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09화 (209/320)

209.

바닥의 물기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서 몇몇 군데에 물이 고여 있었다. 우리 동선과 겹치는 곳의 물기라도 제거해야 할 것 같아 발로 슥슥 밀어냈다.

“얘들아! 다치지 마!”

미리 말이라도 맞춘 건지 디어리들이 동시에 외쳤다. 나는 디어리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손을 흔들어줬다. 평소에는 뜨겁게 환호해줬을 디어리들의 함성에 힘이 조금 빠져 있었다.

“우리 다치지 말자.”

강현 형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우리를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유찬 형을 살폈다. 희게 질려 있는 유찬 형은 겉으로 봐도 잔뜩 긴장한 티가 났다.

“유찬 형.”

“…….”

내 말도 안 들리나 봐.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유찬 형!”

“어, 어?”

“바닥 미끄러워요. 조금 틀려도 되니까 편하게 하세요.”

“으응……. 노력해 볼게.”

무대를 시작하기 직전. 조명이 동시에 오프 되었다.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주변은 고요했는데도, 어쩐지 유찬 형의 긴 한숨이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포트라이트 조명에 빛이 들어왔고, MR이 인이어를 통해 흘러나왔다. 유찬 형이 작곡한 ‘우리는’이라는 곡은 처음부터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빠른 비트의 곡이었다.

몽환적인 느낌의 EDM이 베이스에 깔려 있어, 경쾌하면서도 묘하게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그에 따라 우리의 안무도 때로는 정적으로, 또 때로는 동적으로 격하게 움직였다.

“내게 너는 신기한 사람이었어.”

이서호가 첫 소절을 불렀다.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해.”

유찬 형이 뒤를 이었다. 차분하게 부르는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이어진 강현 형과 정이한의 파트가 끝날 때까지, 유찬 형은 바꾼 안무를 실수 없이 소화했다.

“서로를 알아가며.”

유찬 형과 정이한이 서로를 보며 손뼉을 마주쳤다.

“서로를 이해하며.”

강현 형과 이서호가 같은 동작을 이어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어-.”

나는 고음 파트를 소화하며 멤버들을 한 명, 한 명 터치하듯 움직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댄스 브레이크. 강현 형을 필두로 힘 있는 군무가 이어졌다. 무대의 하이라이트였기에, 나 역시 비에 대한 걱정을 미뤄두고 안무에 집중했다. 무릎을 접어 올리며 뛰어올랐다가 바닥에 착지했다.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위치를 바꾸기 위해 움직이다가 발이 미끄러졌다.

원래 보폭보다 반쯤 더 미끄러진 발을 빠르게 수습했다. 그래도 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거 분명히 카메라에 잡혔을 텐데…….

괜히 신경 쓰다가 다음 안무도 실수할까 봐 나는 머릿속으로 안무를 점검하며, MR에 맞춰 춤을 췄다. 이 다음은 크로스 안무 변형이었다.

강현 형의 오른쪽에 서기 위해 형의 뒤쪽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나와 동시에 자리를 바꿔야 하는 유찬 형이 움직이질 않았다. 강현 형에게 시선이 집중된 순간, 나는 얼른 유찬 형의 팔을 툭 건드렸다.

그때, 유찬 형이 매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큰일이다. 형 안무 바꾼 거 잊고 있었나 봐. 지금이라도 자연스럽게 움직이면 괜찮지 않을까?

유찬 형이 다급히 스텝을 밟았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형은 원래 안무를 선보이고 말았다. 당황한 탓에 몸에 익은 동작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것 같았다.

쭉 뻗은 다리가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자칫하다가는 내가 유찬 형의 정강이를 걷어찰 것만 같았다. 그다음은 서로 발이 얽혀 넘어지겠지.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나는 빠르게 생각을 마치고 다리를 억지로 비틀었다.

순간 발목이 삐끗하며 꺾였으나 가까스로 방향을 바꿨다.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일련의 동작들은 다행히 다음 안무를 무사히 이을 수 있게 해줬다.

무대가 끝난 직후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유찬 형을 달래느라 진땀 뺀 거 말고는 별일 없었다. 발목도 괜찮은 것 같고. 이 정도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

……이상하다. 왜 체력이 찔끔찔끔 빠지지? 꼭 디버프 걸려서 도트 데미지라도 입고 있는 것 같은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체력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던 나는, 처음 보는 이상한 현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데도 체력이 1씩 마이너스 되고 있었다.

곤란한데…….

자면서 담이라도 걸렸나? 일단 일어나서 움직일 땐 체력이 얼마나 빠지는지 좀 봐야겠네.

“윽.”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디딘 순간, 찌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을 느끼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낸 탓에 황급히 옆 침대를 살폈다. 다행히 정이한이 깰 것 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문제는 오른쪽 발목이…… 아픈데?

어제 삐끗했던 발이었다. 통증이 하루 늦게 오기도 하나? 어제는 괜찮다가 왜 오늘…….

어떡하지? 제일 먼저 우리 무대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무대에서 빠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내일도, 모레도…… 아니, 이번 주 내내 못 오르면 어떡해? 그러다 2주 활동 전부 못하게 되면?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다가 머리를 잘게 흔들어 털어 냈다. 일단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나는 왼쪽 다리에 힘을 준 채 일어나서 오른쪽 발을 천천히 바닥에 내디뎠다. 그냥 디딜 때는 괜찮은 것 같은데, 체중을 좀 실으면…….

아, 아파!

진짜 어떡하지? 이러면 춤 제대로 못 추는 거 아니야? 오전에 병원에, 아니지. 지금 시간이 너무 이르니 응급실을 가야 하나? 그랬다가 나 아프다고 소문나면 어떡해? 이거 골치 아프네.

나는 다시 침대에 앉은 채 두 다리를 얌전히 모아봤다. 왼쪽보다 오른쪽 발목이 조금 부어올라 있었다. 그래도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떡할까. 숨겨? 아니면 말해?

말하면 오늘 음방은 무조건 못 뛰는 거 아닌가? 하필이면 오늘 오전에는 사전녹화가, 오후에는 다른 일정이 잡혀 있어 곤란했다. 차라리 본방 무대에 오르는 거였으면 오전에 병원에 다녀오는 건데…….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나는 다친 사실을 숨기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 일단 유찬 형이 미안해할 게 뻔하기도 하고, 멤버들이 절대 무대에 못 서게 할 거 아니야. 무대에서 빠지는 건, 그건.

……그건 진짜 싫어.

사전녹화까지만 잘 참고, 그 뒤에 조용히 매니저 형한테 말한 다음 병원에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계속 숨기는 건 아니고 진짜 딱 사전녹화 마칠 때까지만. 좋아. 그렇게 하자.

나는 임시 처방을 위해 서랍에서 뿌리는 파스를 꺼내 들고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왔다. 걸을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발목을 찔러왔다. 그래도 상태 이상으로 터진 두통보다는 참을만하니까 문제없어.

나는 욕조에 걸터앉은 채 발목에 파스 범벅을 해놓고 얌전히 기다렸다. 얼마나 많이 뿌렸는지 파스 때문에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발목의 통증은 여전했다. 냉찜질 같은 티 나는 건 할 수 없고, 약이라도 먹어볼까…….

나는 최대한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욕조에 앉은 채 샤워를 마친 후 한 번 더 파스를 뿌렸다. 아직 형들이 일어날 시간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

“하온이,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정이한이 계속 날 의심했다. 이서호도 파스 냄새가 너무 심하다며 이상하다고 눈치를 줬다.

“어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기로 약속했지?”

유찬 형이 내 상태를 살피며 눈매를 좁혔다.

“잠을 잘못 자서 그래요. 목이 결려서 뿌린 거라니까요.”

나는 목 스트레칭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목을 꾹 부여잡고 “여기가 아파요.”하고 뻔뻔스레 말했다. 연기의 생명은 뻔뻔함이다. 아픈 걸 들키지 않아야 무대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까짓 통증을 무시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짜야?”

강현 형이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매서운 눈으로 날 응시했다. 눈치 빠른 강현 형만 잘 넘기면 되는데.

“그럼요.”

지난번에 아이돌 미소 장착했다가 걸렸으니, 이번에는 적당히 아픈 척도 하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지금 잘 속여 넘겨도 나중에 거짓말했다고 화낼 형들이 눈에 보일 듯 선했지만, 그래도 무대를 포기할 순 없었다.

하루하루 무대에 서는 날이 줄어드는 게 아까울 지경인데 이런 사소한 부상으로 못 서게 되면 억울하고 속상해서 엉엉 울어버릴지도 몰라. 그때 이서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확실히 여기서 파스 냄새가 나긴 하는데.”

……네가 개냐? 혹시나 해서 미리 뿌려두길 잘했지.

“그렇다니까.”

이서호에 이어 정이한까지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코가 내 목을 콕 찔렀다. 정이한은 매캐하게 찌르는 파스 냄새에 커헉, 소리를 내더니 코를 마구 문질러댔다.

“……왜 거기에 코를 박아요. 아, 이한 형! 눈 비비지 마요!”

파스 묻은 손으로 눈을 비비려고 하다니! 깜짝 놀라서 정이한의 팔목을 휙 잡아 내렸다.

“누, 눈이 매워서…….”

“얼마나 뿌린 거야?”

유찬 형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목 결린 것 때문에 무대에 지장 주면 안 되잖아요.”하고 대꾸했다. 다행히 멤버들은 잘 속여 넘긴 것 같…… 지?

나는 혹시라도 멤버들이 계속 추궁할까 봐 졸리다는 핑계로 담요를 뒤집어썼다. 체력이 계속 빠지는 게 마음에 걸리는데…….

나는 잠든 척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었다. 이러다가 슬쩍 정이한한테 기댈 생각이었는데, 정이한이 먼저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감싼 뒤 제 몸쪽으로 나를 슬그머니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정이한에게 기댄 나는 얼른 내 체력 상태를 확인했다.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소강상태였다.

어쩔 수 없다. 오늘은 내가 형들 껌딱지가 되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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