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19화 (219/320)

219.

유찬 형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유찬 형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의 반응도 이상했다. 이서호는 금방이라도 광대가 솟구칠 것 같았고, 정이한은 아예 얼굴을 피하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건 강현 형뿐이었다.

이거 뭔가 수상한데.

나는 눈매를 좁힌 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찬 형을 부르려던 순간, 형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이서호가 크게 외치며 폭소했다.

“진하온! 몰카! 대성공!”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유찬 형은 이젠 아예 배를 움켜잡고 시원하게 웃어 젖혔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나는 애꿎은 천장을 바라보며 허탈한 감정을 갈무리했다.

“푸흡, 미안, 하온아.”

유찬 형. 그렇게 웃음을 참으려 애쓰면서 하는 말은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다고요. 하긴 누굴 탓하겠어. 치밀하게 계획을 짠 방송국을 탓해야지. 설마 이게 역몰카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어쩐지 형들 반응이 이상하더라니…….

그래. 걸그룹 합동 앵콜 무대 공약을 아무렇지 않게 ‘좋아! 하자!’라고 했을 때 의심했어야 했어. 하지만 평소에 내가 하는 말이면 다 들어주던 형들 때문에 미처 연기를 한다고는 눈치채지 못했다.

익숙하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다. 그래도 몰카라서 정말 다행이야……. 하마터면 안티를 100만 명쯤 생산할 뻔했다. 나는 무거운 가슴을 쓸어내린 뒤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 진짜 깜빡 속았잖아요. 언제부터였어요?”

“우리는 방송국 도착하자마자 알았지.”

유찬 형이 으스대며 말했다.

“이제 좀 마음이 편하네. 하온이 속이느라 힘들었어…….”

정이한은 제 가슴을 손으로 짚으며 특유의 맑은 미소를 가감 없이 뽐냈다.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매니저 형이 나만 데리고 간다고 했을 때 형들이 순순히 보내준 것도 그렇고, 대충 변명한 매니저 형과 그 변명에 토 달지 않고 수긍한 형들까지. 이 모든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였네.

“서호 형.”

“응?”

“형이 MVP야.”

“내가?”

이서호는 검지로 제 얼굴을 가리키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형이 찰떡같이 연기해서 나 완전 속았어.”

가만 생각해보니 이서호가 평소처럼 어리숙하게 굴면서 내가 의심할만한 상황을 두루뭉술하게 만들었었다. 그래서 나는 또 나대로 대충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진짜 이서호가 한몫 단단히 했다.

“으하하학!”

이서호는 기분이 좋은 듯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1위 공약 몰카는 역몰카로 내가 단단히 속아 넘어간 것으로 끝났다. 이어서 우리는 ‘맨발로 앵콜 무대 하기’를 공약으로 확정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카메라 감독님들께 마주 인사한 뒤 우리는 AD님을 찾았다.

“하온 씨, 고마워요.”

“……네? 뭐가요?”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반문하자 AD님은 내게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너무 완벽하게 속아주셔서요.”

“……너무해요.”

“하하하.”

호쾌하게 웃는 AD님을 서운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더니 웃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AD님은 이내 머쓱한 듯 헛기침을 몇 번 하신 후에 더듬거리며 말씀하셨다.

“그, 그렇게 비에 젖은 고양이 마냥 보시면…….”

“너무해요…….”

“으윽.”

앓는 소리를 내시던 AD님이 갑자기 “아!”하고 탄성을 지르셨다. 그러다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리시더니, 주머니에서 사탕을 한 움큼 꺼내셨다. 저걸 왜……? 의아하게 보고 있자니 AD님은 아이를 달래는 듯한 미소와 함께 나에게 건넸다.

“사탕 드실래요?”

내가 어린애인 줄 아나? 조금 황당했으나 화해하자는 제스처처럼 보였기에 그냥 넙죽 받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AD님과 달리 멤버들은 웃음을 참느라 난리였다.

- 아아, AD님. 캔디크러시 무대 소품이 좀 부족합니다. 혹시 다른 곳에 더 있습니까?

그 순간 AD님의 무전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AD님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한 뒤 무전기를 손에 쥐었다.

“아까 현철이가 두 박스 옮기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며 AD님은 옆에 있는 남자를 봤다. 그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나와 부딪혔던 사람이었다. 파티용으로 보이는 소품을 잔뜩 들고 가던.

- 당연히 저도 봤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넉넉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네요. 부족합니다.

“이상하네. 일단 내가 가서 볼 테니까 기다려.”

- 네. 알겠습니다.

무전을 끝낸 뒤 AD님은 우리에게 묵례를 하신 뒤 대기실을 나가려고 하셨다. 그 순간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거의 동시에 “AD님!”하고 외쳤다. 깜짝 놀란 AD님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는 우리를 돌아봤다.

“왜, 왜요?”

우리는 빠른 눈짓으로 누가 대표로 말할 것인지 정했다. 이럴 때는 역시 유찬 형이지.

“조금 전에 무전 하신 분, 혹시 성함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에, 연휘요? 연휘는 왜요?”

의아해하던 AD님이 순간 낯빛을 바꾸셨다.

“혹시 그 녀석이 뭔가 사고라도…….”

하지만 이내 ‘그럴 녀석이 아닌데…….’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아, 목소리가 저희가 찾고 있던 이미지랑 흡사해서 데모곡 피처링을 좀 부탁하고 싶어서요.”

경계하던 AD님은 그 말에 표정을 확 푸시면서 편안하게 웃으셨다.

“이야, 연휘 녀석 노래 잘 부르는 건 또 어떻게 아셨대요? 그 녀석 디아스 팬이라서 아마 무조건 좋다 할 겁니다. 특히 하온 씨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이, 이거 좀 빼박 같은데. 설마 스토커가 방송국 직원일 줄이야. 유찬 형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혹시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다.

“음. 본인 동의 없이 알려드리는 건 좀 그렇고요. 연휘에게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매니저님 통해서 전달해 드릴게요.”

“아, 그럼 제 연락처를 드릴까요?”

유찬 형이 금방이라도 휴대폰 번호를 드리려고 하자, AD님이 손사래 치셨다.

“아닙니다. 그 녀석 소심해서 먼저 연락 못 할걸요. 유찬 씨가 걸어야 할 거예요.”

웃음기 띤 어조로 말을 마친 AD님은 이제 정말 가봐야겠다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우리도 황급히 허리 숙여 인사한 뒤 고개를 들었을 때, 아까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묵례했고 나는 잠깐이나마 그를 의심한 게 미안해서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AD님이 나가자마자 이서호가 경악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진짜 그 사람이 스…….”

하지만 이서호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찬 형에게 저지당했다. 유찬 형은 조용히 검지를 세우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리고는 곧장 휴대폰을 가리켰다.

[디아스-박유찬: 듣는 귀가 너무 많아]

[디아스-박유찬: 나중에 우리끼리 있을 때]

[디아스-이서호: 전부 우리 식구들인뎅?]

[디아스-박유찬: 우리 번호 파는 것도 우리 식구들이야]

[디아스-이서호: 헐...무친;; 그러네...]

[디아스-이서호: 그럼 톡은?]

[디아스-정이한: 톡도 위험해. 해킹...]

[디아스-백강현: 참아. 나중에 해.]

[디아스-이서호: (샌드백 두들기는 호랑이 이모티콘)

***

우리는 음방이 끝난 뒤 밴에 올라타자마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사방팔방에서 말이 쏟아져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래서는 아무 말도 못 하겠다!

“형들!”

내가 크게 외치자 순식간에 밴이 조용해졌다. 네 쌍이 시선이 동시에 내게 쏟아졌다.

“저희 모두 연휘 씨라는 분을 제 스토커로 의심하고 있는 건 같거든요.”

“나는 확신해.”

이서호가 콧김을 뿜었다. 당장이라도 은밀히 불러내서 흠씬 두들겨줘야 한다며 유찬 형에게 빨리 연락하라고 난리였다.

“서호야, 좀 진정해. 폭행 논란 아이돌이라고 기사 나고 싶어?”

“윽.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진짜로 그렇게 한댔나…….”

슬쩍 꼬리 내린 이서호를 한 번 쳐다봐 준 뒤 나는 유찬 형을 불렀다.

“형, 데모곡 진짜 있어요?”

“응. 틈틈이 만든 곡이 있어.”

“그럼 제 스토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진짜로 피처링을 부탁해야 할 것 같은데요.”

“설마, 하온이 너 또 증거 만들겠답시고 단둘이 있으려는 건 아니지?”

정이한이 딱딱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뜨끔한 마음을 숨기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없이 가볍게.

“일단 그게 제일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요.”

내 대답과 동시에 형들과 매니저 형이 그건 안 된다며 반대했다. 안 되면 말지.

“그러다가 일이 꼬이면? 그래서 납치라도 당하면 어떡할 거야.”

“형들 믿고 덤벼보려고 했어요. 다들 반대하니까 둘이서만 남아보려는 생각은 접을게요.”

하지만 내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다들 의심 어린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래도 소파남 때와는 다른데. 그때는 소파남이 형들에게 모욕을 줬기 때문에 화가 난 거였다. 이번에는 다행히 내게만 손을 뻗을 테니 문제없을걸?

이 방송국 올 때만 좀 조심하면 되겠지. 스토커의 신원 파악이 되니깐 경계해야 할 사람이 명확해져서 나는 오히려 좀 느긋해졌다. 그래도 그 사람이 확실한지는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어쨌든 한번은 부르긴 불러야 한다.

같이 시간을 보내며 관찰하면 연휘라는 사람이 정말 스토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팬레터라고 보내준 편지를 보면 정상은 아니었으니까. 깊고 깊은 일방통행을 저 혼자 쌍방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은연중에 티를 내지 않겠어?

그런데 이걸 형들에게 어떻게 설득하냐는 말이지.

“피처링 부탁하면서 하루 종일 같이 있어 보자.”

그때 유찬 형이 의견을 제시했다. 이어지는 형의 의견은 내 생각과 거의 유사했다. 결국에는 직접 대면하여 정말 스토커가 맞는지 파악해야 하는 게 1순위였다.

“우연히 ‘당연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뿐이고, 하온이 스토커가 아니라면 우리는 엄한 사람만 경계하게 되는 거야.”

유찬 형은 멤버들을 쭉 둘러보며 잠시 말에 텀을 뒀다. 그리고 곧 모두가 집중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후 형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진짜 스토커는 우리 경계 밖에 있다는 의미가 돼. 하온이가 위험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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