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그날 이후, 형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 비밀에 관해 묻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완전히 평소대로 돌아온 우리는 컴백 날짜까지 그야말로 연습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금이 간 상자 속 기억은 이따금 틈새를 비집고 나왔다. 그러나 다행인 건, 처음처럼 괴롭지는 않다는 거였다. 내 곁에는 언제나 멤버들이 있었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운 기억에 무뎌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 좋은 기억을 억지로 마음 깊숙한 곳에 가라앉히고 다 잊은 척, 괜찮은 척 살던 예전과는 달랐다. 오래 굳은 상처의 딱지가 한 번 떨어진 뒤 말끔하게 아물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어딜 가든 표정이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다녔다. 나는 아무리 거울을 들여다봐도 차이를 모르겠는데 말이지. 우리 멤버들도 동의하길래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내니, 무대도 이전보다 더욱 즐거워졌다. 나는 스크린에 우리 성적이 집계되는 걸 바라보는 척하며 소중한 디어리들을 곁눈질로 담아냈다.
“이번 주 1위는 디아스입니다!”
종이 꽃가루가 흩날렸다. 디어리가 크게 함성을 내지르며 우리를 축하해줬다. 컴백 후 4주 연속 1위를 거머쥐며 우리의 컴백 활동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4주 내내 나는 매번 들떠서 정신을 못 차렸고, 이서호는 여전히 눈물바다였다. 유찬 형과 정이한이 이서호를 놀리면, 이서호는 씩씩거리다가 디어리를 보고 또 눈물을 쏟았다.
“디어리! 사랑해요!”
“우리도! 사랑해!”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매번 화답해주는 디어리가 사랑스럽다. 휴식기를 보내며 매일 꿈꿔왔던 무대는 모든 결핍을 충족시켜 줄 만큼 완벽했다. 우리는 그야말로 충실한 나날을 보냈다.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면서 활동기가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비록 수면 시간이 부족할 만큼 스케줄이 빡빡했지만, 디어리와 만나는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꿈 같은 일인지! 앵콜 무대를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가면서도 나는 여운에 잠겨 멍하니 형들의 뒤를 따랐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유찬 형 곡으로 활동하는 거네?”
이서호가 유찬 형의 어깨에 팔을 턱 얹고는 짓궂게 물었다.
“악! 굳이 말 안 해줘도 되거든?”
유찬 형은 이서호를 떨쳐낸 후, 뒤를 휙 돌아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게 두 팔을 내민 형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하온아~”
“네네.”
이제는 유찬 형이 익숙해져서 얌전히 서 있었더니 알아서 날 끌어안고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무대 끝난 직후라 화장기가 남아 있을 텐데 괜찮으려나. 코디 누나들한테 혼나도 난 몰라.
“디아스는 여전히 사이좋네~”
“보기 좋아서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웃으면서 말을 건네왔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꾸벅 인사하자 그들은 자상한 미소로 화답한 뒤 바쁘게 걸어갔다. 스태프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유찬 형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직도 떨려요?”
“당연하지. 다음 주 첫 방에서 순위 뚝 떨어지면 어떡해…….”
“그럴 일 없어요. 형이 만든 노래 진짜 좋다니까요.”
당장 내일이면 무대에 오르는데 아직도 이렇게 본인 노래에 자신이 없다니. 유찬 형은 유독 본인의 곡 안무를 배울 때도 힘들어했다. 아무리 연습해도 불안해해서, 계속 강현 형을 붙잡고 자신의 안무를 점검했다.
오랜만에 형의 순두부 멘탈이 제대로 일하는 중이라 솔직히 걱정이 좀 됐다. 너무 긴장해서 실수라도 하면 남은 활동 기간 내내 괴로워할 게 뻔했으니까. 이럴 때 제대로 된 위로의 말을 건넬 줄 모르는 나는 그저 유찬 형을 토닥여 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
설상가상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으아! 하필 오늘!”
이서호가 원망스레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흐릿했던 하늘이 결국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다들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와중에 우리는 대기실에 콕 박혀 밖을 내다봤다.
“무대 미끄럽겠다.”
정말 하필, 오늘은 야외 특별 무대가 있는 날이었다. 방송 시작할 때는 그치면 좋을 텐데…….
가뜩이나 불안해 보이는 유찬 형인데 무대까지 미끄러울 거라고 생각하니 불안함이 가중되었다. 이리저리 서성거리던 유찬 형은 결국 도움을 요청하며 강현 형을 붙잡았다.
벌써부터 저렇게 힘을 빼면 어떡하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저렇게라도 자신감이 생기면 좋은 일이니까. 이서호와 정이한도 유찬 형을 돕겠다며 곧 연습에 합류했다.
나도 가만히 있기 뭐해서 같이 하려고 했지만, 저질 체력은 얌전히 있으라며 쫓겨났다. 덕분에 나 혼자만 의자에 편히 앉아서 멤버들을 구경했다.
마실 거라도 사다 줄까.
우리 대기실 근처에 자판기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집중하는 형들을 위해 살금살금 움직여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분명 이쪽에…….
다른 그룹의 대기실을 문을 몇 개 지나자 자판기와 마주칠 수 있었다. 강현 형을 위한 달달한 커피, 이서호를 위한 탄산 음료, 유찬 형은 아까도 청심환을 먹었으니 이온 음료, 그리고 정이한이 좋아하는 녹차.
마지막으로 내…… 핫초코는 여름엔 찾아보기 어렵다니까. 나는 아쉬운 대로 복숭아 아이스티를 뽑아 들었다. 품에 음료수를 한 아름 안아 든 채 돌아섰을 때였다.
자판기와 가장 가까운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잔뜩 인상을 찌푸린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는 날 발견하자마자 대뜸 성큼성큼 다가왔다. 뭔가 엄청 화가 나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화난 거 맞겠지. 상대는 문라이트의 막내 멤버 정다금이었다. 그는 내게 화낼 자격이 충분했다. 내가 그룹이 분해된 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까. 잘못은 소파남이 했지만 같은 멤버 입장에서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길만하니.
이대로 쓴소리를 듣는 게 나을까, 아니면 피하는 게 나을까. 저 사람의 성격을 모르니 나중을 위해 어떤 걸 선택해야 할지 고를 수가 없었다. 이럴 땐 찍어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사이 정다금은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피하기는 늦었으니…….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 너.”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잠깐 비켜줄래?”
“아…… 넵!”
옆으로 비키자 그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들었다. 날 발견한 게 아니라 자판기를 발견한 거였나. 정다금은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굴러나온 음료를 꺼내 단번에 들이마신 뒤 곧장 쓰레기통에 캔을 처박았다.
“진하온, 맞지?”
“넵. 맞습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아…….”
나는 잔뜩 안고 있는 음료수를 내려봤다. 오래 걸리면 곤란한데. 내가 혼자 나온 거 알면 형들이 걱정할 터였다.
“아, 오래 걸리는 건 아니야. 대기실로 따라올래?”
권유하는 목소리에서 민망함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나한테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경계하는 것도 이해는 하는데 여기서 말하기 좀 그래서.”
주저하는 날 보고 정다금이 한 번 더 말했다. 조금 머쓱한 듯 구는 그의 태도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고마워. 잠깐만 기다려 줘.”
정다금은 날 내버려 두고 대기실로 혼자 들어가 버렸다. 안에서 좀 시끄러운 소리가 난 뒤 문이 벌컥 열렸다. 처음 정다금이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잔뜩 화가 나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날 힐끔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쉰 뒤 빠른 보폭으로 멀어졌다.
“됐어. 들어와.”
뭔가 트러블이 있었나 보다. 정다금은 내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자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팔을 딱 붙이고 날 향해 허리를 숙였다.
“우리 변태 새끼 때문에 정말 미안했다…….”
“……네?”
“그 새끼 성격에 너한테 제대로 사과도 안 했을 게 뻔하니까. 내가 면목이 없네.”
여기서 사과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왜 밖에서는 말할 수 없다는 건지 너무 절실하게 이해해 버렸다. 당황한 나는 허둥거리다가 음료수를 몇 개 떨어트려 버렸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캔을 정다금이 함께 주워줬다.
“아, 고맙습니다.”
“이런 거 가지고 뭘. 사과하고 싶었던 건 내 욕심이었는데. 따라와 줘서 고마워.”
“아, 아닙니다.”
정다금은 이 문제로 매니저랑 싸웠다며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나 오늘 솔로 앨범으로 복귀하거든.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텐데 이대로 그 자식이랑 한통속으로 생각되는 게 싫어서 사과하고 싶었어.”
“아…… 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솔직히 완전히 잊고 지냈으니까. 내 삶에서 소파남을 치운 순간 문라이트에 관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도대체 왜 너희 대기실 찾아가는 게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내가 깽판치는 것도 아니고. 매니저랑 싸우다가 성질나서 나갔는데 네가 딱 있네?”
정다금은 말하는 내내 미소를 걸고 있었다. 그 미소는 어쩐지 좀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 게 있는데.”
정다금은 휴대폰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온통 나와 교주를 향한 소파남의 원망과 욕설이 남겨져 있었다.
[애기(쓸): 난 잘못 없어 잘못한 건 걔들인데 왜 나만 이렇게 돼야해?]
[애기(쓸): 완전히 함정에 빠진거라고! 다금아 너는 형 믿지? 어? 니가 나 재기하는 거 도와줘야 해 알지?]
[애기(쓸): 그 새끼들 가만 안둘거야]
“나중에 죄송하네, 어쩌네 하면서 복귀하기 위해 연기할 수 있거든? 이거 기억하고 절대 합의해 주지 마. 알았지?”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멤버끼리 사이가 안 좋았나 봐. 정다금은 할 말이 다 끝났다면서 대기실 문을 열어줬다. 나는 따로 사과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상관없어 하는 모습이었다.
본인의 마음이 편안해지길 원해서 사과한 건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니까 밉지도 않네. 나는 웃으면서 정다금에게 인사한 뒤 대기실로 돌아갔다.
“아악! 진하오오온! 너 일부러 그랬지!”
탄산을 따자마자 부글부글 올라온 음료를 뒤집어쓴 이서호가 잔뜩 성을 내며 달려들었다.
“아, 아니야! 실수로 떨어트렸…… 우아악! 유찬 혀어엉!”
젠장, 탄산도 떨어트린 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아, 진짜 고의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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