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휴식기가 시작되고 며칠이 지났다. 처음에는 바짝 긴장해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다시 둔감해지는 내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매일 숙소에만 콕 박혀서 놀고 있으니 여기서 더 긴장하라고 해도 무리였다.
무엇보다 이번에 유찬 형이 집에 가는 바람에 고삐 풀린 이서호가 게임 삼매경에 빠져버린 것도 크게 한몫했다. 처음에는 적당히 하라며 뭐라고 하던 매니저 형도 이서호의 울망울망 눈빛 공격에 진 후로는 이서호를 터치하지 않았다.
그 덕에 신이 난 이서호는 정이한까지 끌어들여서 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옆에서 구경하던 나도 한두 번씩 같이하다 보니 슬슬 게임에 재미가 붙었다. 원래 게임은 좋아했으니까.
“진하온, 아무리 생각해도 너 너무 잘해! 이거 너무 밸붕이잖아!”
“타고난 피지컬이 좋은 걸 어쩌겠어.”
“아, 재수 없어.”
“후후.”
아무래도 게임보다 이서호를 놀리는 게 더 재밌는 것 같아. 그런 생산성 없는 생각을 하며 놀고 있는데 매니저 형이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는 동시에 게임 패드를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정곤 형! 우리 숙소에 들어온 고딩들 잡혔어요?”
성격 급한 이서호가 제일 먼저 물었다.
“응. 방금 만나고 왔는데…….”
형은 인상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골치 아픈 일이 생겼나?
“무슨 문제 있어요?”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매니저 형은 날 지그시 보며 대답했다.
“문제……가 아주 많이 생겼어.”
“뭔데요?”
“익명의 사람이 우리 숙소 비번이랑 초소형 카메라를 세트로 저렴하게 팔길래 샀대. 너희 딥웹이라고 알아?”
그게 뭐지. 일단 내게는 생소한 단어라 고개를 저었다.
“헐. 딥웹에서 우리 숙소 비번 샀다고요? 애들이 겁도 없이 그런 델 들어갔대요?”
딥웹이 뭔데. 사이트 이름인가?
“위험한 짓을 했네…….”
정이한도 뭔가 아는 것 같은데 나만 모르나? 유일하게 말을 얹지 않는 강현 형을 봤지만, 언제나 그렇듯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어서 형이 아는지 모르는지 감도 안 왔다. 궁금한 내가 나서서 물어보는 수밖에.
“딥웹이 뭔데요…….”
매니저 형한테 물어봤는데 이서호가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우음.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못 가고, 특수한 웹브라우저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그러니까, 어. 우리가 쓰는 웹브라우저가 해수면이라면 딥웹은 심해 느낌?”
이서호, 너 낯설다. 비유 한 번에 이해가 되어 버렸다. 이서호의 뒤를 이어 정이한이 부연 설명을 해줬다.
“IP 추적도 안 되고, 해킹당하기도 쉽고. 무엇보다 불법적인 일들이 성행한다고 하더라. 사실상 범죄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보면 돼. 진짜 위험한 범죄자들. 예를 들면 살인청부업자 같은 사람들. 그래서 찾기도 어렵지만 찾아도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이야.”
“……그런 데서 우리 숙소 비번을 판다고요?”
그런 위험한 데까지 간단 말이야? 아니, 찾기도 어렵다면서 어떻게 알고? 내가 의아해하는 걸 눈치챈 건지 타이밍 좋게도 매니저 형이 설명을 해줬다.
“걔들은 그게 딥웹인지도 몰랐나 봐. 서칭으로 웹사이트 하나가 떴는데, 그쪽으로 접근하니까 주소 하나를 주더래. 거기가 딥웹이었던 거지. 처음에 접근했던 사이트도 없어졌고, IP가 해외라 추적할 수 없다네.”
그러니까 결론은 우리 비밀번호를 알아낸 누군가가 있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머리카락 한 올도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거구나. 게임으로 인해 잠시 무던해졌던 위험 신호가 다시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어쩐지, 저 비번 판 사람…….
“내 심증으로는 이연휘 같다. 애들한테 판 초소형 카메라가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형식인데, 숨겨진 라인이 하나 있었대. 그게 폐쇄된 딥웹이랑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고.”
매니저 형은 ‘이거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프겠어.’하고 중얼거렸다. 나도 딱 그렇게 생각하던 중이었다. 뭔가 저런 걸 한두 번 해 본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매니저 형. 혹시 범죄 이력 같은 건 못 봐요?”
그런 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과거에도 뭔가 얽혀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그 생각에 물어봤지만, 매니저 형은 고개를 저었다.
“범죄 이력은 깨끗할 거야. 그게 아니면 방송국에 다닐 수 없으니까.”
그건 그렇네……. 아, 진짜 골치 아프다. 뭔가 증거를 잡아야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릴 수 있을 텐데. 그 사람이 자백이라도 해주면 좋을……. 가만. 자백?
그 순간 내 머리에 번뜩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교주한테 확인해 보라고 하면 되잖아. 만약 이연휘가 스토커라면 소파남 때처럼 나를 향한 감정도 순식간에 끊어줄 수 있겠지.
교주랑 계속 얽히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다. 그냥 스킬 좀 빌린다고 생각하지 뭐.
……혹시 교주도 날 스킬로 생각하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스킬 써달라고 당당하게 부탁하던 걸 떠올려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렴 어때. 어차피 서로 필요할 때만 찾는 사이인데.
솔직히 교주의 회귀 목표가 뭔지 알게 되면 내용에 따라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해도 좋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딱 서로에게 필요할 때 찾는 이 정도 수준까지만 말이지.
“하온이 어디가?”
일어나는 나를 올려보며 정이한이 물었다.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가볍게 흔들어 보이곤 베란다로 나갔다. 멤버들이 따라오지 않는 걸 확인한 뒤, 혹시 멤버들이 나를 찾으러 올 상황에 대비해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섰다. 커튼 틈새로 거실 내부가 보이는 걸 체크하고 전화를 걸었다.
교주가 전화를 받으려나.
신호음이 길어져 음성 메시지로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통화가 연결되었다. 연습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휴대폰 너머 숨이 거칠었다.
- 헉, 후으, 뭡니까?
“연습 중이었어?”
문 닫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교주 주변의 소음이 사라졌다. 방음실이라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 곧 컴백이니까. 용건은?
잘됐네. 그럼 교주도 방송국에서 이연휘와 마주칠 수 있을 거 아냐. 이 정도면 타이밍은 꽤 완벽한 것 같았다.
“지난번에 스킬 써달라고 한 거 그거 도와줄게.”
- ……진짜야? 내키지 않는 것 같더니.
“공짜는 아니야. 내 일부터 해결해주면 도와줄 거야.”
- 이번에도 내가 먼저?
“나는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거든.”
- 난 아니라는 건가?
삐딱하게 들려오는 대꾸에 나는 웃음소리만 흘렸다. 아직 완전히 믿기는 힘들지.
- 그놈의 신뢰는 언제쯤 받을 수 있으려나.
“네 회귀 목표가 뭔지 알려주면?”
- 흐음. 일단 내가 뭘 해줘야 하는지부터 말해 봐.
회귀 목표가 뭐길래 이렇게 꼭꼭 숨기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궁금한 마음을 숨기고 이연휘에 관한 정보를 알려줬다.
- 뭘 확인해야 하는데?
“그 사람이 날 좋아하는지.”
- 왜?
“이유는 묻지 말고, 만약 날 좋아하고 있으면 날 봐도 아무 느낌 들지 않게 바꿔줘.”
- 사람 마음 바꾸는 게 쉬운 줄 알아? 매번 어려운 걸 간단하게 요구한다?
“할 수 있어? 없어?”
왜 이렇게 사족이 길어. 못 하면 안 된다고 하면 되잖아. 그럼 나도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볼 테니까.
- 해 봐야 알아. 감정 수준에 따라 다르니까.
“감정 수준?”
- 그래. 진지한 마음일수록 바꾸기 어렵거든. 억지로 하다가 내 스킬이 풀리면 역으로 내 말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니까.
그럼 이연휘한테는 손 쓸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교주가 나선다면 심증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기에 손해 볼 건 없어 보였다.
“상관없어. 안 되면 안 된다고 확인해주면 돼.”
- 하나만 물어보자.
어쩐지 진중한 목소리라 일순간 경계심이 치솟았다. 뭘 물어보려고 이러지? 하지만 교주의 질문을 들은 순간 긴장한 게 허탈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이번엔 급한 거 아니겠지?“어. 안 급해. 하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 흐음. 알겠어. 그리고 내 부탁 말인데.
“아, 어.”
교주는 그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 나도 오래 걸릴 것 같다. 쉽지 않네.
이전에 음식점에서 만났던 우아한 분위기의 세련된 남자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 사람 중요한 사람이야?”
교주의 회귀 목표 달성에 중요한 사람인지. 그게 궁금해서 슬쩍 떠봤지만…….
- 글쎄.
안 넘어오네.
-그보다 이연휘를 회유하고 떠보는 데는 한 달에서 두 달은 걸릴 거야. 나도 스케줄이 바쁘거든.
“뭐? 그렇게나?”
한 달에서 두 달이라니. 그건 너무 길잖아. 그 전에 스토커가 뭔 짓을 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스토커를 자극해서 우리가 붙잡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가드가 밀착 호위 중이라 스토커가 그 틈을 파고들 순 없을 것 같지만, 기다리면 충분히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 급하지 않다며?
“난 일 이주 생각했지.”
- 그건 무리야.
“한두 달은 너무 긴데……. 어쩌면 이번 아추대에 스탭으로 올지도 모르는데 그때부터 시작해도 비슷하게 걸려?”
교주는 고민이라도 하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 시도는 해 보겠는데, 모르겠다. 우리도 아추대 이외에는 컴백까지 종일 안무 연습이니까 어딜 다닐 수가 없어. 아이돌이 이렇게 빡센 줄 알았으면 안…… 아니다. 일단 기다려. 끊는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교주는 통화를 끊어버렸다. 아이돌이 빡센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라고? 그럼 이전 생에는 아이돌이 아니었단 뜻인데. 그렇다면 첫 번째, 두 번째 삶에서 실패한 뒤 고르고 고른 직업이 아이돌이란 의미였다.
아이돌이 회귀 목표에 도움이 된다? 디아스가 크는 것도 도움이 되고? 마지막으로 봤던 그 남자도 꽤 중요해 보이던데.
지금까지 알아낸 세 가지 힌트로 무언가 조합해 낼 수 있는 건 없는지 고민해 봤지만, 납득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진 못했다. 일단 그 남자가 누군지를 모르니 뭔갈 추리하려고 해도 추리할 수가 없네.
나는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물끄러미 보다가 거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