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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208화 (208/320)

208.

미안한 마음에 샤워하고 돌아온 이서호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을 때였다. 매니저 형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한숨을 푹푹 쉬며 돌아왔다.

“무대 변경은 없대.”

우리는 반사적으로 창밖을 확인했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창문에 부딪힌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미끄러졌다.

“아직도 많이 오는데요?”

“내 말이…….”

매니저 형은 한숨을 푹 내쉬며 우리에게 조심할 것을 여러 번 당부했다. 이미 리허설을 하던 걸그룹 멤버 중 한 명이 무대에서 대차게 넘어졌다고.

조심하겠다고 대답했는데도 걱정이 되는지 매니저 형은 대기실 문 앞을 왔다갔다했다. 이내 매니저 형이 강현 형을 불렀다.

“혹시 지금 안무 좀 수정해서 동선 최소화하고, 점프 횟수 좀 줄일 수 있을까?”

“음. 생각 좀 해 볼게요.”

강현 형은 시선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강현 형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침묵했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난 뒤 형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네. 자연스럽게 고칠 수 있는 포인트가 몇 군데 있어요.”

“지금부터 연습하면 본방 전까지 맞출 수 있겠어?”

매니저 형의 질문이 이번엔 우리에게 돌아왔다. 평소라면 문제없었을 텐데, 지금은 유찬 형이 걱정이었다. 그렇게 불안해했는데 지금 바꿔도 괜찮은 걸까?

그쪽을 무심코 바라봤다가 형과 눈이 딱 마주쳤다. 형은 두어 차례 심호흡하더니 갑자기 손바닥으로 자기 뺨을 철썩철썩 두들겼다.

“저는 괜찮아요.”

뭔가 각오를 다진 것 같긴 한데,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하지. 차라리 서브 미션이 나와 주면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반응이 없었다. 요즘 시스템에 좀 방치당하는 기분이야.

“나도! 디어리는 우리 다치는 거 싫어할 테니까 열심히 외울게!”

이서호의 경쾌한 목소리에 잠깐 다른 곳으로 샌 생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사이 정이한도 “지금부터 외우면 되나?”라면서 대열에 합류했다.

“저도 문제없어요.”

내가 마지막으로 대답함과 동시에 강현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뒤적였다.

“나한테 오 분 정도만 시간을 줘.”

강현 형은 안무를 수정하겠다면서 패드를 꺼냈다. 패드에 수납된 펜을 뽑아 들고 액정에 끄적끄적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미 5분은 지났지만, 다들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기 위해 신중했다. 혹시라도 강현 형을 방해할까 봐 나는 슬쩍 눈동자만 굴려 시간을 확인했다. 리허설까지 앞으로 30분쯤 남았다. 그 뒤에 본방까지 네 시간.

그나마 우리 방송 순서가 뒤쪽이라 여유 있는 편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집중하면 숙지 못할 건 없었다. 게다가 강현 형의 안무 기획력은 최상이니까. 형은 최대한 동선에 무리가 없는 방향으로, 매끄럽게 안무를 바꿔줄 거다.

“다 끝났어.”

강현 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얼른 형을 중심으로 모였다.

“기본 동선은 크게 안 바꿨어.”

형은 이미지를 휙휙 넘기면서 우리에게 설명했다.

“원래 안무 동선이랑 바뀐 곳도 있네…….”

“응. 여기서 멀어졌다가 합류하는 동선이 큰 편이라, 자칫하다는 미끄러질 것 같아서 수정했어.”

화면을 물끄러미 보며 잘게 스텝을 밟아보던 유찬 형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다음 안무로 자연스럽게 넘기려면 나랑 하온이 위치가 바뀌어야 하는구나.”

“다른 데는 거의 비슷해.”

유찬 형은 길게 숨을 뱉은 뒤 눈에 힘을 줬다.

“좋아. 그럼 연습해 보자.”

우리는 스탭들과 함께 대기실에 여유 공간을 만든 뒤 본격적으로 변형된 안무 연습에 돌입했다.

가장 신경 써야 할 건 바뀐 동선이었다.

원래는 센터에 서 있는 강현 형을 중심으로, 나와 유찬 형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서로 위치를 교체해야 했다. 그러나 바뀐 안무에서는 튀어 나가는 부분이 생략됐고, 대신 서로의 위치를 미리 바꾸기로 했다.

이동을 하는 타이밍이 바뀐 탓에 연습 과정에서 나는 유찬 형과 몇 번 부딪혔다. 안무 복제기 수준의 유찬 형도 바뀐 안무가 헷갈리는지 버벅거렸다.

“리허설 전까지 이 부분 반복해도 될까…….”

유찬 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잘하게 바뀐 다른 안무들도 숙지해야 하는 상황이라 내 눈치를 보길래 선뜻 대꾸해줬다.

“그럼요! 익숙해질 때까지 해요.”

“나는 이미 완벽한 듯! 나도 유찬 형 도울게.”

이서호가 허리에 팔을 턱 올리면서 자신감 있게 굴었다. 오늘 이서호 컨디션 되게 좋네.

“서호도 거의 익힌 것 같고, 유찬 형은 금방 익히니까 괜찮지만…….”

강현 형은 아래턱을 긁으며 정이한을 곁눈질했다. 정이한은 미세하게 바뀐 스텝이 헷갈리는 듯 계속 같은 자리에서 껑충거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쏠린 걸 느낀 건지, 멈칫한 정이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 열심히 할게. 괜찮아.”

“휴, 정곤 형.”

강현 형의 호출에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 형이 얼른 다가왔다. 강현 형은 정이한을 전담하러 빠져버렸고, 매니저 형이 강현 형의 대타를 서게 되었다.

어설프게 강현 형을 따라 하는 매니저 형을 보며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우리 매니저 맞네! 어깨 너머로 엉성하게 익힌 안무를 따라 하는 와중에도 포인트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우리 연습할 때 되게 주의 깊게 보나 봐. 매니저 형의 귀여운 춤사위가 유찬 형의 긴장을 녹인 건지, 형도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다행이다.

***

“으으, 하온아…….”

유찬 형이 손을 덜덜 떨면서 내게 팔을 쭉 내밀었다. 나도 테라피 해주고 싶은데 말이지…….

“유찬아, 안 돼!”

코디 누나가 눈을 부릅뜨고 유찬 형을 막아섰다. 누나는 헐렁한 내 바지 핏을 막 잡아주고 있던 참이었다. 허리 쪽을 핀으로 조인 누나가 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바지 상태를 확인했다.

“하온이, 왜 살이 더 빠졌어?”

“……저 잘 먹는데요.”

“이거 지난주에 맞춘 거잖아. 근데 허리가 남아.”

이번 안무가 역대급으로 격해서 그런가. 연습할 때도 평소보다 체력이 더 쪽쪽 빨리는 것 같더라니 아무래도 칼로리 소모가 컸나 보다. 그러고 보니 거울을 봤을 때 살이 좀 빠진 것 같아 보였는데…….

“아니, 진하온. 허리 한 줌 아니야?”

우리 대화를 들은 이서호가 내 근처에서 기웃거리면서 놀라워했다. 이서호가 내 옷을 툭툭 건드리는 게 신경 쓰였는지 코디 누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호야, 방해하지 마.”

“……넵.”

결국 한마디 들었네. 이서호는 슬그머니 내게서 멀어진 뒤 날 구경하고 있는 멤버들 틈에 섞여들었다.

“됐다. 이제야 좀 마음에 드네.”

누나는 허리를 쭉 폈다. 그리고 내 등을 아프지 않게 찰싹 두들겼다. 다시 거울 앞에 서니 확실히 옷을 처음 입었을 때보다 태가 살았다.

“와……!”

“마음에 들어?”

“네!”

“하온이 무대 의상 전부 고쳐야겠네. 당장 내일 입을 의상부터 맡겨야 하니까 이따 무대 다 끝나고 치수부터 재자.”

“넵.”

미안한 마음에 얼른얼른 대답했더니 코디 누나가 상큼하게 웃어줬다. 누나가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유찬 형이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다가왔다. 나도 안아주고 싶은데, 지금은 곤란하다.

“형, 근데 저…….”

“……알아.”

유찬 형은 내 코앞에 멈춰 선 뒤 팔과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고개 숙였다. 저렇게 나오면 내 마음 약해질 거 다 알고 그러는 거지?

“손잡을까요?”

“응. 부탁해…….”

유찬 형이랑 손을 맞잡기 무섭게 정이한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아~”하고 입을 벌리라는 신호를 주길래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했더니 초콜릿이 쏙 들어왔다.

“저녁에 야식 만들어 줄게.”

“괜찮아요. 형들은 못 먹잖아요.”

“너 살 빠졌다며.”

정이한이 주는 야식을 받아먹으면 다시 몸무게를 원상복구 시킬 수 있으려나? 그러나 복구는 둘째 치고, 코디 누나가 치수를 다시 재야 한다며 눈물을 흩뿌릴 게 분명했다.

“……앞으로 2주 남았으니까 그때까지는 몸무게 유지할게요. 의상 고치는데 살찌면 곤란해질 것 같아요.”

“그럼 휴식기에 많이 먹자.”

“그래요. 저도 야식 만드는 거 도울게요.”

“나야 좋지.”

정이한은 벌써부터 그때가 기대된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서호도 빠지지 않고 같이 먹겠다며 손을 번쩍 들었다.

“얘들아, 슬슬 준비하자.”

매니저 형의 신호에 우리는 백스테이지를 향해 자리를 옮겼다. 백스테이지는 임시로 만든 천막이 길게 이어진 장소였다.

이렇게까지 해서 야외무대를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비가 많이 오면 장소 바꿔도 되는 거 아닌가. 이해는 안 되지만 방송국 마음인데 뭘 어쩌겠어. 이랬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우리 몸은 우리가 알아서 잘 챙기는 수밖에.

“비는 좀 그쳤지만.”

매니저 형이 천막 밖으로 손을 뻗으며 빗줄기를 가늠했다.

“완전히 그친 건 아니야. 앞 팀 끝나고 물기 제거 한 번 해줄 건데, 그래도 미끄러우니까 조심해야 한다. 넘어질 것 같으면 차라리 안무에 힘을 빼. 팬들도 너희가 다치는 것보다는 안무 좀 엉성하게 하는 걸 원할 거야. 알지? 몸이 우선이다. 이런 무대에서는 욕심부리지 마.”

매니저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에게 SNS 에 올라온 글 몇 개를 보여줬다. 우리가 다치지 않길 바라는 디어리의 염려가 가득 담겨 있었다.

곧 앞선 무대가 끝났다. 사전 녹화한 팀의 영상이 송출되는 사이, 물기 제거를 위해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다음으로 우리가 무대 위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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