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내가 고민하는 사이 강현 형에게 순서가 돌아갔다.
“다들 하온이를 골랐으니 저는…….”
형은 한 번 뜸을 들인 뒤 멤버들을 쳐다봤다. 유찬 형이 예쁜 척 눈썹을 들썩거렸고, 정이한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이서호는 꽃받침까지 만들어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강현 형이랑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그냥 얌전히 있었다.
“하온이요.”
“아, 지금 우리 농락당한 거?”
유찬 형은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눈을 홉떴다.
“하온이만 액션이 없길래 뽑았지.”
“이게 또 그렇게 되나?”
“그렇게 되지.”
유찬 형은 속아 넘어 준다며 다음 멤버인 이서호를 불렀다. 이서호는 진심으로 고민이 되는 듯 우리를 한 명, 한 명 눈에 담았다.
“저는……. 으윽. 저도 하온이.”
“뭐?”
진심으로 놀란 내가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디어리들의 함성 속에 이서호가 민망한 듯 손끝으로 눈꼬리를 긁적였다.
“소거법으로 하온이 골랐어. 유찬 형은 자상하지만, 리더 형이라 뭔가 애인 삼으려니 기분이 묘하고, 이한 형은 너무 얌전해서 나랑 사귀면 형 기가 쪽쪽 빨릴 것 같고, 강현 형은 그냥 무섭고. 그럼 남은 건 만만한 하온이.”
이서호한테 나는 만만한 인간이었군.
“내가 무서워?”
강현 형의 물음에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그에 이서호가 방긋 웃었다.
“아니, 아니. 형이 항상 무서운 건 아니고 우리 춤 가르쳐줄 때는 무섭지!”
“그건 인정.”
같이 호되게 교육받는 정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형은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그럼 어쩔 수 없지.”하고 한 발 뺐다. 이럴 땐 보통 다음엔 상냥하게 해준다고 말하지 않나?
어쨌든, 이서호의 거짓말 탐지기도 진실을 말했다. 이로써 멤버들 전원이 줄줄이 진실을 말한 와중에 나만 남았다. 거짓말 탐지가 다시 내게 왔다. 나는 누굴 고르지…….
“음. 저는…….”
형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쳐다봤다. 그냥 게임일 뿐인데 왠지 다들 내 대답에 큰 의미 부여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 식은땀이 흘렀다. 이럴 땐…….
“저는 서호 형이요.”
“나? 진하온 너 나한테 마음 있었어?”
이서호가 급발진하며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뭐라는 거야. 나도 마찬가지로 소거법이었다. 나한테 고백 안 한 사람은 이서호뿐이란 말이야. 호들갑 떠는 이서호와 다르게 형들은 내 대답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제일 만만한 사람으로 골랐지.”
“내가 만만하냐?!”
“형도 그렇다며!”
만만한 건 사실이었지만, 질문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고른 거라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려서 콩닥콩닥한 불안한 마음으로 판정을 기다렸는데…….
“앗, 따가!”
순간적으로 손이 찌릿찌릿한 약한 전류가 흘렀다.
“와, 진하온. 나 만만하단 건 거짓말이었구나?”
이서호는 되려 기분이 좋은지 입술 끝을 움찔거렸다. 뭔데 이거 자존심 상하지? 형들은 이 상황이 그저 재밌는지 크게 웃고 있었다.
“역시 서호 형한테 나는 과분한 사람인가 봐.”
“그 반대겠지.”
“응. 아님.”
나는 헛소리를 하며 저릿한 손을 탈탈 털었다. 전류가 약해서 저린 느낌은 금방 없어졌지만, 바구니에 가득 담긴 레몬을 보니 심란했다.
……나 혼자만 레몬 벌칙이야?
나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린 채 자꾸 침을 고이게 하는 레몬을 바라봤다. 보기만 해도 셔…….
“하온아. 레몬은 몸에 좋은 거야.”
유찬 형이 위로하듯 말을 건넸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반으로 잘린 레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유찬 형.”
“응?”
“이거 정말 몸에 좋은 거예요?”
“당연하지. 비타민 C가 풍부해서 감기도 예방해주고, 피부 트러블에도 효과 있고, 구연산 성분이 있어서 피로 회복에도 좋아.”
“그래요……?”
유찬 형은 순진한 눈망울로 “그럼.”하고 대답했다. 나는 아예 레몬 바구니를 들고 형들을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몸에 좋은 건 다 같이 먹어야죠.”
나는 제일 먼저 유찬 형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유찬 형은 씁, 하고 침을 삼키며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나는 그런 형의 품에 바구니를 밀어 넣었다.
“같이 안 먹어 주실 거예요?”
“……아, 아니. 이건 벌칙이고…….”
“저 혼자 먹어요……? 몸에 좋은 건데…….”
유찬 형은 난감하다는 듯 눈을 끔벅이다가 결국 ‘어휴.’ 하는 한숨 소리와 함께 레몬 한쪽을 들었다. 다들 나한테 약한 걸 아니깐 지금 내가 영악하게 군다는 자각은 있지만, 애초에 내가 이서호를 고른 이유는 형들 때문이잖아!
“나도 하나.”
정이한에게는 아직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정이한은 알아서 레몬 한쪽을 가져갔다. 나 못지않게 레몬을 먹지 못하는데도 쿨하게 가져가는 정이한을 보고 조금 감동 받았다. 가끔 이상한 고집을 부려서 그렇지 나한테 제일 약한 건 정이한 같기도 해.
“나도 먹을게.”
신 걸 잘 먹는 강현 형은 편안한 얼굴로 레몬을 가져갔다. 남은 건 이서호인데, 이서호는 두 손으로 입으로 막은 채 결의에 찬 눈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서호 형도 몸에 좋은 레몬 한쪽 해야지?”
“아니! 애초에 진하온 혼자 먹는 거였잖아! 형드을!”
“어쩔 수 없잖아. 하온이가 같이 먹어 달라는데…….”
유찬 형은 연신 침을 꼴딱 삼키며 손에 쥔 레몬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우! 진짜 우리 형들 때문에 내가 못 살아!”
결국 이서호도 내 바구니에서 레몬을 가져갔다. 모든 멤버들에게 레몬을 하나씩 쥐여준 뒤에야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내 몫의 레몬을 챙겼다.
으…….
고통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한 사람 누구야? 전혀 아니잖아. 내 몫의 고통은 결국 오롯이 나만의 몫이었다.
나는 혀만 삐죽 내밀어 레몬의 맛을 보고는 치를 떨었다. 부르르 떠는 날 보고 디어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왜 나만 풀샷 잡는 건데! 나는 서둘러 표정을 관리하고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허세를 부리며 레몬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하지만 내 빛나는 연기력 스탯도 일그러지는 표정을 잡아줄 수는 없었나 보다. 표정 관리고 뭐고 나는 발을 동동거리며 시디신 침만 꼴딱꼴딱 삼키며 울상을 지었다. 물고 있으면 있을수록 고통이라는 건 알지만 이거 넘기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몇 번 씹지도 않은 레몬을 억지로 목구멍에 밀어 넣은 뒤 다급히 물을 찾았다.
“하온이 귀엽다!”
사람이 고통받는 걸 보고 귀엽다니…….
“우리 막내 진짜 귀엽죠?”
“네!”
“유찬이도 귀여워엌!”
“하하하. 감사합니다! 저 귀엽게 봐주는 건 우리 디어리밖에 없어요.”
유찬 형이 디어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레몬 먹은 충격이 채 가시질 않아 뒤에서 물만 마시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유찬 형이 다음 게임을 언급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레몬을 먹을 순 없어!
[안대 쓰고 손바닥 밀치기 게임]
스크린에 뜬 게임 이름을 보자 자연스레 고개가 강현 형에게 돌아갔다. 형이 맞췄네?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디어리들이 왜 멤버들 전부 강현이를 보냐며 질문이 쏟아졌다. 유찬 형이 디어리에게 설명해주는 사이 사이드에 있던 나는 무대 가장자리로 이동해 안대 두 개를 받아왔다.
“아, 그럼 이번엔 지목으로 할까요?”
“지목!”
디어리들의 의견을 따라 우리는 유찬 형부터 지목을 통해 상대를 정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안대를 들고 나선 유찬 형은 멤버들을 쭉 본 뒤 정이한을 지목했다.
두 사람은 가까이서 마주 보고 선 뒤 안대를 착용했다. 뭔가 재밌을 것 같은데?
“준비! 시! 작!”
우렁찬 이서호의 신호에 따라 동시에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듯 스쳐 지나간 손은 거리가 가까운 탓에 양쪽 다 상대의 가슴에 정확하게 닿아 서로를 뒤로 밀어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둘 다 예상하지 못했는지 유찬 형과 정이한은 곧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앞뒤로 팔을 빙글빙글 돌리며 꿀렁대던 두 사람은 이윽고 서로를 포옹하듯 끌어안으며 균형을 잡았다.
“악!”
비명은 양쪽 모두에게서 터져 나왔다. 둘 다 서로를 밀어냈지만, 유찬 형이 먼저 뒤로 반 발짝 물러났다.
아쉬워하는 유찬 형이 자리로 돌아가고, 승리한 정이한은 별다른 고민 없이 다음 상대로 이서호를 지목했다. 한쪽 팔을 빙빙 휘두르며 나선 이서호의 표정은 악동 그 자체였다.
“형, 너무 멀리 날아가지 않게 조심해!”
“그 정도는 아니야.”
“히힛.”
“준비됐으면 시작한다. 시! 작!”
유찬 형의 신호와 거의 동시에 이서호가 팔을 쭉 뻗었다. 하지만 정이한은 앞선 경기에서 뭔가를 깨달은 듯 갑자기 허리를 뒤로 접어 버렸다. 덕분에 이서호의 팔은 허공을 할퀴었고, 탄력을 받아 허리를 다시 세운 정이한은 이서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뭔가 이번엔 그럴듯한 경기가 되는 것 같은데? 예상이랑 다른걸. 나는 꽤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의 경기를 지켜봤다. 승패는 두 사람의 코어 힘에 따라 갈린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뒤로 젖혔지만 멀쩡하게 일어난 건 이서호 혼자였다.
“아……. 아쉽다.”
정이한이 떨어져 버린 제 발을 물끄러미 보다가 내 옆으로 돌아왔다. 이서호는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안대를 벗었다. 디어리를 향해 방정맞은 브이를 선보이며 방긋거리자 스크린에 이서호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잡혔다.
“이제 내가 지목하면 되나?”
이서호는 허리에 팔을 턱 올린 채 짓궂은 미소와 함께 “진하온, 나와!”하고 내게 검지를 까딱거렸다. 저게 또. 강현 형은 못 이길 것 같으니 날 고른 게 뻔히 보인단 말이야. 하지만 앞선 게임을 지켜본 바로는 내가 이서호를 이길 것 같지도 않은데.
“왜 나야?”
내가 볼멘소리를 내자 이서호는 “최종 보스는 마지막이지!”하며 강현 형에게 딱 기다리라고 선전포고했다. 나는 프리패스다, 이건가?
뭔가 반전을 꾀할 방법이 없나 고민하며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이서호는 벌써 안대를 쓴 뒤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 순간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라 나는 흡족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