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유찬 형. 먼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
유찬 형은 복잡해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고 소리 지를 정도로 엉망이 된 형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유찬 형의 마음이 가라앉길 바라며 차분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오늘 아침에 발목이 아프단 거 알았어요. 무대 욕심이 나서 사녹까지 비밀로 하려고 한 건 저예요. 사녹 끝나면 다음 스케줄까지 시간이 비니까 그때 병원에 가려고 했어요. 계속 숨기려던 건 아니었고요.”
“……정말이야?”
유찬 형은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그동안 내가 워낙 사고를 많이 쳤어야지. 하지만 그건 대부분 예기치 않은 상태 이상이 원인이라 미리 말해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네. 진짜예요. 저도 발목 소중한 거 알아요. 앞으로도 형들과 함께 무대에 서고 싶어요. 10년, 20년 뒤에도 쭉.”
나는 한 호흡을 쉬면서 유찬 형의 반응을 확인했다. 조금 진정된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속상함이 가득 묻어있는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대 상황이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서 바짝 긴장해 있었나 봐요. 녹화가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몰려오면서 긴장이 함께 풀려서, 그 때문에 빈혈이 온 것 같아요. 이건 정신적인 문제니까 금방 괜찮아져요.”
유찬 형은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들어줬다. 형은 들릴 듯 말 듯, 야트막한 한숨을 연달아 내쉬었다.
“……정말 괜찮아지는 거야?”
“그럼요. 제가 정신적으로 몰리면 몸으로 반응 오는 거 알잖아요. 이 증상도 그중 하나고요.”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그런 선택을 했어.”
나는 어설프게 웃으면서 “무대에 서고 싶었어요…….”하고 대꾸했다. 유찬 형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다 이내 짙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음향 장비에 문제만 없었어도 아무 일 없었을 거예요. 저는 병원에 갔을 테니까. 하지만 아까 매니저 형이랑 대화했을 때 알았어요. 무대에 욕심부리다가 디아스에 폐를 끼치게 될 수 있다는 걸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유찬 형은 나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믿어볼게. 만약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매일 아침 하온이 몸 상태 체크할 거야.”
“……네?”
이거 농담인가? 그런데 유찬 형 표정이 되게 진지해 보이는데? 매일 내 몸 상태를 체크한다고? 어떻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픈 데 없는지 체크하고, 체온도 잴 거야. 그런 거 받기 싫으면 더는 속이지 마.”
허락하지 않으면 당장 내일부터 바로 시작할 기세였다. 그렇게까지 매일 아침 관심받고 싶지 않았던 나는 서둘러 “무, 물론이죠!”하고 대답했다. 그제야 유찬 형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이건 다행인데, 다음에 또 오늘처럼 상태 이상이 확 터지면 어떡하지?
좋지 않은 상상을 하다가 얼른 털어냈다. 괜히 구체적으로 떠올렸다가 진짜 일어나면 어떡해. 그것보다 이제는 강현 형 얘기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강현 형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유찬 형의 시선이 따라왔다. 형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순식간에 고개를 다시 돌렸다. 억지로 내게 시선을 고정하려고 했으나 눈동자가 옆으로 또륵 굴러가는 게 보였다.
“강현 형은 방송국에 도착해서 제가 아프단 거 알았어요.”
“……도착한 뒤였다고?”
역시. 이걸 오해하고 있었구나. 강현 형이 내 부상을 알게 된 타이밍이 훨씬 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 화를 낸 거였고.
“네. 밴에서 내릴 때 알아차리고 저 안아준 거예요. 아무리 강현 형이어도 그때부터 4인 안무로 변경하고, 형들이 그걸 또 익혀서 무대에 서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죠.”
내가 아픔을 느낀 건 오늘 아침이라 생각해보니 애초에 선택지는 두 개였던 것 같다. 무대에 오르거나 결방하거나. 답을 하나로 정하면 다른 건 생각하지 못하는 내 성격이 문제였네. 이건 진짜 어떻게 고쳐야 할지 답이 없었다. 문제라는 걸 알아야 고칠 수 있는데, 막상 문제가 닥치는 순간에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생각이 안 드니…….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유찬 형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강현 형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조금은 겸연쩍은 듯 조심스레 물었다.
“……그랬어?”
강현 형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은 고요한 눈빛으로 유찬 형을 응시하다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어. 상태가 많이 안 좋으면 하온이 뺐을 거야. 하지만 내가 확인했을 때 그 정도는 아니었어. 형 말대로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나도 어릴 때 종종 발목을 다쳤었으니까 경험으로 알았어.”
“아……. 미안, 내 말이 심했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나는. 네가 어제 이미 알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 때문에. 하온이가 나 걱정할까 봐 말 못 한 줄 알았거든.”
유찬 형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전부 내 탓 같았어. 아니, 하온이 쓰러진 건 내 탓이지. 그게 맞아. 그래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그런데 네가 미리 말만 해줬어도 하온이가 쓰러지진 않았을 거라는 억지 같은 생각에 …….”
유찬 형은 면목 없다면서 강현 형에게 거듭 사과했다. 강현 형은 지금 분위기가 어색한 듯 뒷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는 코끝을 긁적이며 천장을 봤다.
“나도…….”
강현 형은 계속 민망해했다. 사과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소년을 보는 것 같았다. 회피하듯 몇 번이고 천장만 보던 형은 이내 입매에 힘을 주고 시선을 내렸다.
“유찬 형, 미안해. 말이 심했어. 사실 뱉고 나서 후회했어…….”
“아! 확 오더라, 그거.”
유찬 형은 눈웃음과 함께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강현 형은 민망함이 가시질 않는지 조금 어색해 보이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실수 안 할게. 상처 줘서 미안해, 유찬 형.”
유찬 형이 환하게 웃으면서 강현 형의 어깨를 두들겼다.
“지금까지 싸운 적 없어서 몰랐는데 대화가 진짜 중요하긴 하다. 그렇지?”
유찬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봤다.
“……꼭 말할게요.”
“약속했다. 잊지 마. 다음에 또 그러면 매일 아침, 네 상태 체크할 거라는 거.”
굳이 다시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잊지 않았는데!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싸움의 원인제공을 했으니 주둥이가 있어도 입을 다물어야지.
“정곤 형. 이제 병원 가도 될 것 같아요.”
유찬 형이 목소리를 높였다. 유찬 형도 알고 있었나 보네. 우리 밴이 병원 근처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는 거. 매니저 형의 배려가 거듭 고마웠다. 화해와 사과도 타이밍이 있는 거니까. 그리고 내 용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형들, 저 무대 계속 서고 싶은데 안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무대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유찬 형이 작곡하고, 정이한이 작사했으며 강현 형이 안무 창작한 곡이다. 멤버들이 한 첫 프로듀싱의 결과물이었다. 부상 때문에 이 곡을 보내줘야 한다면 앞으로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하온아, 너 정말.”
유찬 형이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입을 벌린 채 날 봤다. 다른 멤버들도 한 명씩 말을 얹으며 내가 쉬길 바랐다.
“형들, 이번 곡, 우리에게 되게 특별한 곡이잖아요.”
나는 장난기가 섞이지 않은 진지한 태도로 내 생각을 전했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형들은 침묵했다.
“교수님께 물어보고 된다고 하면 그렇게 하자.”
뜻밖의 구원투수는 매니저 형이었다. 주차를 끝낸 형은 상체를 돌려 우리를 보고 있었다.
“다른 애들 생각은 어때? 유찬이?”
“……솔직히 하온이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도 돼요. 그래서 말리고 싶은 마음과 같이하고 싶은 마음이 혼재되어 뒤죽박죽이네요.”
“……혀엉.”
나는 최대한 불쌍해 보이게끔 울상을 지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나, 나를 그렇게 본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나도 정곤 형 의견에 찬성.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알지?”
그럼 이제 교수님만 구워삶으면 되나? 제발 내 편이 되어주세요, 교수님!
***
1인 병실로 들어와 침대에 눕기 무섭게 곧장 교수님을 찾으려는 매니저 형을 붙잡았다.
“매니저 형, 저 빈혈기 좀 가신 뒤 진료받으면 안 돼요?”
슬슬 상태 이상 끝날 때가 됐는데, 바로 검사에 들어갔다가는 상태 이상이 연타로 터질 확률이 백퍼였다. 지금 또 터지면 진짜 난리 날 텐데.
“침대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있으니까 발목에 부담 가지도 않잖아요.”
게다가 어차피 검사받으려면 걸어 다녀야 하잖아. 이리저리 부축받으며 다니다가 목격담이라도 돌면 쓸데없이 과장된 루머가 돌지도 모른다.
“……그럼 냉찜질할 거 얻어올게.”
역시 아이돌에게 루머는 종류 불문 무서운 거야. ‘루머’로 매니저 형과 형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나는 발목에 냉찜질을 하며 상태 이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상태 이상이 끝나고 체력이 좀 회복되자, 빈혈기가 이제 좀 가셨다는 걸 형들에게 알렸다.
매니저 형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이 나간 뒤 10여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형은 교수님과 함께 병실로 돌아왔다.
“촉진 먼저 하겠습니다. 조금 아파요.”
의사가 조금 아프다고 하면 죽을 만큼 아프다는 거 맞지? 아까 백스테이지에서 매니저 형이 꾹꾹 누르길래 너무하다고 생각했는데 교수님도 만만치 않았다. 형이 내가 미워서 그렇게 아프게 누른 게 아니었구나…….
이후 장소를 이동해 두 가지 검사를 이어서 했다. 결과적으로 내 부상은 1도 염좌였다. 인대나 근육이 파열되지 않은 가벼운 염좌라 천만다행이었다.
“어느 정도 쉬어야 하나요?”
매니저 형의 물음에 나를 비롯한 멤버들의 시선이 교수님께 고정되었다. 교수님은 아무렇지 않게 4주에서 6주 정도면 완치된다고 하셨다.
그래, 그건 예상했어. 그리고 이제 제일 중요한 게 남았다. 무대에 설 수 있는가,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