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10화 (210/320)

210.

“얘들아, 일어나자.”

발목이 걱정돼서 잠들 수 없었으나 나는 계속 잠든 척을 했다. 유찬 형이 잠든 서호를 깨우는 소리와 함께 강현 형이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렸다. 정이한은 내가 뒤집어쓴 담요를 슬쩍 걷어 올렸다.

“하온아, 일어나.”

나는 실눈을 뜬 채 칭얼거렸다.

“……졸려요.”

오늘 음방은 출근길 포토 라인이 따로 없어서 바로 들어가도 되는 곳이었다. 이것만큼은 다행이지. 덕분에 졸린척하면서 느릿느릿 걸어가도 될 것 같았다. 사전녹화를 제대로 따기 전까지는 발목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대한 줄여야겠어.

“오늘 유독 못 일어나네.”

정이한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내 머리에 모자를 툭 올려줬다. 나는 느릿한 손짓으로 모자를 제대로 눌러 쓴 뒤 꼼꼼하게 마스크까지 챙겨 썼다.

형들이 먼저 차에서 내리고,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두 개의 계단이 엄청 큰 장애물이라도 만난 것처럼 버겁게 느껴졌다. 단차가 낮은 첫 번째 계단을 왼쪽 발로 내딛자 강현 형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왜요?”

형은 날 물끄러미 올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괜히 찔려서 폴짝 뛰어내려야 하나 고민할 때 갑자기 단단한 팔이 내 쪽으로 쭉 뻗어왔다. 그러고선 내 겨드랑이 밑을 단단하게 받친 후, 그대로 나를 덜렁 들어버렸다.

“억!”

반사적으로 형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놀란 마음을 추스를 때였다. 강현 형은 나를 번쩍 안아 든 채 성큼성큼 걸었다. 디어리의 즐거운 듯한 비명 사이로 강현 형이 내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발 아프면서 무리하지 마라.”

디어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방긋거리다가 귓가에 들리는 강현 형의 속삭임에 깜짝 놀라 굳어 버렸다.

“…….”

어, 어떻게 알았지?

나는 강현 형의 어깨를 꽉 움켜잡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오른발이지?”

“네.”라는 대답이 한숨에 섞여 나왔다. 무대 못 서게 하겠지? 갑자기 우울해진다…….

“어떻게 알았어요…….”

강현 형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오른발 디딜 때마다 너 얼굴 찡그려졌어.”

이상하다. 그럴까 봐 일부러 얼굴 근육에 힘을 빡 주고 있었는데…….

“……티 많이 났어요?”

그럼 다른 형들도 알았으려나…….

“아니.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계단 노려보는 거 보고 떠봤어.”

“윽.”

잡아뗐으면 되는 거였나? 하지만 너무 확신에 찬 어조였는데! 강현 형 진짜 고단수네.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언제까지 숨기려고 했어?”

이미 들켜버린 마당에 뭘 더 숨길까. 나는 강현 형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녹 끝나면 매니저 형한테 말하고 병원 가려고 했어요.”

“무대 오를 생각이지?”

“무조건요.”

이건 절대 양보 못 한다. 강현 형이 다른 형들에게 말하고, 매니저 형까지 모두 나서서 말린다고 하더라도 무대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형들이 내가 무대에 오르는 걸 막아선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백스테이지까지 응원하겠다고 따라갔다가 무대로 다짜고짜 뛰쳐 올라가면 뭐 어떡할 건데. 디어리들이 보는 앞에서 날 끌어내리진 않을 거 아냐. 이후 전개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무대에 오를 계획을 남몰래 머릿속에서 짜고 있을 때였다.

“형들 몰래 테이핑해 줄 테니까 이따 화장실로 와.”

“……어? 진짜요?”

“어차피 말려도 무대에 따라 올라갈 생각이나 하고 있을 거 아냐. 그러느니 발목 부담 덜게 도와주는 게 낫지.”

이 형 뭐지? 진짜 전생자나 환생자 아니야? 어떻게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행동하지? 스킬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행동할 수가 없는데.

“형, 솔직하게 말해봐요. 사람 마음 읽는 능력 같은 거 있죠?”

강현 형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똑같을 테니까 다 아는 거야. 그리고 사녹 끝나면 병원 간다며.”

“네. 갈 거예요. 빨리 나아야 하니까.”

강현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어차피 심각한 거면 깁스할 테니까 내일은 무대에 못 오르겠지.”

“……아, 왜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해요!”

강현 형은 날 슬쩍 올려보더니 짤막하게 웃고는 방송국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우리가 멀어지자 아쉬워하는 디어리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방송국에 들어와도 강현 형은 나를 내려주지 않았다. 나도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풀어져 강현 형한테 편하게 기댄 채 대기실로 배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현아, 이제 하온이 내가 안을까?”

정이한이 날 한 번 올려본 뒤 강현 형에게 물었다.

“안 힘들어.”

“……어어. 아는데.”

정이한은 괜히 내 손가락을 툭툭 건드리면서 아쉬워했다. 간지러워서 손을 피했더니 서운한 듯 올망올망한 눈으로 날 올려본다.

윽. 미안하게 왜 저렇게 봐…….

“하온이 그렇게 졸려?”

유찬 형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일찍 일어나서 그런가 봐요.”

“피곤할 때 됐지.”

강현 형이 아무렇지 않게 지원사격을 해줬다. 유찬 형은 늘어지게 하품하면서 “그건 그래.”하고 동의했다.

“나도 졸려 죽겠는데…….”

잔뜩 충혈된 눈을 한 이서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다른 형들은 계속 걸어가고 있었고 뒤처진 이서호는 정이한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서호의 눈동자에 짓궂은 장난기가 가득 들어차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한 형! 나 업어주라!”

말과 동시에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 이서호가 정이한의 등을 노리고 펄쩍 뛰어올랐다. 불시에 습격당한 정이한이 ‘컥!’ 하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넘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이한은 이서호를 업은 채로 버텨 섰다.

“……와, 놀랐다.”

“히히.”

“자자, 장난 그만치고. 빨리 들어가.”

어느새 대기실 앞에 도착했는지 매니저 형이 문을 열어줬다. 강현 형은 나를 소파 앞에 내려 준 뒤 담요까지 가져다줬다.

“한숨 자.”

“고마워요, 형.”

꼼지락거리면서 신발을 벗어 던진 뒤 소파에 누웠다. 소파 팔걸이를 베개 삼아 베고 누운 채로 보니 이서호는 여전히 정이한에게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정이한은 떨어트리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이서호가 다칠까 봐 동작이 거칠지 못 했다. 저렇게 소극적으로 움직이니 이서호가 떨어질 리 없지. 나는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걸 보다가 눈을 감았다.

***

“여기 앉아.”

강현 형은 변기 뚜껑을 내린 뒤 그 위에 나를 앉혔다. 그런 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뒤 자연스럽게 내 아픈 발을 형의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다.

“……바닥 더러워요.”

“무대 의상 아니라 괜찮아. 갈아입을 거니까.”

형은 내 신발과 양말을 벗겨 낸 뒤 바짓단을 몇 번 접어 올렸다. 그리고는 내 발가락을 움켜쥐고 위쪽으로 밀었다. 뒤꿈치가 당겨지며 찌릿한 통증이 따라왔다.

“……아.”

“아파?”

“네. 조금…….”

이번에는 발을 좌우로 돌리면서 표정 변화를 읽으려는 듯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발목이 돌아갈 때마다 시큰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인대가 터진 것 같진 않고, 근육 쪽이 조금 찢어진 모양이네. 심각한 건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알아요?”

“인대 터졌으면 그렇게 못 참아.”

경험담이라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고는 강현 형은 주머니에서 꺼낸 붕대로 내 발을 칭칭 감아줬다.

“하지만 이런 부상은 무리하면 심해지는 거 알지? 무조건 휴식해야 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으로 봤을 때도 형의 테이핑해주는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형은 마지막으로 붕대를 단단하게 고정한 뒤 내 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일어나 봐.”

화장실 벽을 짚은 채 조심스럽게 일어나 바닥을 딛고 서 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통증이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와!”

내친김에 살짝 뜀박질까지 해 보니 착지할 때 욱신거리긴 했지만, 이 정도라면 무대에 올랐을 땐 충분히 잊을 수 있을 법한 통증이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좋아요!”

“임시 처방이야. 이번 사녹만 욕심부린다길래 도와주는 거고. 꼭 병원 가서 제대로 진단받아야 해.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넵. 그럴게요.”

강현 형은 도망치려고 하면 잡아서라도 병원으로 데려갈 거라며 엄포를 놓았다. 입술 끝은 올라가 있었는데 눈은 웃질 않아서 섬뜩했다. 세 번쯤 약속하고 나서야 강현 형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안도하는 내 머리 위로 다정한 손길이 올라왔다.

***

최대한 발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리허설 때만을 제외하곤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현 형이 내내 옆자리를 지켜준 덕에 체력도 빠지지 않고, 그럭저럭 괜찮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보니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 왔다.

“얘들아, 이동하자.”

강현 형이 먼저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도움을 받아 일어나자 형은 자연스럽게 내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팔을 내어 줬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게끔 강현 형의 부축을 받은 채 무대 위로 올라갔다.

“꺄아아아아!”

디어리의 함성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발이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무대 가장자리까지 뛰쳐나갔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응원하러 온 디어리에게 인사했다.

“디어리! 잘 잤어요?”

잠시 멤버들 모두 흩어져서 녹화 직전까지 디어리와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디아스 준비하세요.”

스태프의 큐사인에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무대 대형에 맞춰 섰다. 어제는 비 때문에 안무를 변형해서 보여줬지만, 오늘은 제대로 된 안무를 선보이는 첫날이었다. 유찬 형도 어제 1위를 한 덕분인지 전보다 불안감이 많이 가신 것처럼 보였다.

스포트라이트에 빛이 들어왔다. 나는 오른쪽 발에 힘을 꾹 주고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만 잘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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