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거실에는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다들 이쪽으로 모여 있어.”
매니저 형이 우리를 한데 모았다. 나는 내가 느낀 안도감을 놓칠세라 정이한에게 딱 달라붙은 채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하온이 이렇게 겁먹은 거 처음 보는데…….”
정이한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나는 정이한의 팔을 한껏 끌어안은 뒤 팔뚝에 이마를 묻었다. 내 머리 위로 다정한 손길이 올라왔다.
“……누가 들어왔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무서워요. 설마 아직도 저희 숙소에 남아 있는 건 아니겠죠?”
내가 고개를 들며 불안하게 중얼거리자 이서호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악!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윽. 서호야! 팔 아파!”
“미안, 유찬 형…….”
우리를 거실에 모아 놓고 혼자 돌아다니던 매니저 형이 돌아왔다.
“사람은 없어.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은 다 뒤져봤다. 유찬이, 비번 바꿨어?”
“네.”
“멤버들한테 공유했고?”
“네. 톡으로도 안 남겼어요.”
“어. 고생했다. 경비 업체 불렀으니까 잠시만 기다리자. 그리고…….”
매니저 형은 우리를 향해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놀란 우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혀, 형. 왜 그래요?”
“미안하다. 이건 내 실책이야.”
“그건 아니죠. 스토커가 침입한 게 왜 형 잘못이에요?”
유찬 형이 매니저 형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매니저 형은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너희 팬 미팅에 신경 쓰느라 스토커가 흘린 단서도 못 찾았고, 팬 미팅으로 멤버들 전원이 숙소에 없으니 누군가 침입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어. 보안을 강화했어야 했는데 전부 내 잘못이고 실책이다.”
“정곤 형. 저희 숙소 비번 한 달 전에 바꿨어요. 이게 어떻게 유출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형 잘못이라고 볼 순 없죠.”
“유찬 형 말이 맞지! 우리는 팬 미팅에서 스토커가 뭔 짓 할까 봐 경계하고 있었잖아요. 숙소 생각 못 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요, 뭘!”
유찬 형과 이서호가 연달아 말했다. 매니저 형은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듯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경험이 많잖아. 내가 챙겼어야 해. 너희에게 이런 경험 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미안하다……. 면목이 없어.”
“매니저 형. 사람은 누구나 실수해요. 완벽하면 그게 로봇이지 사람인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하온아.”
“그리고 저 이제 안 무서워요.”
“야, 진하온. 이한 형 팔에서 손 떼고 말해 봐.”
이서호가 날 놀리며 낄낄거렸다. 저 녀석이! 정이한이랑 붙어 있으니까 괜찮은 건데!
“그러는 서호 형도 유찬 형 옷 잡은 거 놓아 보지 그래?”
“아! 나는 안 무섭다고 말 안 했거든? 난 무섭거든?”아, 저 초딩……! 하지만 너무 합리적이라 반박할 말을 못 찾는 게 문제였다. 이서호한테 말싸움으로 지다니. 나 지금 멘탈 좀 터진 거 아닐까?
그걸 증명하듯 정이한이랑 찰싹 붙어 있는데도 체력이 좀처럼 올라가질 않고 있었다. 간당간당하게 상태 이상 터지기 직전이라 더 이상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에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헉! 나 오늘 혼자 못 잘 것 같은데? 유찬 형…….”
“미안. 싱글침대다.”
“윽. 가, 강현 형!”
“…….”
강현 형은 조용히 고개를 피해버렸다. 이서호가 울먹이며 정이한을 바라봤다. 정이한은 내게 허락을 구하듯 날 봤다.
“전 괜찮아요.”
“아, 그럼 내 침대에서 재워줄게.”
“이한 형……!”
감격한 이서호가 과하게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눈 버렸어……. 나는 이서호에게서 시선을 피해 정이한을 올려 보며 말했다.
“그러면 이한 형은 저랑 자요…….”
지금 이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혼자 침대에 누워 있다가 상태 이상 터지면 어떡하냐고.
“……어?”
정이한이 놀라서 반문했다.
“크흠. 흠.”
강현 형의 헛기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고, 당황한 유찬 형이 날 불렀다.
“하, 하온아?”
“네?”
“그, 그러면 거실에서 다 같이 잘까?”
“전 그래도 좋아요.”
“나도!”
“그럼 우리 거실에서 자자!”
유찬 형이 안도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이한이 아쉬운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반응에 왜 형들이 왜 놀랐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아, 이거 좀 미안하네. 난 그냥 정이한이 내 룸메니까 아무 생각 없이…….
“푸흡.”
갑자기 매니저 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도 모르게 잠자리에 진심이 되어 매니저 형의 사과가 흐지부지 끝나 버렸네.
“진짜, 내가 디아스 매니저라 다행인 것 같다.”
“우리도 형이 우리 매니저라 좋거든요!”
이서호가 어깨를 쭉 펼치며 해맑게 웃었다. 형은 그런 이서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현관 도어벨이 울렸다. 보안 업체 사람들이었다.
보안 업체 사람들은 신기한 장비를 가지고 와서 여기저기를 탐색했다. 뭔지 물어보니 전파 탐지기와 렌즈 탐지기라고 했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카메라가 더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숙소를 샅샅이 살폈으나, 내 스킬에 걸리지 않은 카메라가 있을 리 없었다.
“얘들이라고?”
매니저 형이 휴대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만 들은 게 아닌지 멤버들 모두 미어캣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쭉 빼 들고 매니저 형을 살폈다. 형은 휴대폰에 집중하느라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형, CCTV에 범인 찍혔어요?”
결국 유찬 형이 물었다. 매니저 형은 그제야 우리에게 고개를 돌리며 휴대폰의 동영상을 보여줬다. 동영상 속에는 예상한 인물이 아닌 한 눈으로 봐도 어린 여학생들이 있었다.
“중딩? 고딩?”
이서호가 갸웃거렸다. 사복을 입고 있어서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는 건 어려웠다. 학생들은 미리 번호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바로 경찰서 가서 신고할 거야. 얼굴이 나와 있으니 찾는 데 오래 걸리진 않겠지.”
우리는 고개만 끄덕이고 더 말을 얹지 않았다. 하지만 범인을 확인한 후 나를 비롯한 멤버들의 표정은 한결 편안하게 바뀌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를 설치한 범인이 스토커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 좀 안심되었다.
그냥 평범한 사생이었잖아.
만약, 스토커가 없을 때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다면 훨씬 더 불쾌했을 테지만 스토커가 주는 공포와 불쾌감이 더 커서 사생들로 인한 불쾌감이 상쇄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보안 업체 사람들이 철수한 뒤 우리는 바로 거실에서 잘 수 있도록 가구를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잠자리 만드는 걸 도와준 뒤에 매니저 형은 허리를 쭉 펴며 현관을 향했다.
“범인 잡히면 바로 말해줄게. 그리고 당분간 내가 숙소에서 같이 지낼 거야.”
“……네? 형 어디서 자요?”
“소파.”
“오늘은요?”
매니저 형이 조용히 턱짓했다. 어쩐지 잠자리 까는 걸 도와주더라니. 의식하지 못한 사이 우리의 잠자리는 5인용이 아니라 6인용이 되어 있었다.
“일단 경찰서 다녀올게. 잠시만 너희끼리 있어. 알았지?”
“네.”
매니저 형이 숙소를 나간 뒤 우리는 어쩐지 멍해져서 아무 말 없이 이불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와중에 혼자 또렷한 눈동자로 무언가를 생각하던 유찬 형이 입을 열었다.
“매니저 형 없으니 지금 말해야 할 것 같다. 원래 이번 휴식기에 하온이랑 외출하려고 했었는데.”
유찬 형은 이서호를 의식한 건지 데이트 대신 외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상황에도 저걸 잊지 않고 있었다니. 저 형 데이트에 진심이었나 봐…….
“전부 취소야. 생각보다 위험해 보이니까 너희도 하온이 데리고 나갈 생각하지 마.”
“당연하지.”
“그리고 집에 다녀오는 건 한 명씩 교대로 다녀오자. 최대한 숙소에 많은 인원 남겨놓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나마 정곤 형이 같이 있어 준다니 좀 안심이 되네.”
맞아. 이연휘가 아무리 광인이라고 하더라도 매니저 형을 이길 순 없을 것 같았다. 근육 빵빵한 특수부대 출신 매니저가 이렇게 든든할 수 없다. 하지만…….
“매니저 형한테 좀 미안한데요…….”
든든한 것과 미안한 건 별개다. 같이 있으면 안심되겠지만, 집에 못 들어가는 형은 무슨 죄야. 다들 묵묵히 내 말에 동의했다.
“정곤 형한테 괜찮다고 할까?”
이서호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래, 비번도 바꿨고. 형들이 집에 다녀온다고 하더라도 건장한 남자들이 최소 세 명 이상은 남아 있을 테니까 괜찮겠지.
“나는 찬성.”
우리 의견을 듣던 유찬 형이 막 운을 떼려고 했을 때였다. 문밖에서 무거운 걸 내려놓는 듯한 쿵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잊고 있던 긴장감이 머리를 꽉 채웠다. 눈가가 뻐근해지고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온몸이 굳어 버렸다.
“내가 가볼게.”
일어나는 강현 형의 다리를 반사적으로 잡아 버렸다.
“가지 마요…….”
형은 허리를 숙여 내 손등을 토닥인 뒤 나를 떼어 냈다. 그리고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성큼성큼 현관을 향했다. 혼자 보내기가 무서워서 따라가려고 일어난 나는 유찬 형과 이서호에게 붙잡혔다.
“내가 갈 테니까 하온이는 여기 있어.”
나 대신 정이한이 움직였다. 정이한은 큰 보폭으로 뛰듯이 강현 형의 뒤를 쫓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강현 형이 밖을 내다봤다.
“에고, 미안해요. 옆집 청년. 제가 이걸 놓치는 바람에 시끄러웠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드릴까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석찬아! 석찬아! 엄마 좀 도와줘!”
“제가 옮겨드릴게요.”
“아이고,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죄송해요. 우리 아들놈이 또 컴퓨터 한다고 헤드셋 쓰고 있나 봐요. 하여간 저거 엄마 좀 도와주면 얼마나 좋아. 아, 이거 가져가서 친구들이랑 드세요. 시골에 사는 저희 엄마표 식혜거든요. 아유, 내가 욕심부려서 너무 많이 가져왔지 뭐예요?”
“괜찮습니다…….”
“드세요, 드세요. 진짜 맛있어요.”
열린 현관문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곤 형 있어야겠다.”
이서호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형한텐 미안하지만 나도 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