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하온이가 위험해져.”
유찬 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멤버들 사이에 무거운 긴장감이 돌았다. 어째 지금 당사자인 내가 제일 태평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감 때문인지 점점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는 느낌이 들 때, 정이한이 입을 열었다.
“연휘 씨가 스토커인지 확인하는 건 찬성. 하지만 하온이랑 단둘만 만나게 할 생각은 없어.”
“나도 같은 의견이야.”
“형들 말이 다 맞음!”
이걸로 만장일치네. 우리는 최종 확인을 받기 위해 다같이 동시에 매니저 형을 바라봤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출발하지 않았던 형이 시동을 걸었다.
“실장님께는 내가 말할게.”
이걸로 확정인가. 이제 남은 건 언제 시행하느냐인데. 문제는 그 시기가 우리 팬 미팅 전인지, 후인지였다.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지금은 팬 미팅 무대 연습에 집중하고 싶었다. 스토커로 의심되는 사람도 찾았으니 이젠 그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
“하지만 그 사람 아니면 어떡해? 일단 확인은 해야 하니까 팬 미팅 전에 부르자.”
정이한은 내 무릎을 꽉 움켜쥐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만 설득하면 된다는 듯한 태도여서 나는 슬쩍 정이한의 시선을 피해 다른 형들을 봤다.
“팬 미팅 무대 연습할 시간도 부족해. 어차피 우리 팬 미팅 할 때까지는 연습실과 숙소만 다닐 거고, 당일엔 다 같이 있을 거니까 문제없어. ”
가장 이성적이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나도 강현 형의 의견에 절대 동의했으므로 “저도 강현 형이랑 같은 생각이에요.”하고 말했다. 하지만 유찬 형과 정이한은 조금의 위험도 배제하고 싶다며 팬 미팅 전에 유력한 스토커 후보인 연휘 씨를 만나보자며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둘씩 찢어져 팽팽하게 의견이 대립하는 와중에 우리에게는 멤버 한 명이 더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서호가 왜 조용하지?
“서호 형.”
“어, 어어?”
“형 생각은 어때?”
이서호는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순간 밴 내부가 극도로 조용해졌다. 자동차 엔진음만 들리는 와중에 갑자기 이서호가 “아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모르겠어. 유찬 형이랑 이한 형 말도 맞고, 강현 형이랑 진하온 말도 맞는 것 같아…….”
이서호는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나은 선택인지 모르겠다며 한 발 빼버렸다.
“나는 그냥 결론 나는 대로 따를게.”
이서호가 말을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유찬 형이 입을 열었다.
“지금 강현이가 걱정하는 건 무대 퀄리티잖아. 그런데 이런 불안한 마음으로 연습한들 제대로 될 리가 없어.”
강현 형이 반박하려는 듯 숨을 들이쉰 타이밍이었다. 유찬 형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너는 가능할지 몰라도 나랑 이한이는 안 돼.”
어라. 이렇게 강현 형을 공략한다고? 유찬 형은 정확하게 강현 형의 약점을 찔러왔다. 그걸 증명하듯 강현 형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나를 보는데…….
“……강현 형 생각 바뀐 거예요?”
“미안…….”
이제 내 결정만 남은 거야? 멤버 전원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하게 꽂혀왔다. 나는 결국 한숨과 함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형들 생각이 그렇다면 따를게요…….”
“그럼 내가 바로 연락해서 날짜 잡을게.”
유찬 형은 곧바로 연휘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 모드로 돌려놔서 우리는 숨죽인 채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내일 연휘 씨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소심하다는 AD님의 말이 진짜였는지 혼자서는 부끄럽다며 동료와 함께 가도 되는지를 물었다. 유찬 형은 당연히 된다고 대답했고, 통화는 금방 마무리되었다. 짧은 대화 속에서도 연휘 씨는 ‘당연히’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다.
“……맞는 것 같아.”
유찬 형의 말에 다들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
연휘 씨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 아침.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샤워를 마쳤다. 오늘부터 팬 미팅 날짜까지 며칠 동안 스케줄은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이런 날에는 트레이닝복만 대충 걸쳐 입고 나섰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다.
나는 스토커를 자극하기 위한 목적으로 옷장을 뒤적였다. 코디 누나들이 나는 헐렁한 옷을 입고 움직일 때 이따금 드러나는 몸의 라인이 예쁘다고 했었다. 누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품이 큰 헐렁한 셔츠를 찾는 중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기본 셔츠들은 그다지 크지 않아서 아무리 뒤져도 원하는 걸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슬쩍 정이한의 옷장을 힐끔거렸다.
“……이한 형.”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정이한이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잠이 덜 깬 탓에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눈만 감으면 그대로 다시 숙면할 것만 같았다.
“형 옷 좀 빌려도 돼요?”
“……내 옷? 어……떤 거…….”
“셔츠요. 안 돼요?”
정이한은 끌어안고 있는 베개를 품에 꼭 안고는 “응…….”하고 졸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정이한의 어깨를 토닥여줘서 다시 재운 뒤 조용히 일어났다.
허락도 받았으니 하나 꺼내 입어야지.
정이한의 옷장을 뒤적거려 부드러운 소재로 만든 치렁치렁한 핏의 하얀색 단색 셔츠 하나를 꺼냈다. 얼른 갈아입고 거울 앞에 내 모습을 비쳐 봤다.
라운드 셔츠였는데 사이즈가 커서 그런지 유독 깊게 파인 느낌이었다. 상체를 숙이니 그대로 벌어져서 속이 훤히 비쳐 보였다. 이거면 되려나. 정이한도 내가 상의 벗은 걸 보고 감정을 자각했다고 했었으니 이러면 스토커에게도 자극이 좀 되겠지?
바지는 사이즈가 딱 맞는 청바지를 찾아 입었다. 엉덩이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셔츠가 좀 답답해 보여서 오른쪽 골반 안에 셔츠 밑단을 조금 쑤셔 넣어 언밸런스하게 늘어트렸다. 이제 좀 괜찮은데?
마지막으로 헤어 손질까지 끝낸 뒤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을 때, 유찬 형이 제일 먼저 하품을 하며 나왔다. 형은 졸린 눈을 비비며 터덜터덜 정수기로 직행했다.
“흐암. 하온이 잘 잤어?”
“네. 그럼요. 형도 잘 잤어요?”
유찬 형은 찬장에서 컵을 꺼내며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응. 잘 자긴 했…….”
그 순간 형의 손이 미끄러졌는지 컵이 개수대로 떨어져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깜짝 놀란 내가 벌떡 일어났다.
“컵 깨졌어요?”
“……어? 아니, 어. 아, 잠깐.”
유찬 형은 황급히 다가가는 내게 손바닥을 펼쳐 저지시켰다. 형은 나와 싱크대에 널브러진 컵을 번갈아 봤다.
“무슨 소리야?”
정이한과 강현 형이 큰 소리에 놀랐는지 허겁지겁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 미안. 컵을 놓쳤어. 하온이 때문에 깜짝 놀라서.”
“…….”
“하온아……. 너 오늘 그러고 가려고?”
정이한이 내게 물었는데 나는 유찬 형이 컵 파편을 쓰레기통에 넣는 걸 보고 있었다. 맨손으로 저러다 베이면 어떡하려고.
“하온아?”
“어? 네? 아, 네. 이러고 가려고요. 괜찮죠?”
정이한이 내 오른쪽 어깨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제야 나는 셔츠가 흘러 내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래서 유찬 형이 놀랐군. 정이한은 내 매무새를 정리해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괜찮긴 하지. 괜찮은데. 오늘은 좀 아닌 것 같다.”
“오늘이라 입은 거예요.”
“……왜?”
“낚시하려면 미끼가 있어야 하니까요.”
정이한은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주름진 정이한의 미간을 검지로 꾹 눌러 살살 펴며 웃었다.
“이런 옷은 또 어디서 나서…….”
“형 옷인데.”
“어? 내꺼?”
“네. 아까 물어봤더니 입어도 된다면서요.”
정이한은 금시초문이라는 느리게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다 잠결에 대답한 게 기억났는지 “아!”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이한아…….”
“이한 형.”
유찬 형과 강현 형이 동시에 정이한을 불렀다. 몸을 흠칫 굳힌 정이한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일부러 얍삽하게 형이 제대로 사고하지 못할 때 물어본 건 나였으니 내가 구해줘야지.
“형들, 저 허리 숙이면 안에 보일 것 같죠?”
“당연하지!”
“연휘 씨가 제 스토커라면 가만있을 수 없겠죠?”
“스토커 아니어도 스토커로 만들 것 같은 게 문제야. 좀 얌전하게 입어도 될 것 같은데.”
내내 조용히 있던 강현 형이 단호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형은 마지막으로 “너무 야해서 안 돼.”라고 못을 박았다.
“제 스토커가 아니라면 별문제 없을걸요. 같은 남자잖아요.”
“너는 조심성 없어서 안 돼. 조금 전에도 어깨까지 살이 다 드러나서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유찬 형은 괜히 컵을 떨어트린 게 아니라며 내가 옷을 갈아입길 권했다. 나는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사람은 내 팬이라고 했지만, 그 사람이 스토커가 아니라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였다. 그저 좀 부끄러워하고 말겠지.
애초에 보통 사람은, 내가 그 앞에서 벌거벗고 춤을 춘다고 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눈살을 좀 찌푸릴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반대로 정신이 돌아버린 사람 앞에서는 내가 그냥 꽁꽁 여미고만 있어도 문제가 터지겠지.
나는 그저 스토커의 인내심을 휘발시킬만한 기폭제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만약 상대가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 우리도 계속 저 사람이 스토커가 맞는지, 아닌지 헷갈릴 테니까.
“하온이 말이 맞긴 맞지만…….”
“형들은 저랑 그 사람이랑 둘만 남겨두지 않을 거잖아요.”
“당연하지.”
유찬 형은 그걸 말이라고 하냐며 눈살을 찌푸렸다. 좋아 좋아. 잘 넘어오고 있어.
“형들이랑 같이 있는데 그 사람이 제게 본성을 드러내면 형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고요.”
“자꾸 당연한 소리 할래?”
“그럼 제가 이렇게 입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세 사람이 동시에 입술을 일자로 만들었다. 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살살 웃으며 말했다.
“문제없는 거 맞죠?”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유찬 형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문제는 없지. 하지만 굳이 그런 식으로 대놓고 보여줄 필요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