 실책이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교주는 사람들 틈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스토킹 당한다는 건 숨기고 싶었는데, 멍청하게 반응해서 걸려버렸다. 다리 다쳤을 때 강현 형이 떠볼 때도 바로 걸렸잖아. 그런데 또 같은 수법으로…….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불쑥 치고 들어와 나도 모르게 솔직하게 반응해 버린 게 벌써 두 번째다. 앞으로 진짜 주의해야겠어.
생각에 잠깐 빠져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내 순서가 다가와 있었다. 나는 지정된 자리에 서서 양궁을 들어 올렸다. 지금은 다른 생각은 모두 미룬 뒤 경기에 집중할 때였다. 눈을 감고 심호흡한 뒤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서 번뜩이는 카메라 렌즈와 눈이 마주쳤다.
아, 깜짝이야!
놀라서 눈을 깜박거리다가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 카메라를 향해 준비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순 주위가 조용해졌다. 왜 그런가 싶어서 눈동자만 또륵또륵 굴리고 있을 때였다.
- 이야! 디아스의 하온 씨, 독보적인 미모로 유명하신데 오늘 제대로 증명하시네요!
- 아, 저도 순간 넋을 잃고 봤지 뭡니까?
MC 두 명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 매력 스탯과 예쁜 척 스킬 효과 때문이었군. 단독 풀샷을 받은 탓에 내가 메인이 되면 내 매력이 돋보인다는 스킬 효과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아, 고, 고맙습니다.”
나는 민망해하며 고개를 떨궜다. 계속 찍히면 곤란해. 이거 스토커도 보고 있을……. 아, 어쩌면 스토커는 매력 스탯과 예쁜 척 스킬이 만들어 낸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양궁 예선 통과한 건 좋은데 교주를 은밀히 만날 방법이 없네. 멤버들이 서로의 일정을 확인하며 교대로 내 곁을 지키고 있어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멤버와 함께 교주를 만나기엔 좀 그렇고…….
나는 은밀하게 교주를 만나러 갈 방법이 없을지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내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방송에 재빠르게 팔을 걷어붙였다. 우리 디어리 도시락은 배달해 줘야지!
매니저 형과 스태프분들이 도시락을 옮기고 있었다. 그 스태프 사이에 이연휘가 끼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연휘를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멍청하게 이연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내게 눈웃음을 지어 보인 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기서 모르는 척하면 안 되겠지? 지금은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나도 마주 인사한 뒤 도시락을 가지러 갔다.
“자, 하온이는 여기.”
매니저 형이 이연휘 앞을 막아서며 내게 도시락 박스 하나를 내밀었다. 형의 간절한 눈짓은 빨리 이거 받고 가버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방송사에서 배정되어 온 스태프라 이유 없이 이연휘를 거절할 수 없었나 보다.
“진하온, 일단 넌 그거 하나만 들고 가. 나머지는 우리가 옮길게!”
이서호가 씩씩하게 굴며 매니저 형 옆에 섰다. 그리고는 과도하게 이연휘를 보고 반가운 티를 냈다.
“엇! 안녕하세요!”
“응? 누군데?”
유찬 형이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아! 연휘 씨.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연휘가 형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나는 도시락 상자를 들고 팬석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신경이 쓰였지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내리눌렀다. 형들이 지금은 내가 관심을 주지 않는 게 낫다고 했으니까.
“디어리들! 배 많이 고프죠?”
디어리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응.’과 ‘아니.’가 뒤섞여 ‘어아니’ 처럼들렸다. 그게 왠지 귀여워서 혼자 웃었더니 디어리들이 “끄으윽!”하는 이상한 신음을 냈다.
“아침은 다 드셨어요?”
“남았어!”
“하온아! 담요 고마워!”
“방석도!”
디어리들이 꺅꺅 소리를 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침 도시락은 직접 주지 못했는데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앗! 저희도 왔어요!”
그때 뒤에서 이서호와 멤버들이 부랴부랴 올라왔다. 네 명 모두 표정이 밝아 보였다.
“저희가 진짜 열심히 고민해서 준비한 거예요.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어요! 직접 나눠드릴 테니 기다려 주세요!”
“응!”
디어리의 힘찬 대답과 동시에 팬 매니저가 앞으로 나오더니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제일 끝줄에 있는 디어리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내려온 디어리들은 가장 폭이 넓은 첫 줄의 좌석과 난간 사이를 걸어왔다. 아, 미리 이야기해 놨구나.
제일 먼저 우리 앞에 도착한 디어리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상기된 얼굴과 반짝이는 눈동자가 기쁨과 설렘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 감정이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웃음을 지으며 디어리에게 도시락을 건넸다.
***
디어리에게 도시락 전달식을 끝낸 뒤 우리도 점심을 먹기 위해 대기실로 돌아왔다. 우리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평소에는 우리가 떠나는 걸 아쉬워하는 디어리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며 얼른 가서 든든하게 먹으라고 성화인 탓에 쫓기듯 돌아왔더니 여유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먹지 않아도 마음이 꽉 차서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진하온 안 먹냐?”
“……먹을 거야.”
“상태가 왜 그러냐? 꼭 무대 끝난 다음 같다, 너.”
“그러게…….”
조금 몽롱한 기분이 드는 게 마치 무대가 끝난 뒤의 충족감과 황홀감과 같았다. 하지만 오후에도 멤버들을 응원하고 내 경기도 하려면 체력이 필수였다. 아쉬워도 이 감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하온아, 천천히 많이 먹어.”
정이한이 손도 대지 않은 내 도시락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토마호크 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 낸 제 도시락을 내 앞으로 옮겨줬다. 심지어 뼈까지 착실하게 발라놨다.
“어? 제가 썰 수 있어요.”
“알지.”
그렇게 대답한 정이한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인 뒤 가져간 도시락의 스테이크를 썰어 제 입에 넣었다. 이미 먹었으니 못 돌려준다며 살살 눈웃음까지 쳤다. 잠깐 넋 놓고 있었다고 이걸 썰어 줄 줄이야.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형.”
“응응.”
뭔가……. 조금 기분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먹기 좋게 썰린 스테이크를 포크로 콕 찍어 입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