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유찬 형은 팔짱을 풀고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와서 잠깐 사이 다시 흘러내린 내 셔츠를 추켜올려준 뒤 말을 이었다.
“하온이가 뭘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하지만 연휘 씨가 정말 네 스토커라면 너와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게다가 네가 스케줄 없을 때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는 온 디어리가 다 알아. 그런데 오늘 갑자기 이런 식으로 입는다면 오히려 본인이 특별하다고 착각할 수도 있어. 이 코디는 네게는 오히려 독이야.”
“으음.”
유찬 형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내가 또 너무 한 쪽 면만 보고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스토커를 착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거, 그걸 생각 못 했네. 나는 내 옷을 물끄러미 내려보며 갈아입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그때 강현 형이 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확실하게 하고 싶다는 거지.”
“아.”
“그럼 내가 코디해 줄 테니까 따라와.”
어……?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울었던 나는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강현 형의 뒤를 따랐다. 그런 나를 따라 정이한과 유찬 형도 다 같이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평소 두 명만 있을 땐 몰랐는데 네 사람이 같이 있으니 방이 무척 비좁게 느껴졌다.
옷장을 뒤적거리던 강현 형은 하얀색 베이스에 파란색 세로줄 무늬가 있는 넥카라 셔츠를 꺼내 들었다.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상품이었다.
“아, 저 셔츠.”
정이한이 아는 척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옷장에서 똑같은 셔츠를 꺼내 들었다. 다른 건 색의 배열뿐이었다. 어떻게 나랑 같은 옷이 있지? 내가 궁금해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정이한이 셔츠를 흔들며 웃었다.
“디어리가 보내준 거잖아.”
“아!”
맞아. 우리 디어리가 옷도 참 많이 보내줬다. 디어리 덕분에 텅텅 비어있던 내 옷장이 꽉 찼으니까.
“다 같이 맞춰 입으면 특별히 갖춰 입었다는 느낌은 없을 거고, 하온이가 원하는 자극도 줄 수 있을 거야.”
“견제도 할 겸?”
“어. 질투는 좋은 소스잖아.”
제 셔츠를 어깨에 둘러보던 정이한이 갑자기 내 허리에 팔을 휙 둘렀다. 그리고는 제 품 쪽으로 나를 쓱 끌어당겼다.
허리를 움켜쥐는 손길에 깜짝 놀라 움찔거릴 때였다. 정이한이 내 어깨에 얼굴을 턱 올리고는 속삭였다.
“그럼 좀 달라붙어도 되겠네.”
귓가에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오싹했다. 어깨를 들어 올리며 움츠리자 정이한의 낮은 웃음소리가 연이어 귓가를 때렸다.
“야! 누가 벌써부터 그러래!”
유찬 형이 나와 정이한을 떼어 놓았다. 갑자기 달라붙는 바람에 깜짝 놀랐네……. 아직도 귓가가 간지러운 듯해서 귀를 꾹꾹 눌렀다.
“하온이는 이걸로 갈아입어.”
강현 형이 내 품에 옷을 안겨주고는 멤버들을 모두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형이 건네준 대로 셔츠를 입고 목 단추 하나만 빼고 전부 잠가버렸다. 청바지도 형이 바꿔준 베이지색 바지로 바꿔입고, 벨트까지 착실하게 채운 뒤 방을 나섰다.
“형들 어때요?”
“아으! 뭐 이렇게 산뜻하게 귀엽냐!”
유찬 형이 벌떡 일어나 쪼르륵 달려왔다. 강현 형도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 형은요?”
“빨리 씻고 너랑 커플룩 입겠단다.”
유찬 형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나를 물끄러미 보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왜요?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뭔가 아까워서.”
“뭐가요?”
“예쁘게 차려입은 건 좋은데, 그게 스토커한테 보여주기 위해서라니. 아깝잖아! 나랑 데이트할 때도 예쁘게 입을 거지?”
유찬 형은 슬쩍 데이트를 강조하며 내게 눈치를 줬다. 아……. 맞아. 휴식기에 데이트…….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부담감이 확 몰려들었다.
“이제 서호 좀 깨워볼까나.”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건지 유찬 형이 중얼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으, 몰라. 일단 나중에 생각할래.
***
우리는 일찌감치 오전 연습을 끝내고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약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유찬 형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메시지를 확인한 형은 긴장감이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로비에 도착했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는 매니저 형을 향해 우리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데리고 올 테니까.”
“넵.”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형들이 내 양옆으로 포진해 있었다. 내가 가운데 앉아 스토커의 반응을 확실히 살필 수 있게 만든 자리 배치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실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매니저 형이 손님과 함께 들어왔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매니저 형의 뒤를 따라 현재 유력한 스토커 후보인 연휘 씨가 들어왔다. 연휘 씨는 연신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우물쭈물 들어오다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가운데에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다시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목덜미와 손, 귀까지. 드러난 피부는 온통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 뒤를 따른 건 벌써 세 번째 만남으로 내 눈에 익어 버린 사람이었다. 상자남. 그는 연휘 씨와 다르게 여유가 묻어나는 느긋한 몸짓으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연휘 씨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
나도 모르게 반응해 버리자 상자남이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알은체하는 눈치라 형들이 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게 느껴졌지만, 상자남이 곧바로 인사하는 바람에 설명할 타이밍을 놓쳤다.
“안녕하세요. 박현철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진하온입니다.”
나를 시작으로 멤버들이 한 명씩 이름을 밝히며 인사를 건넸다. 그럴 때마다 박현철은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우리의 인사를 받아줬다. 반면 연휘 씨는 무척 긴장되는지 계속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박현철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콕콕 건드리자 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 이연휘입니다.”
“안녕하세요. 저희 피처링 요청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편하게 앉으세요.”
유찬 형이 나긋나긋하게 웃는 얼굴로 의자를 가리켰다. 박현철과 이연휘가 자리에 앉는 걸 보며 우리 멤버들도 모두 착석했다.
“그, 그런데. 제가 왜 필요한 건지……. 다, 당연히 멤버분들끼리 하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이연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치로 눈동자만 위로 올려 우리를 살폈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며 뺨을 붉혔지만, 소파남과 마주했을 때 같은 음흉하고 기분 나쁜 질척거리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산뜻한 계열인 것 같은데.
이게 연기면 진짜 잘하는 거고. 아니면 생사람 의심하는 건데…….
“아, 이번에 제가 작곡한 곡은 저희 그룹 곡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 애들로는 제가 원하는 느낌이 안 나와서요.”
“그, 그렇군요…….”
유찬 형은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곡의 느낌을 설명하고 피처링을 원하는 구간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이연휘에게 시선을 고정했지만, 딱히 나를 쳐다보려고 하지 않아 애매했다. 결국 별 소득 없이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 곧장 녹음실로 갈까요?”
“다, 당연히 좋죠.”
저 말버릇 때문에 자꾸 헷갈리네. 나는 좀 떠볼 요량으로 다 같이 이동할 때 이연휘 옆에 나란히 붙어 섰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올렸던 이연휘는 나란 걸 알고 황급히 시선을 깔았다.
들어올 땐 몰랐는데 나란히 서니 나보다 키가 작아 정수리가 들여다보였다. 그래서인지 이연휘를 사이에 두고 박……. 박……. 아, 이름 까먹었다. 그러니까 상자남과 눈이 마주쳤다.
“신기하네요. 벌써 세 번째인가요?”
그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적당한 미소를 장착한 채 대꾸했다.
“그렇네요.”
“하루에 세 번 마주치면 운명이라던데, 저희는 하루에 몰아서 만난 건 아니니 아쉽게 비껴갔네요.”
눈웃음 지으며 하는 말에는 장난기가 다분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눈웃음치며 “그러게요. 아쉽네요.”하고 대답해줬다.
“하온아!”
그때 정이한이 뒤에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팔을 두른 채 내 어깨에 턱을 툭 올려놨다.
“아, 형. 걷기 불편해요.”
“난 좋은데~”
“전 불편하다니까요.”
정이한의 팔을 풀어내려고 했는데 힘을 꽉 주는 바람에 도통 풀리질 않았다. 내가 밀어내자 오히려 더 꽉 옥죄어 오는 것이 절대 여기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모르겠다. 마음대로 해라……. 질투 작전도 써 본다고 했으니 아마 그 일환일 것이다. 이연휘 반응이나 봐야지. 슬쩍 곁눈질해서 이연휘를 살피던 때 상자남이 물었다.
“그런데 디아스 멤버분들 오늘 스케줄 있으셨어요? 아, 아니면 지금부터 있는 건가?”
“아니요. 스케줄은 없어요.”
“옷을 맞춰 입으셨길래요. 스케줄 없을 땐 트레이닝복 입지 않으셨어요?”
내게 매달린 정이한이 기쁜 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따 영상 하나 찍으려고요. 그보다 저희 잘 어울리죠?”
정이한이 너스레 떨며 말했다. 옷이 잘 어울린다는 건지, 우리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건지 헷갈리는 말이었다. 일부러 말을 그렇게 고른 건가? 그 순간 이연휘가 고개를 휙 들었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져서 나도 모르게 이연휘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문제는 그걸 눈치챈 건지 입술을 벌렸다가 다급히 다물었다는 거다. 계속 애매하게 구네.
“사실 저 연휘 씨 처음 봤을 때 뭔가 느낌이 왔거든요.”
안 되겠다. 내가 좀 들쑤셔 봐야지.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조금 숙여 기울였다. 이연휘의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단풍나무가 순식간에 붉은빛으로 물들어가는 걸 직접 보는 것만 같았다.
“느, 느낌이요? 어, 떤…….”
날 보는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이런 눈 진짜 익숙하단 말이야. 우리 디어리가 나랑 눈 마주치면 이런 반응인데. 일단 나를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궁금해요?”
장난기를 듬뿍 담아 살살 눈웃음치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