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30화 (230/320)

230.

휴가 좀 지냈다고 새벽 기상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아이돌 추석 대축제. 줄여서 아추대라고 불리는 쓸모 없고,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체육대회가 시작됐다. 그 시작은 오프닝 촬영을 위한 끝없는 대기였다.

“왜 하필 노란색이야…….”

이서호는 체육복이 마음에 안 드는지 저지를 펄럭거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이번 아이돌 추석 대축제는 총 세 개의 팀이 승부를 펼친다. 블루 팀, 그린 팀, 옐로우 팀. 그중 우리는 옐로우 팀으로 배정받아 노란색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하온이는 병아리 같아서 귀여운데 강현이는…….”

유찬 형이 강현 형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 저었다.

“형은 뭐 다른 줄 알아?”

“뼈 때리네…….”

시무룩해진 유찬 형이 본인의 체육복을 내려보며 고개를 떨궜다.

“왜요? 형들 다 귀여운데.”

“…….”

기껏 칭찬했더니 돌아온 건 침묵이었다. 귀엽다는 칭찬은 별로였나. 나는 머쓱함에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기가 길어져서 그런지 처음의 질서정연한 모습은 흐트러진 채 그룹끼리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중이었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나는 익숙한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이연휘. 그 사람이 스태프들 사이에 끼어서 움직이는 중이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정이한의 팔을 잡아당겼다.

“응? 왜?”

나는 정이한의 귀에 최대한 가까이 붙고는 “이연휘가 있어요.”하고 속삭였다. 정이한의 안색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위치를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 걸 내가 막았다.

“괜히 눈에 띄게 행동하지 마요.”

“하지만…….”

“왜? 뭔데?”

유찬 형이 귀를 쫑긋거렸다. 나는 입 모양으로 ‘이연휘’라고 전했다. 그것만으로 눈치챘는지 유찬 형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NBC 소속이니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 마주치니 기분은 별로네.

“하온이는 절대 혼자 다니지 마.”

“형들도 마찬가지예요.”

나만 위험한 게 아니야.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수작을 걸어올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잖아. 광인의 생각을 범인이 어떻게 알겠어.

“화장실이 제일 위험해…….”

정이한은 염려 섞인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화장실 갈 때 말할게요. 같이 가 주실 거죠?”

“응응. 물론이지.”

그제야 정이한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하여간 단순하긴. 방긋거리는 정이한을 보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오프닝 촬영 시작합니다!”

멀리서부터 스태프가 촬영 시작을 알리며 뛰어왔다. 블루, 그린, 옐로우 순으로 입장이라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걸그룹 멤버와는 대화도 하지 말고, 눈도 마주치지 마. 특히 이서호. 알았지?”

이것도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르겠네. 유찬 형은 계속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뭐, 아추대의 다른 이름이 아이돌 연애의 장이라는 소리도 있으니까. 우리가 조심하더라도 그쪽에서 대시해올 가능성도 있었다.

“아, 왜 자꾸 나만 콕 찍어서!”

이서호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유찬 형은 “그거야 우리는…….”하고 말을 잘라냈다. 그 시선 끝에 내가 있었기에 이서호는 코를 찡긋거렸다.

“강현 형이 제일 조심해야 할걸? 형 노리는 걸그룹 많다던데.”

강현 형은 이서호를 향해 코웃음 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건 어디서 들었어?”

내 물음에 이서호는 “여기저기서.”하고 말끝을 흐렸다. 순식간에 유찬 형의 눈썹 끝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너 설마 연락하는 걸그룹 있는 거 아니지?”

“아, 아니야! 그건 아니고. 재, 재혁 형한테 들었어.”

이서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왜지? 나랑 교주 사이 안 좋은 건 우리 둘만 아는 건데. 분명 다른 멤버들은 내가 교주한테 사과하려고 전화한 것만 기억할 텐데.

“왜 내 눈치를 봐?”

“……너 안 서운해?”

“내가 왜?”

이서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무슨 소리인지 잘 들리지 않아서 귀를 기울인 끝에 해석해낼 수 있었다. 교주가 원래 디아스 멤버였기에 자기가 친하게 지내는 걸 알면, 내가 서운해할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우리 이서호가 달라졌어요!

최근 들어 부쩍 정신적으로 성장한 티가 난다. 몇 번 사고 치더니 배운 게 많았나 보네. 괜스레 뿌듯해진 나는 장난스레 이서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우리 서호 형이 나를 배려해 준 거예요? 그래요?”

“아! 그 말투 뭔데!”

“칭찬?”

“그게 칭찬이냐? 놀리는 거지! 완전 애 다루듯이 하잖아!”

뿔이 나서 투덜거리는 걸 보면 여전히 애는 애야.

“푸흐,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오히려 내가 교주랑 몇 번씩 연락을 주고받은 걸 알면 이서호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비록 단지 서로가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무적인 관계라 해도 말이지.

“이제 걱정 안 할 거거든!”

이서호가 빽 소리치고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우연히도 그쪽에 교주가 있었다. 교주가 우리 쪽을 향해 흔들흔들 손을 흔들었다. 교주는 그린 팀이네. 바로 조금 전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도, 이서호는 교주를 반가워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를 힐끔거렸다.

그래서 이쪽을 향해 눈인사를 건네는 교주를 향해 나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순간 교주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빠르게 갈무리한 뒤 우리에게 아이돌스러운 상큼한 미소를 날려 보냈다. 교주 주제에 지금 누구한테 끼 부리는 거야?

***

“옐로우 팀 입장합니다!”

그린 팀 입장이 끝난 뒤에야 우리 팀이 줄줄이 움직였다. 전광판에 입장하는 그룹들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떴다. 그럴 때마다 각 그룹의 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마침내 우리 그룹의 차례가 되었다. MC가 디아스를 소개하자, 디어리가 큰 소리로 호응해줬다. 나는 제일 먼저 우리 디어리가 어디 있는지부터 찾았다.

“디어리들이 우리가 주는 역조공 받고 기뻐하면 좋겠다.”

유찬 형도 디어리가 있는 팬 석을 찾은 듯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저는 좀 자신 있어요.”

“나도 그래.”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고마운 마음을 전부 표현하기엔 부족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골랐다. 회사에서 할당해 준 예산이 부족해서 멤버들 사비까지 더한 결과물이었다.

정확하게는 회사에서 예산을 더 편성해 주겠다는 걸 거절했다. 마음을 담은 선물이었기에 회사 예산만으로 준비하는 건 싫다는 게 멤버 전원의 의견이었다.

“분명 우리 역조공이 최고일걸?”

이서호가 뿌듯해하며 가슴을 쫙 펼쳤다.

***

오늘 내가 참가하는 종목은 100미터 달리기, 500미터 릴레이 달리기와 양궁이었다. 멤버 별로 두 종목 이상은 필수로 참가해달라고 해서 그나마 안전하고 빨리 끝나는 걸 할당받았다. 팀 대항전 중 줄다리기는 전원 참석이니 그것까지 치면 네 종목이었다.

내가 참가하는 종목들은 전부 현장에서 예선전이 치러져 예선에서 탈락하면, 일찌감치 탈락자가 되어 멤버들을 응원하러 다녀야겠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이왕 출연했는데 분량을 못 따내면 본방 때 시청할 디어리들도 아쉬울 테고, 무엇보다 우리를 보러 온 디어리를 위해서라도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열의와 각오를 다지는 사이 우리 디어리가 있는 팬 석 앞 벤치 앞에 도착했다.

“얘들아! 다치지 마아아아!”

“당연하죠! 조심히 할게요!”

유찬 형이 팔을 휙휙 휘둘렀다. 이서호도 하트 날리기 바빴다. 정이한도 환히 웃으며 디어리에게 애정 표현을 하고 있었고, 강현 형까지 손을 흔들어줬다. 그런데도 디어리는 계속 우리가 다칠까 봐 걱정하는 중이었다.

나는 내 각오를 조금 수정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다칠 것 같으면 한 발 빼는 걸로.

- 100미터 달리기 예선전을 시작하겠습니다. 100미터 달리기 참가 선수들은 A 구역으로 모여주세요.

안내 멘트에 따라 나는 저지 자크를 채우며 디어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 다녀올게요!”

“조심해!”

“네!”

씩씩하게 대답한 뒤 이서호와 함께 100미터 예선전이 치러지는 A 구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사람이 많아서 한참을 줄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얼마나 기다렸냐면……. 우리보다 늦게 시작된 허들 계주에 나간 강현 형과 정이한이 나를 응원하러 올 정도로.

“형들 벌써 끝났어요?”

“우리 순서가 빨랐어! 하온이 파이팅!”

“화이팅!”

나는 목청껏 외친 뒤 앞줄이 빠지자마자 스타트 라인에 섰다. 이서호는 나보다 순서가 늦어서 뒤에서 열심히 날 응원하는 중이었다. 내 경기 끝나면 이서호 응원해야지.

탕!

출발 신호에 맞춰 나는 말 그대로 눈썹 휘날리게 뛰었다. 오직 내 라인만 보며 내달리자 100미터는 금방이었다. 아쉽게 2등이네. 그래도 3등까지는 예선 통과니까 이번엔 다행히 통과다. 나는 곧장 왔던 길을 되돌아가 이서호를 응원하기 위해 라인 밖에 섰다.

“서호 형! 1등 해!”

“당연하지!”

이서호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1위로 예선을 통과한 이서호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잘했다, 잘했다!

“아, 이거 은근히 승부욕 돋는다.”

이서호는 꼭 결승까지 가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치를 보니 강현 형도 꽤 즐기는 모양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인데도 평소보다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디아스는 강현 형과 이서호가 대활약하겠네. 나도 질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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