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공기를 찢을 듯한 디어리의 함성에 피부가 따끔할 지경이었다. 기분 좋은 고양감을 느끼며 나는 무대 가장자리까지 달려가 디어리들에게 반가움을 한껏 표현했다.
두 팔을 번쩍 들고 마구 팔을 흔들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내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어 날 질질 끌고 무대 중앙으로 데려갔다. 유찬 형이었다.
“반가운 건 알겠는데 인사부터 하자, 하온아.”
마이크를 타고 울리는 목소리에 디어리들이 폭소했다. 원래 이런 광기 담당은 이서호였는데, 뭔가 꼭 콘서트 같아서 너무 들뜬 상태라 나도 모르게 폴짝거렸네.
“앗, 맞아. 그랬죠!”
디어리들이 또 한 번 웃어주는 사이, 반대편에서는 강현 형에 의해 이서호가 질질 끌려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서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우리는 서로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둘이 그렇게 좋아?”
그냥 둘 다 끌려 들어온 모습이 웃겨서 웃은 거였는데, 유찬 형이 조금 오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또 아니라고 하기엔 좋다 못해 또다시 폴짝거리고 싶은 게 사실인지라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형은 안 좋아요?”
점잔 빼듯 얌전히 굴던 유찬 형이 별안간 입술을 쭉 끌어 올렸다.
“너무 좋지!”
그 목소리에는 설렘과 흥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며 즐거워하는 디어리가 그런 우리의 모습에 또 한 번 함성을 내지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빨리 인사부터 하자.”
유찬 형의 채근에 우리는 잽싸게 주르륵 늘어섰다. 그리고는 형의 신호에 맞춰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디아스입니다!”
“꺄아아악!”
“얘들아앜! 사랑해앸!”
90도로 접었던 허리를 쭉 펴고 정면을 봤다. 우리만을 위해 반짝이는 별들이 은하수처럼 한데 모여 장관을 연출했다. 황홀한 광경이었다. 쿵쾅대는 심장이 온몸의 혈관을 따라 전율을 흘리는 것 같았다.
“그럼 바로 첫 번째 무대 시작하겠습니다. 저희를 지금의 저희로 있게 한 곡, 우리들의 첫 시작. ‘Dear.’ 입니다!”
유찬 형의 외침과 함께 우리는 얼른 흩어져 대형을 만들었다. 무대 뒤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봄 느낌이 물씬 나는 거리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전주가 시작되었다. 나는 인이어 한쪽을 몰래 살짝 뺀 상태였다. 디어리의 함성을 선명하게 듣고 싶어. 그런 내 마음이 닿은 건지 여느 때보다 쩌렁쩌렁하게 응원하는 디어리의 목소리에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
어느새 팬 미팅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앞선 무대들은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퀄리티를 선보인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팬 미팅은 무대를 하나 하고, 다음 무대를 진행하기 전 숨을 돌릴 겸 디어리와 토크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번에는 멤버들 모두 궁금해했던 디어리가 뽑은 게임을 할 차례였다. 유찬 형이 게임 내용을 알려달라고 외치자 스크린에 글자가 드러났다.
[진실 게임]
그와 동시에 스태프분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순식간에 세팅을 마치고 내려갔다. 무대에는 우리가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는 핸드 마이크, 거짓말 탐지기, 그리고 반으로 잘린 레몬이 든 바구니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입 안에 신맛이 돌아 쓰읍, 하고 침을 삼켰다. 그런데 그게 마이크로 잡혀 버렸다. 인이어 마이크가 오프 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당황한 내가 헉, 하고 숨을 들이쉬쉬자, 그 소리까지 고스란히 들어갔다.
“푸흡, 하온이 신 거 못 먹지?”
“……네. 저 진짜 쥐약이에요.”
나는 레몬을 보며 치를 떨었다. 저걸 어떻게 그냥 먹어? 저건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니다.
“진하온 초딩 입맛이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나를 매도하는 이서호를 노려봤다.
“그걸 서호 형이 말해? 아직도 당근이랑 파 골라내는 사람이 누구더라?”
이서호는 도리어 뻔뻔하게 가슴을 쫙 펼치고 외쳤다.
“내가 성인이 된 건 먹기 싫은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서인데!”
여기저기서 디어리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서호는 우리 디어리가 웃었으니 됐다며 뿌듯해했다. 어이없어서 헛웃음 치는 건 나뿐이지.
이서호랑 투닥거리고 있었더니 유찬 형이 게임 진행을 위해 상황을 정리했다. 우리는 유찬 형이 시키는 대로 착실히 핸드 마이크를 하나씩 쥔 채 의자에 앉았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는 모두 고개를 뒤로 돌려 스크린을 봤다.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잘생겼다고 생각한 적 있다? 없다?]
질문을 보자마자 이서호가 자신 있게 나서서 거짓말 탐지기에 손을 얹었다.
“나부터 해도 돼?”
“어어.”
유찬 형이 허락하자 이서호는 곧장 자신만만한 얼굴과 목소리로 당당하게 외쳤다.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을 알리는 벨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이어서 유찬 형과 강현 형도 ‘있다.’에 진실이 나왔다.
“그럼 제 차례인가요?”
정이한이 앞으로 나섰다. 잠시 고민하던 정이한은 “없어요.”하고 대답했다. 정이한 잘 생겼는데 왜 본인은 모르지? 그냥 레몬 먹으려고 대답한 건가. 아닌데. 정이한도 신 거 못 먹는데? 하지만 거짓말 탐지기는 정이한의 대답을 ‘진실’로 판명했다.
“이한 형 진짜 한 번도 없어요?”
그 얼굴을 하고? 우리 멤버들 다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데? 정이한은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끄덕거렸다.
“와, 이한 형, 제대로 기만자네. 형은 그런 생각 하면 안 되지!”
정이한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그걸 놓치지 않은 이서호가 또 신나게 놀려댔다.
“이제 제 차례죠?”
정이한을 구하기 위해 내가 앞으로 나섰다. 솔직하게 대답하자면…….
“저도 눈이 있어서 저 잘생긴 건 알아요.”
조금 뻔뻔해도 되겠지. 거짓말 탐지는 당연히 진실로 나왔다. 나는 양심이 있는 사람이다.
***
팬 미팅이라 그런지 이어지는 진실 게임의 질문들은 전부 무난한 것들이었다. 그냥 평소에 디어리가 우리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묻는 자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레몬을 하나도 먹지 않아서 안도하고 있을 때였다. 스크린에 뜬 새로운 질문을 보고 나는 당황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학창 시절 가장 즐거웠던 추억은?]
없는데? 그런데 없다고 해서 진실이 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 기억을 마구 뒤적거려봤으나 당연하게도 떠오르는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장면들만 스치고 지나가 떫은 과육이라도 베어 문 것처럼 그새 입이 썼다.
“시험 기간에 저희 집에서 친구들이랑 공부한 적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가장 즐거운 추억 같아요.”
유찬 형의 대답에 단번에 ‘우우!’하는 야유가 쏟아졌다.
“어? 진짠데요.”
띠띠띠,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거짓말 탐지기가 진실 판명을 냈다. 유찬 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순식간에 디어리들이 조용해졌다. 이런 반응 처음인데? 그게 너무 웃겨서 조용히 웃어버렸다.
정이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작곡하고 랩을 할 때가 즐겁다고 말해서 진실을 받았고, 강현 형도 초등학교 때 처음 춤을 배웠는데, 그 뒤로 춤을 출 때 가장 즐겁다고 말한 뒤 진실을 받았다.
“전 수학여행이요!”
이서호가 수학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드는 사이 나는 조급해졌다. 뭐라고 대답하지. 진짜 머릿속이 텅 비어서 뭐라고 말해야할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멤버들에게는 쉬운 질문인데 내게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고민하고 있던 사이 이서호의 이야기가 끝났다.
“자, 다음은 진하온!”
내게 내민 거짓말 탐지기 위에 손을 얹은 뒤 나는 숨을 골랐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차라리 레몬 하나 먹을 각오하고 거짓말할까? 그런데 이걸 거짓말해도 되는 거야?
"하온아?"
아, 너무 오랫동안 아무 말도 안 했나 보다. 유찬 형이 날 부르는 소리에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음. 사실 기억에 남은 게 없네요.”
“엥? 진짜? 하나도?”
“응. 떠오르는 게 없는데…….”
학창 시절 싫었던 기억이라면 몇 개라도 댈 수 있지만 말이지. 그래도 나 같이 나이 먹고 학창 시절 추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지금의 내 나이가 아직 19살이라는 걸 떠올렸다.
아, 그냥 데뷔한 게 즐거운 추억이라고 할걸!
전생이랑 달리 나 10대 때 데뷔한 거잖아. 하지만 이미 말은 뱉어 버린 뒤였기 때문에 얌전히 거짓말 탐지기의 판정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헐, 진실? 진짜 없어?”
“응. 왜냐면 내게 행복한 추억은 전부 우리 멤버들이랑 디어리가 만들어주는 중이거든.”
그렇게 대답하면서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동시에 거짓말 탐지기가 다시 내 대답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이서호가 버튼을 누른 탓이었다. 이것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나는 굳이 손을 떼지 않고 진실 판정을 기다렸다. 판정이 뜨자마자 디어리들이 꺄아아아, 하고 환호했다.
“우리 디어리! 사랑해요!”
“우리도 사랑해!”
디어리의 화답이 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게 너무 좋아서 헤실헤실 웃으며 거짓말 탐지기를 유찬 형 쪽으로 밀어줬다. 잘 넘어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서호 덕분에 무난하게 넘긴 것 같아.
“아, 벌써 마지막 질문이네요.”
유찬 형이 스크린을 보며 말했다.
[이 멤버가 여자라면 연애할 수 있다!]
“아, 이거 쉽다. 하온이요. 제일 예쁘니까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아서요.”
유찬 형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단숨에 말해버렸다. ……이서호 빼고 다 나 뽑을 것 같은데. 그, 그래도 되는 거겠지? 조금 불안감이 들어서 괜히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생수로 목을 축이는 사이 유찬 형의 대답은 ‘진실’ 판정을 받았다.
정이한은 “저도 하온이! 하온이가 여자라면 당장 고백할 생각이에요.”라고 말한 뒤 진실을 받았다. 그 탓에 디어리들의 비명이 한층 높아졌다. ……지난번 토크쇼에서도 그러더니 의외로 사람들이 의심을 안 하는 것 같단 말이지. 사회적 편견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나는 누구를 고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