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저.”
내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응. 하온아!”
서호를 대할 때와 완전히 다른 맑은 미소와 경쾌한 대답. 그 이중적인 모습에 소름이 끼침과 동시에 하필이면 저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
이거 어떡하지? 내 악개였잖아. 내가 나서서 해결해버리는 건 이서호의 체면을 구기는 지름길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듯 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어디선가 간헐적으로 “내려가!”하고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까지 나오며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무대 밑에서도 소란스러움을 느낀 듯 당장이라도 보안 요원이 뛰어 올라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즐겁게 끝나야 할 팬 미팅에 좋지 못한 꼬리표가 달릴지도 몰랐다.
이 사람 진짜 날 좋아하는 거 맞아? 날 좋아한다면 내가 곤란해질 일을 벌이면 안 되는 거잖아. 어쩔 수 없이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 유찬 형이 내 앞을 막아서며 앞으로 나왔다. 형은 자연스럽게 나를 뒤로 물리며 나긋나긋한 미소로 무장하고 말했다.
“저, 죄송하지만 무대 아래로 내려가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왜? 나 지금 뽑힌 거잖아. 사진 찍으려고 올라왔는데?”
“그럼 서호랑 찍으시면 될 것 같아요.”
“그건 싫다고. 하온이랑 찍을래.”
대놓고 날 호명하는 말에 몸이 움찔거렸다. 정이한이 살포시 내 손을 잡아 왔다. 정이한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게 꼭, 너는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죄책감 가진 건 또 어떻게 알고…….
“그건 규칙에 어긋나요. 앞선 디어리 분들도 전부 규칙대로 따라줬는데 팬분만 특혜를 드릴 순 없어요. 특정 멤버를 유독 좋아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팬분을 위해 규칙을 바꿀 순 없어요.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유찬 형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상황 파악을 끝낸 디어리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 같이 “내려가! 내려가! 내려가!”를 연신 외치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나 악에 받친 목소리들이었다. 주변 여론이 좋지 않자 무대에 올라와 있던 팬분은 인상을 찌푸린 채 티켓을 유찬 형에게 던져 버리고 내려갔다.
내가 다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형에게 다가갔다.
“혀, 형. 미안해요.”
“하온이가 왜.”
형은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 나가 뽑기를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서호는 어떡하지? 하지만 이서호는 괘념치 않는 듯 오히려 더 밝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아, 형! 제가 또 뽑아도 돼요?”
유찬 형은 이서호를 탐색하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경쾌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도 되지.”
유찬 형의 대답은 방금 있었던 일을 암묵적으로 없었던 일로 취급하자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도 표정 관리에 힘을 쓰고, 가급적 이서호를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사이 이서호가 새로운 번호를 호명했고, 당첨된 디어리는 멀리서도 들리는 큰 목소리로 “앗싸아!”하고 외쳤다. 허겁지겁 올라온 디어리는 곧장 “서호야! 사랑해!” 하고 외친 뒤 허그를 요청했다.
“저도 사랑합니다!”
이서호가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디어리는 이서호를 꼭 끌어안은 뒤 “내가 지켜줄게!”하고 등을 토닥거렸다. 그걸 보는데 왜 내 눈이 다 시큰한지 모르겠다. 우리 디어리 진짜 너무 좋잖아…….
***
대기실에 들어올 때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던 매니저 형은 대기실 문을 닫자마자 노성을 터트렸다.
“아오! 진짜 뭐 그런 게 다 있냐!”
매니저 형이 눈에서 불을 뿜을 듯한 기세로 성을 내며 발을 굴렀다. 그런 매니저 형을 보는 이서호는 허허, 하고 웃는 신선처럼 어울리지 않게 웃고 있었다.
아, 신경 쓰여.
무대 위였기에 얌전히 굴었을 뿐인 줄 알았는데, 무대 밑으로 내려온 아직도 이서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아는 이서호라면 지금쯤 제일 크게 화를 내고 씨근덕거릴 사람인데…….
나는 이서호 근처를 기웃거리며 이서호가 속상한 마음을 숨기고 괜찮은 척하는 건 아닌지 자세히 살폈다.
“야, 진하온. 왜 자꾸 날벌레처럼 내 근처에서 기웃거리냐?”
“누가 날벌레야!”
“너 말이야, 너.”
짓궂게 웃으며 장난치는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이런 거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상처받지 않았을 리 없다는 생각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게 내 표정에도 드러난 건지 이서호가 불쑥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가 이러는 건 처음인데? 당혹감에 굳어 있었더니 앞에서 푸흡, 하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야, 그렇게 내가 걱정되냐?”
“……어.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내 입으로 이런 오글거리는 말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이서호는 좀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짓고는 내 머리에서 손을 거두어갔다. 그리고는 우리를 쭉 훑어본 뒤 무덤덤해 보이고 싶은 듯 표정을 갈무리했다.
“너랑 형들 덕에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진지한 이서호 모드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서호는 이내 제 양 팔을 벅벅 긁으면서 “으억! 오글거려!”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이서호를 보며 유찬 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웃어주는 분위기였지만, 나만 웃질 못했다.
마음의 상처, 그거 되게 무서운 건데. 이렇게 쉽게 묻어도 될까 싶어서였다. 이서호의 괜찮다는 말을 믿어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야, 진하온.”
“어, 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생각이 뚝 끊겼다. 그 탓에 대답이 한 박자 늦어지자 이서호가 검지로 내 코를 툭 하고 쳤다.
“걱정 안 해도 돼. 이 형님 멘탈 겁나 튼튼하니까.”
“으응. 그래도.”
나는 이서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언제든지, 무슨 말이든 좋으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다 들어줄게.”
내 진지한 태도에 날 보던 이서호가 뒷걸음질을 쳤다.
“형들! 진하온이 나 꼬셔!”
이 녀석이 뭐라는 거야!
“뭐? 하온아! 서호까지 꼬시면 안 되지!”
아니, 유찬 형은 그걸 또 왜 받아줘? 여기 매니저 형도 있고, 스태프분들도 있는데! 나는 대기실에서 뒷정리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하지만 우리를 보는 몇몇 스태프는 재롱부리는 손자를 보듯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굴어도 아무 일도 없다고? 편견이 진짜 무섭긴 하네.
“으하학! 진하온 표정 댕웃겨!”
“…….”
나는 내 표정이 어떤지 슬쩍 거울을 들여다봤다. 평소랑 똑같은데 뭐가 웃긴다는 건지 모르겠네. 낄낄거리는 이서호를 보니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었지만, 오히려 괜한 걱정이라 다행이었다.
***
[팬 미팅 악개에 대처하는 흔한 신인 남돌]
─ 찬리더 대처가 진짜 찐 리더감임. 일단 하온 악개로부터 하온이 숨기느라 뒤로 보낸것도 그렇고. 트집 잡을 수 없을 만큼 정중하고 완벽한 말빨로 악개를 막아냄ㅠㅠㅠㅠ 순두부가 제대로 탱킹했다ㅠㅠㅠ 저러니까 리더구나 싶어..ㅠㅠ
┗ ㄹㅇ... 신인 같지 않았음 진짜..ㅠ
─ 와 미친; 저기 올라가서 저런다고? 얼마나 넹글 돌아있으면 저래? 화가 나다 못해 얼척없네 ㅡㅡ
─ 유찬이 반응 진짜 소스윗...ㅠㅠ
┗ 솔직히 가드나 스텝이 끌어내릴 줄 알았다
┗ 2223333
─ 누가 우리 서호를 장꾸라고 했냐!!!
┗ 아 평소엔 장꾸가 맞는데 이럴 때 침착하게 대처하는 거 가슴 찡함..ㅠㅠ
─ 저거 하온 악개임. 하온이가 말 걸었다가 눈치챈 거 같은데... 그 뒤에 하온이 눈치보며 안절부절못하는 거 보여서 내가 다 속상했으뮤ㅠㅠ 진짜 ㅅㅂ 저 사람 어디 사는지 알면 진짜 가만 안 둔다. 뒤통수 조심해라 xx야!! 아 욕하고 싶어!!!!!!!!!ㅆㅂ!!!!!!!!!
─ 저 뒤에 서호가 뽑기 다시 했는데 그때 올라온 디어리 진짜 고마웠다..ㅠㅠㅠㅠ
┗ 나도나도 ㅠㅠ
┗ 저 팬 미팅 못 가서 그러는데 왜 고맙다는 건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ㅠㅠㅠㅠ
┗ 서호한테 사랑한다고 하고 안아 주고 지켜준다고 했어요!ㅠㅠ!!
┗ 헐...진짜 고마운 분이네요ㅠㅠㅠㅠ
─ 난 하온이도 진짜 대단한 거 같아. 원래 찬리더보다 하온이가 먼저 나섰던 거 같은데 자기 악개인거 알자마자 당혹스러워하잖아. 만약 저거 하온이가 악개 달래서 내려보냈으면 서호가 뭐가 됐겠어. 가뜩이나 하온이랑 서호 인기 차이가 좀 있는데 서호 맘이 좀 그랬겠지... 그거까지 다 그리고 빠진 거 같음..
┗ 하온이 추켜세우면서 은근히 서호 까는 거 ㅈㄴ 지능적이네 너가 저기 올라간 악개냐?
┗ 멤버들 줄세우기 하지 말라고
[제목] 하온이 학창시절 질문(오열하는 이모티콘) (댓글 999+)
이번 팬 미팅 진실게임에서 학창 시절에 즐거웠던 추억이 뭐냐는 질문이 나왔거든???
멤버들 다 즐거운 얼굴로 말하는데 하온이만 기억나는 거 없다고 함.. 그런데 문제는 그게 심지어 진실..ㅠ
근데 그 뒤에 디랑이들이랑 우리 디어리가 즐거운 거, 행복한 거 다 만들어준다고 하더라???
그거 진실 나온 거 보고 나 진짜 눈물 핑했어... 하온이 자퇴한 건 다들 알잖아
그리고 하온이 과거 사진 진짜 이상할 정도로 없잖아... 그거랑 뭔가 이어지는 느낌이라 갑자기 가슴이 막 미어터지는 거야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어 그냥 촉..?ㅠㅠ 나 같은 느낌 받은 사람 있을지 모르겠네
그냥 우리 깜찍 와기 요정 맬렁 고앵... 항상 행복해야만...
─ 걱정하지 마! 하온이한테는 형들도 있고 우리도 있다! 우리가 행복하게 해주자!!!
┗ 웅 그러자ㅠㅠㅠㅠ 절대 지켜!
─ 하온이가 지금 행복하다는 증거
(멤들한테 벌칙 나눔하는 깜찍한 하냥이.gif)
┗ 엌ㅋㅋㅋㅋㅋㅋㅋ 맞아 벌칙도 같이 받는 형들이 있따!!!
─ 근데 확실히 이상하긴 해 하온이 미모에 과거 사진 1도 없는건...
┗ 해외 유학파인가?
┗ ㄴㄴ 아님
┗ 하온이 데뷔전에 찍힌 거 카페 사진밖에 없지 않아?
┗ 맞아 그게 이상한 거지 저런 미모로 어떻게 과사가 하나뿐이야?
┗ 윗댓) 너 안티야? 저거 안티들이 하온이 성형설 루머 퍼트리면서 하는 소리인데?
─ 런앤런에서 하온이 놀이공원도 처음이라고 했었는데... 뭔가, 학교 다닐 때 추억 없다는 거랑 겹치는 느낌... 좀 쎄하지 않나? 뭔가 숨기는 것 같기도
┗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나도 딱히 추억은 없는데? 집 학교 도서관만 왔다 갔다 했는데 추억은 무슨. 너무 간 듯?
┗ 기어 잘박아라 급발진 ㄴ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