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27화 (227/320)

227.

“으아~ 집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 나간 이서호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평소에는 뭐라고 했을 유찬 형도 오늘만큼은 가만히 내버려 뒀다.

「서호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다들 잘 지켜봐. 상처 많이 받았을 거야.」

나는 유찬 형이 한 말을 곱씹으며 움직였다. 이서호가 벗어 던진 신발도 가지런히 정리해 주고 거실로 들어서자 이서호는 이미 소파에 엎드려 온몸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이대로 자고 싶다…….”

이서호는 소파 팔걸이에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새로 도착한 편지만 주고 갈 테니 일어나 봐.”

어쩐지 매니저 형이 숙소까지 따라 들어오더라니. 용건이 있었구나. 계속 늘어져 있을 것 같던 이서호가 편지라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편지요? 진하온 스토커?”

“맞아. 오늘 아침에 도착했는데 너희 집중력 흐트러질까 봐 말 안 하고 있었어.”

이리저리 산만하게 굴던 멤버들의 행동이 일순간에 멎었다. 팬 미팅이 끝나고 피로에 찌들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다들 소파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보여주세요.”

매니저 형이 안 주머니에서 빨간 봉투에 든 편지를 꺼내 들었다. 편지는 내게 제일 먼저 건네졌다. 내가 소파 가운데에 앉아 편지를 펼치자 나를 중심으로 양옆의 이서호와 정이한이 몸을 기울였다. 유찬 형과 강현 형이 소파 뒤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멤버들이 모두 편지를 볼 수 있도록 팔을 높이 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하온아.

아무래도 네 멤버들이 나와 너의 관계를 눈치챈 것 같아. 그게 아니라면 당연히 내게 너와의 관계를 과시하진 않을 거 아냐.

오해하지 마. 당연히 이번에 너를 만나서 무척 행복했어. 비록 우리의 첫 만남을 네가 기억하지 못해서 섭섭했지만...

그래도 난 괜찮아. 당연히 그런 건 내가 기억나게 해주면 되니까.

그리고 하온아.

내가 널 사랑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마. 나도 질투라는 걸 해. 너를 만지는 그 자식들의 손을 잘라버리고 싶어. 너와 대화를 나누는 혀를 뽑아버리고 싶어. 너를 바라보는 그 눈을 파내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 당연히 네가 슬퍼하겠지. 네가 슬퍼하는 일은 나도 당연히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빨리 우리들의 방으로 와.

곧 데리러 갈 때까지 널 보고 있을 거야. 사랑해.]

이 자식 진짜 곱게 미친 게 아닌데? 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멤버들에 대한 걱정이 치밀었다. 스토커가 내게만 손을 뻗을 거라고 생각해 안일하게 굴었다. 하지만 지금 내용을 보면…….

오히려 위험한 건 멤버들 아니야?

느긋하게 굴던 내 마음에 비상등이 번쩍거렸다. 우리 형들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리기만 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사실 이번 팬 미팅에 이연휘 씨도 왔었어.”

매니저 형은 우리가 고개를 드는 걸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상자에서 이연휘 씨 응모권을 뺐어. 혹시라도 뽑히면 곤란할 것 같아서.”

“편지 내용을 보면 이연휘 씨가 스토커 맞는 것 같네요. 지난번 녹음실 상황을 암시하는 내용이 꽤 있어요.”

유찬 형은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리다 내게 시선을 건넸다. 의견을 구하는 듯한 눈빛에 입을 열었다.

“첫 만남 기억 못 해서 서운하다고 했었던 것도 들어 있고요. 저도 그 사람 맞는 것 같아요.”

“그럼 가드분들한테 이연휘 씨를 각별히 주의해 달라고 말할게. 그리고 또 하나 전할 게 있는데…….”

유찬 형은 우리 눈치를 살피는 듯 멤버들을 찬찬히 훑어본 뒤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너희 내일부터 휴가잖아. 그런데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너희 이동할 때 가드분들을 동행하기로 했어. 그래서 좀 불편할 텐데, 괜찮겠어?”

“엥? 저희도요? 진하온만 그런 게 아니라요?”

이서호의 눈이 똥그래졌다.

“지금은 너희도 위험해. 이 내용 못 봤어?”

매니저 형은 입에 담기도 싫다며 문제의 문단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에이, 설마 진짜 그러겠어요? 그냥 화나서 하는 말이겠죠. 말로는 뭘 못 해요.”

이서호는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나는 멤버들이 순순히 가드분들의 호위를 받길 원했다. 진심이면 어떡해. 이 스토커가 정상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있어서 진짜로 형들을 공격하면 어떡하냐고.

“서호 형, 그냥 가드분들 호위받으면 안 돼? 나 불안한데…….”

“음.”

이서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가드 달고 집에 가면 가족들이 걱정할 게 뻔하잖아.”

“인기가 많아져서 팬들 때문에 회사에서 붙여줬다고 하면 되잖아.”

“어? 그러네? 천재냐?”

……네가 단순한 거야.

“그럼 전 문제 없음요!”

아니, 순진한 거라고 하자. 일단 이서호는 됐고. 나는 다른 멤버들도 싫다고 할까 봐 선수 치기로 작정하고 서둘러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형들도 가드분들이랑 다녀 주세요. 안 그러면 저 너무 걱정돼서 잠도 못 잘 거 같아요.”

멤버들은 내가 정신적으로 몰리면 몸이 나빠진다고 알고 있으니 통하겠지?

“그러면 안 되지. 너 제대로 못 쉬면 아프잖아.”

유찬 형이 제일 먼저 선뜻 오케이를 했다. 이어서 정이한도 끄덕였고, 강현 형은 조금 꺼리는 것 같았지만 내 필사적인 눈빛 공격에 금방 항복했다.

“……알겠어. 저도 가드 동행할게요, 정곤 형.”

이제야 좀 안심이네. 속으로 안도하고 있을 때 형들이 동시에 나를 불렀다.

“하온아.”

서로 눈빛 교환을 하는 듯하더니 유찬 형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네가 제일 문제인 거 알지? 너 또 혼자 미끼가 되네 어쩌네 하면서 몰래 도망치기만 해 봐. 가드분들한테 제일 보호 받아야 하는 건 너야.”

아, 이번엔 생각도 안 했는데 억울하다. 물론 살짝, 아주 쪼오금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하겠다고 마음먹진 않았는데!

“진짜 완전 얌전히 있을게요.”

일단 가드 배치 문제는 이대로 일단락되는 듯했는데 정이한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 다른 소린데요. 여기 이 문장 이상하지 않아요?”

“어디?”

정이한은 매니저 형과 유찬 형이 잘 보이게끔 들고 있던 편지를 눕혔다.

“널 보고 있겠다는 내용이요. 편지는 오늘 오전에 도착했다면서요?”

“어, 맞아.”

“그런데 그 사람이 무슨 수로 하온이를 지켜본다는 걸까요? 하온이 거의 외출을 안 하는데 어떻게요?”

그냥 하는 말 아닌가? 날 어떻게 보겠어. 끽해야 너튜브나 VOD에서 보겠지. 가끔 W라이브 할 때는 볼 수 있겠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는데 갑자기 매니저 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얘들아.”

“네, 네?”

“과한 생각이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 흩어져서 카메라 있는지 찾아봐.”

매니저 형은 곧바로 보안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우리 숙소의 CCTV를 확보해 달라는 말을 한 뒤 통화를 끊고는 거실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헐, 미친. 개소름.”

이서호가 진저리를 치며 카메라를 찾겠다고 매니저 형을 따라 거실을 뒤졌다. 하지만 내 예쁜 척 스킬이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만약 날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스킬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저희 숙소에 스토커가 어떻게 들어와요?”

“사생은 어떻게든 들어와. 그런데 스토커가 그걸 못할 것 같아? 하온이도 태평하게 굴지 말고 찾아봐.”

찾아도 없을 텐데. 나는 적당히 찾는 시늉을 하며 숙소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내 방으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예쁜 척 스킬이 날 담고 있는 카메라가 있다는 걸 알려줬다.

그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매니저 형의 말대로 여기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 생각이 든 순간 아늑하고 따뜻하게만 느껴지던 공간이 순식간에 낯설고 차가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내 감각에 의지해 숨겨진 카메라의 위치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한참 후, 나는 내 침대 옆 무드 등에서 숨겨진 카메라 렌즈를 찾아냈다. 내가 가장 잘 찍히는 곳.

“……징그러워.”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입술을 깨물며 무드 등을 노려봤다. 스토커의 더러운 감정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것 같아 만지고 싶지 않았다. 이걸 통째로 버려야겠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악!”

깜짝 놀란 내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카메라를 찾던 멤버들과 매니저 형이 헐레벌떡 내 방으로 쫓아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날 건드린 정이한이 놀란 얼굴로 굳어 있었다.

“미, 미안. 불러도 모르길래 건드렸는데 놀랄 줄 몰랐어…….”

정이한의 사과에 단순한 헤프닝인 걸 알아차린 사람들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안도하는 멤버들과 달리 나는 몸 안쪽부터 느껴지는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모두 사색이 되어 뛰어 들어왔다는 건,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숙소에 스토커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거잖아.

목덜미에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카메라뿐 아니라 누군가가 내 방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무서워. 이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어?

“무, 드등에서 카메라를 발견해서……. 놀라서 서 있었는데…….”

“유찬이 멈춰.”

매니저 형은 무드 등으로 다가가던 유찬 형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매니저 형이 직접 무드 등을 확인했다. 숨겨져 있는 작은 카메라 렌즈를 발견한 형은 곧장 손수건으로 렌즈를 가렸다. 그러는 동안 나는 뒤로 물러나 정이한의 팔을 꼭 붙잡았다.

“미안해요, 형.”

“아니야. 네가 왜 미안해.”

정이한은 괜찮다고 웃어 보이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그렇게 웃는 정이한의 미소도 평소와 달리 조금 굳어 있었다. 내 어깨를 잡은 정이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는 게 소름 돋고, 기분 나빴는데. 정이한의 온기를 느끼자 안심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