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25화 (225/320)

225.

나는 먼저 다른 형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형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걸 확인한 뒤, 검지를 입술에 세워 붙이며 윙크를 보냈다. 내가 뭔가 장난을 칠 거라는 걸 예감한 유찬 형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다음으로는 우리 디어리인데. 이미 나와 멤버들이 신호를 주고받는 게 스크린에 나와서 그런가 디어리들은 금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때마침 카메라까지 나를 풀샷으로 잡아줘서 나는 디어리에게도 똑같이 검지를 세워 입술에 붙이면서 살금살금 움직였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내 신호를 알아치리지 못했더라면 내 계획은 실패했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우리와 디어리 모두 한통속이 되어 이서호를 속이는 데 진심이 되었다. 나는 원래 있던 위치에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이서호를 속일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아, 진하온. 아직이야?”

“다 됐어.”

“형아가 너는 좀 봐줌. 살살할게.”

“그러다 나한테 진다.”

“헹. 내가 너는 이길 자신 있다!”

저 자식이 자꾸 사람을 허접하게 보네. 어디 두고 보자.

“준비됐지? 시! 작!”

봐준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이서호의 공격은 정이한과 할 때와 사뭇 달랐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더듬거리만 할 뿐, 팔을 휙휙 휘두르질 않았다. 거기에 내 공격을 피하겠답시고 허공에서 혼자 쉐도우 복싱하듯 상체를 요리조리 흔들고 있었다.

그게 너무 웃겨서 나는 필사적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멤버들이나 디어리가 웃는 건 괜찮아! 이전 경기에서도 그랬으니까 그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서 내가 웃으면 이상하잖아.

하지만 결국 내 입에서 푸흡,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가고 말았다. 그 웃음소리에 상황이 이상한 걸 깨달았는지 이서호가 안대를 벗어 재꼈다.

“으하하!”

이젠 웃음을 참지 않아도 돼! 나는 해방감을 느끼면서 시원하게 폭소를 터트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이서호가 얼굴을 물들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이내 내 이름을 외치면서 덤벼들었다.

“아! 어쩐지 이상하더라! 진하온! 가만 안 둬!”

“으하학! 미안, 아, 형! 잠깐, 흐흫흐!”

“너도 어디 당해 봐라!”

이서호가 도망치는 날 꽉 붙잡아 내 옆구리를 사정없이 간지럽히는 바람에 나는 허공에서 끊임없이 팔을 버둥거렸다.

“아, 아! 잘못했어! 형, 으힉, 간지러워, 간지럽다고!”

너무 웃어서 숨 쉬는 게 힘들어질 무렵이 되자 드디어 이서호가 내게서 떨어졌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헐떡거리며 다른 손으로 옆구리를 문질렀다. 아오. 아직도 뭐가 기어 다니는 것 같네!

“그럼 이거 누가 이긴 거지?”

“내가 이긴 거지!”

“무승부 아니에요?”

이서호와 내가 동시에 대답했다. 이서호는 ‘진하온은 반칙패지!’하고 매우 타당한 답을 내놓았지만, 나는 무승부로 물고 넘어졌다.

“형은 스스로 안대 벗었잖아.”

“그건 뭔가 이상하니까 그랬지!”

“하지만 안대 벗으면 원래 지는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이서호가 반박하려는 틈에 잽싸게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벗었고, 형은 도중에 벗었으니까 무승부!”

“어? 그, 그런가?”

“응.”

언제나 그렇듯 이서호는 내 기세에 대차게 말려들며 갸웃거렸다. 우리의 이런 모습이 익숙한 디어리들은 그저 좋은지 계속 즐거운 웃음소리를 들려줬다.

“그럼 최종 승자는 강현인가?”

유찬 형이 이렇게 해도 되는지 확신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디어리들은 강현 형의 경기를 강력하게 원했다. 심지어 그 상대로 나를 지목했다.

“강현, 하온!”

우리 둘의 이름이 계속 언급되자 강현 형이 나를 데리고 무대 앞으로 나섰다.

“꺄아아아!”

“가볍게 한 판 할까?”

“어…….”

강현 형이랑? 몸으로 하는 게임을? 가볍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알지만 디어리가 원하니까…….

“좋아요.”

아까와는 다르게 순순히 안대를 받아 쓰고 나니 진짜 소리만 들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근데 강현 형을 어떻게 이기지? 이리저리 시뮬레이션 해 봤지만, 도저히 답이 안 나왔다. 뭐가 보여야 계획을 세우지. 그냥 이길 생각을 접자. 지더라도 멋지게. 그걸 목표로 삼자.

“준비, 시! 작!”

그래도 허무하게 나가떨어질 순 없으니 공격이라도 해볼까.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잖아. 나는 일단 되는대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강현 형의 가슴으로 추정되는 곳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순간, 형이 내 팔목을 잡더니 훅 잡아당겼다. 속절없이 끌려간 나는 형에게 폭삭 안긴 채 황당함에 입을 뻐금거렸다. 이거 반칙 아냐? 반칙이잖아!

“백강현, 반칙패!”

유찬 형의 깔끔한 판정에 강현 형이 나를 놓아줬다. 이기긴 이겼는데 찝찝한걸…….

“강현아?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처음엔 제대로 하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강현 형은 머쓱하게 웃으며 날 보고 말했다.

“안 보여서 힘 조절 못 할까 봐.”

“……제가 그렇게 허약해 보여요?”

“내 힘이 세잖아.”

상대적 허약함 인정합니다. 강현 형 앞에서 누군들 약하지 않으리.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강현 형은 거기서 굳이 한 마디를 더 얹었다.

“뒤로 넘어가서 머리라도 다치면 어떡해. 안 보여서 잡아주지도 못하는데.”

“……형, 그렇게 말하면 디어리가 오해하잖아요!”

“디어리도 하온이 저질 체력인 거 다 알 텐데.”

“네!”

“알지!”

“하온이 절대 지켜억!”

디어리들의 대답은 다양했어도 결국 공통점은 하나였다. 내가 저질 체력은 맞지만,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건 아닌데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드는걸…….

***

우리가 준비한 무대도 전부 끝나고, 아쉽게도 마지막 이벤트만 남은 상태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불투명한 상자가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상자에서 번호를 뽑을 거예요. 당첨된 디어리는 무대로 올라오셔서 번호를 뽑은 멤버에게 소원을 말해주세요. 그럼 멤버들이 그 소원을 들어드립니다! 단, 과도한 신체 접촉은 안 되는 거 아시죠?”

“네에!”

디어리에게 뭐든 해주고 싶었던 우리는 디어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이벤트 시간을 늘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했고, 그 덕에 이 이벤트는 꽤 긴 시간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다.

유찬 형부터 번호를 뽑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디어리가 무대로 올라왔다.

“유찬아, 안녕!”

“안녕하세요!”

“나랑 사진 찍고, 허그 부탁해도 될까?”

“안돼에에엑!”

“악! 유찬아!”

“부러워어어엌!”

여기저기서 디어리의 원성이 가득했다. 유찬 형은 화사하게 웃으며 무대에 올라온 디어리와 사진을 찍은 뒤 허그까지 마쳤다. 자긴 이제 죽어도 좋다는 디어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거리며 내려갔다.

이어지는 디어리들의 소원 중에서 그다지 특이한 건 없었다. 대부분 사진과 허그. 가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은 악수를 요청하기도 했다.

“저기…….”

“네!”

나는 주저하며 내 눈치를 보는 디어리에게 뭐든 괜찮다고 대꾸해줬다.

“강현이랑 하온이 투 샷이 갖고 싶은데…….”

“아, 저랑 형이랑요?”

“응응. 나랑은 안 찍어도 되는데 그냥 두 사람 사진이 갖고 싶어. 이런 것도 될까…….”

디어리는 고개를 숙이고 자꾸 내 눈치만 살폈다. 나는 바로 강현 형을 끌어당겨 내 옆에 세웠다.

“당연하죠! 이렇게 서면 될까요?”

디어리는 부끄러워하면서 할 말은 다 했다.

“조, 조금 더 붙어서. 강현이가 하온이 어깨동무해주고, 하온이가 강현이 허리 잡……아서.”

“음? 조금 더 붙어요?”

그때 강현 형이 뒤에서 내 감싸 안고 어깨에 턱을 걸쳤다. 이거 정이한이 자주 하는 건데. 이미 익숙해진 나는 별생각 없이 디어리만 바라봤다.

“형, 옆으로 서야…….”

“헉! 미친, 너무 좋, 악, 미안.”

아니네. 이거 좋아하네. 나는 머쓱하게 웃다가 카메라가 우리를 향하는 걸 보고 방긋거렸다. 카메라 연사 셔터 소리가 들리고 디어리는 지금 이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밝게 웃었다. 연신 고맙다고 꾸벅거린 디어리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환하게 웃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 뒤로 유독 나와 멤버들의 투 샷을 요구하는 디어리가 늘어난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디어리도 좋아하고, 멤버들도 즐거워하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팬 미팅은 평화롭게 마무리되어가는 것 같았다.

“저기. 서호야.”

“넵!”

“이거 한 번 뽑히면 끝인 거지?”

조금 신경질이 묻어나는 듯한 어조에 어딘지 싸한 기분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서호의 앞에 선 디어리가 익숙한 눈빛으로 서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저 눈빛 알아. 전생에 숙소 앞에서 대기하던 사생들이 날 봤을 때 바로 저런 눈빛이었다.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이서호를 보고 있을 때였다. 이서호도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듯 몸을 바르게 세우며 “네. 맞아요.”하고 대답했다.

“하, 시이발. 하필 네가 왜 날 뽑아. 이도 저도 아닌 멤이면 알아서 빠져야 할 거 아냐.”

중얼거리는 소리는 그리 작지 않았다. 그건 꼭 이서호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깜짝 놀란 나는 이서호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서호는 표정 변화 없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침착하게 행동하는 건 다행이지만, 그런 이서호의 모습에서 전생의 내 모습이 보였다. 널 기다린 게 아닌데 왜 네가 기어 나오냐고 타박하던 사생들의 말을 못 들은 척 지나갈 때 내가 저랬었다.

나도 저런 말에 익숙해지는 데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자라 남들에게 좋은 말만 듣는데 익숙한 이서호에게는 지금 저 말이 큰 상처일지도 몰랐다.

어떡하지? 저 사람 악성 개인 팬인 것 같은데. 누구 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빨리 넘겨야 할 것 같았다. 이서호가 더 상처받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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