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16화 (216/320)

216.

매니저 형은 심드렁한 내 반응이 탐탁잖아 보였다. 하지만 딱히 위기의식을 느낄 수가 없는걸. 스토커라면 뒤에서 몰래 쫓아다니고, 사진 찍고 그러는 거잖아. 그런 거라면 이미 익숙해서 경각심을 가지라고 해도 무리였다.

“이걸 좀 봐.”

매니저 형은 내게 몇 장의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각기 다른 단색의 팬레터가 총 여섯 통이었다.

“이주 전부터 들어온 거야.”

팬들이 보내주는 팬레터나 선물은 1차로 회사에서 검수를 마친 뒤에 우리에게 보내졌다. 그중 스토커가 보냈다는 편지는 아무래도 따로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눈치챈 게 이주 전. 그 전에 온 건 폐기됐고.”

형은 내게 내용물을 보라고 눈짓했다. 손에 쥐자마자 봉투를 열어 확인해보니 평범한 연애편지 같았다.

“……음.”

하지만 팬레터라고 하기에는 무척 열렬했고, 무엇보다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이미 나와 천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연애를 하는 중이라는 게 문제였다. 내가 언제 눈웃음을 쳤고,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으며, 내가 언제 보고 싶다고 했…….

가만. 이거 내가 항상 디어리한테 하던 거잖아. 하지만 스토커 때문에 디어리에게 하는 애정 표현을 그만둘 수는 없잖아.

“이 정도면 그냥 사생이랑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굳이 저한테 알려주는 이유가 뭐예요?”

매니저 형은 내가 들고 있는 편지를 보더니 몇 개의 봉투를 더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마치 뭔가를 찾는 것처럼 보여서 얌전히 기다렸다.

“우리도 처음에는 나페스에 과몰입한 사생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걸 읽어 봐.”

[하온아, 형이 곧 만나러 갈게. 당연히 너무 설렌다. 사실 더 빨리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방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렸어. 네 취향대로 꾸몄으니까 당연히 하온이 마음에도 들 거야.

이제는 매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당연히 너무 설렌다. 내 앞에서 웃고, 말하고, 먹고, 자는 널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설레서 요즘엔 잠도 잘 못 자.

하온이도 당연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 맞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함께 있는 게 당연해. 너와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인데 당연히 날 보는 순간 알아봐 주겠지? 만약 몰라본다면 나 정말 섭섭할 거야.]

“……아. 이건 확실히 위험해 보이네요.”

날 위한 방을 준비했다고? 이건 나를 감금하겠다는 소리 아니야? 솔직히 좀 소름 돋아서 나는 들고 있던 편지를 내팽개쳐버렸다.

“그렇지. 그리고 편지를 전부 가져온 이유가 있어.”

매니저 형은 다른 편지들을 전부 펼친 뒤 특정 단어들을 손가락으로 표시했다. 그걸 따라 읽다 보니 형이 왜 편지를 전부 가져와서 보여줬는지 알게 되었다.

“이 사람 ‘당연히’라는 말을 많이 쓰네요.”

“맞아. 이게 힌트가 될 거야. 이런 사람이라면 팬 미팅에 나타날 확률이 높아. 내가 말해준 거 잊지 말고, 같은 말버릇이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곧장 신호를 보내.”

“그럴게요.”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를 조심해.”

……이거 되게 이상하게 들리는 말인데? 어떤 의도인지는 알지만, 어감이 주는 느낌이 이상해서 괜히 떨떠름해졌다.

“특히 방송국. 낯선 여자 스태프와 남자 스태프가 있다면 누굴 경계하겠어?”

“여성 스태프분이겠죠.”

“그러니 스태프 명찰을 달고 있어도 낯선 얼굴이라면 무조건 조심해야 해. 알겠어?”

“알겠어요. 그런데 형들한테는 비밀로 한 이유가 뭐예요?”

이런 경우라면 오히려 멤버들의 도움을 받는 게 낫지 않나. 예전에 소파남이 나를 노렸을 때도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내 곁을 지켜줬었다. 하지만 오히려 매니저 형은 내 질문이 의외라는 듯 코끝을 찡긋거렸다.

“하온이 일이니까 먼저 네가 알아야 하는 게 맞지. 그나저나 다른 멤버들에게 말하는 건 내가 설득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하온이가 먼저 말하네?”

“……당연하죠. 이건 저 혼자 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닌데다가 더는 형들이 걱정할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매니저 형은 내가 기특하다며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줬다. 과한 애정 공세에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매니저 형이 말했다.

“용건이 하나 더 있어.”

나는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슥슥 빗어 내리면서 “뭔데요?”하고 물었다.

“네 어머님이 실장님께 연락하셨나 봐.”

나는 행동을 멈춘 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매니저 형을 봤다. 형은 내 눈치를 살피다가 난처한 듯 시선을 돌렸다.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셨다던데…….”

“알려주셨대요?”

“아니. 대신 번호를 받아왔어.”

매니저 형은 내게 수첩을 쭉 찢어서 건네줬다. 내게는 필요 없는 연락처라 거절하려다가 멈칫했다. 이렇게 가족을 내쳐도 괜찮을까?

이 일이 나중에 디아스의 발목을 잡진 않을까 염려됐다. 유교의 나라에서 연예인이 자기 가족을 냉대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나는 유연이가 가족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건 알아도 그게 정확하게 뭔지는 몰랐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유연이가 어린 시절부터 방치당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은 또 없었다. 어쨌거나 유연이의 가족은 유연이에게 집을 구해줬고, 다달이 용돈과 월세를 입금해 줬으며 유연이가 된 내가 아이돌을 하겠다고 했을 때 회사까지 찾아와 계약서에 사인을 해줬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외부로 새어 나갔을 때 문제가 될 일이라면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종이를 덥석 받고 모른 척 입 다물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형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제시해 줄지도 모르잖아.

“형, 저 사실 가족이랑 사이가 안 좋아요.”

매니저 형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걸 받아야 하는 거겠죠?”

“어머님이 용건은 말하지 않았다고 해. 그저 하온이 번호가 바뀐 것 같은데 알려주질 않았다며 우셨대.”

“울었다고요?”

나는 비집고 나오는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댁의 아들은 이미 죽고 없는데 이제 와서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였다. 게다가 내가 데뷔한 이후 내내 연락이 없다가 이 시점에 연락이 온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갔다.

매니저 형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응. 가족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멀어질 순 없는 거잖아. 어쩌면 이 기회에 가족과 화해할 수 있지도 않을까?”

매니저 형은 좋은 부모님께 사랑받으며 좋은 환경에서 자랐구나. 가족의 애정은 절대적이라고 믿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법한 말이었다.

“형, 사실 저 과거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왜? 사고라도 당했어?”

놀란 매니저 형의 눈이 이제껏 본 적 없는 크기로 커졌다. 형은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냥 말을 돌려버렸다.

“그럴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있어요.”

“……뭔데?”

“저는 가족들에게 방치당하면서 컸어요. 그걸 증명하듯 아이돌로 데뷔하고 번호를 바꾸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연락이 온 적 없거든요. 그런데 지금에서야 연락이 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무언가 짐작이 가는 게 있는지 매니저 형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단어 대신 한숨을 뱉었다. 아마 형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돈이다. 흔한 일이지. 돈 좀 벌었을 것 같으니 그거 받아내고 싶어서 연락한 거다. 솔직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그건.”

말하기 어려워하는 매니저 형을 위해 내가 도중에 끼어들었다.

“어차피 저는 쓸 일도 없는 돈이니까 그들한테 준다고 한들 아깝진 않아요. 그렇게 처신하는 게 맞는 거겠죠? 저 아이돌이잖아요.”

“…….”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어차피 돈으로 끊어낼 수 있는 인연이라면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네. 나는 매니저 형이 꼭 쥐고 있는 찢어진 수첩을 받으며 웃었다.

“나중에 연락해 볼게요.”

“하온아.”

형이 그런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내 손바닥 안에서 꾸겨진 연락처를 회수해갔다.

“네가 속상해지는 일이라면 연락 안 해도 돼. 이 건은 실장님이랑 논의해서 우리가 알아서 할게. 대신 이 이야기를 실장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

나는 조금 놀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 형은 뭐 그런 사람들이 다 있냐며 씨근덕거리며 종이를 쫙쫙 찢어버렸다. 그게 뭐라고 내 마음이 다 후련해졌다.

“숙소로 돌아가자.”

매니저 형이 씩씩하게 차 문을 열었다. 나는 형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서 숙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계속 내 눈치를 보며 미안해하는 매니저 형에게 방긋방긋 웃어줬다.

“형, 제 눈치 보는 거 다 보여요.”

“……그, 그러냐. 크흠.”

“고마워요. 우리 매니저로 와줘서요.”

이건 진심이다. 우리가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건 전부 우리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써주는 매니저 형 덕분이었다.

“새삼스럽기는.”

부끄러운지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형의 목이 발그스름하게 붉어져 있었다. 매니저 형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그런데 애들한테는 어떻게 말하지?” 하고 말을 돌렸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눈앞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멤버들이 보였다.

“어? 진하온! 왜 이렇게 늦게 와!”

“하온아!”

“하온이 왔어?”

“……그러게요.”

나한테 스토커 붙었다는 거 알리면 형들이 또 걱정하겠네.

“어? 뭐가? 뭐가 ‘그러게요’야?”

이서호가 촐싹거리며 궁금해했다. 나는 멤버들을 숙소로 데리고 들어가 매니저 형과 함께 분위기를 잡았다. 어차피 말하기로 했으니 뒤로 미뤄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저한테 남자 스토커가 붙었대요.”

그런데 멤버들의 반응이 내가 예상한 것과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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