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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206화 (206/320)

206.

문 앞으로 다가가려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힘들다고 말하면 더 괴로워지는 거 아니야? 차라리 빨리 잊고 묻어두는 게 좋지 않나. 지금까지 그렇게 버텨왔는데.

이대로 혼자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건 알지만, 선뜻 내 과거를 입 밖에 내려니 왠지 꺼려졌다. 괜히 말해버렸다가 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아서.

물론 과거에 있었던 일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안했다.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을 내리누른 채 나는 결국 침대에 힘없이 엎어졌다.

가만 생각해 보니, 혼란스러운 감정이 이대로 조용히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내가 힘든 이유를 말하려면 어쨌든 정이한에게 과거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유연이 대신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박유연이라는 사람은 사라졌지만, 유연이가 지내 온 과거는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건 내 과거와는 다르다는 소리다. 함부로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가 나중에, 어떤 계기로 멤버들이 괴리감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침묵하는 게 나은 거 아닌가. 나는 짙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 누웠다. 천장을 바라본 상태로 눈을 감고 이마를 팔등으로 덮었다. 자꾸만 약한 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고 해서 필사적으로 참고 있을 때였다.

“그래도!”

갑자기 이서호의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혀 들어왔다. 하지만 곧장 목소리를 낮춘 듯 더는 말소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거실에…… 모여 있나?

그러면 그냥 자연스럽게 끼어들어서 멤버들한테 기대도 되지 않을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자. 피곤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멤버들은 나를 받아 줄 텐데. 그런 확신이 들고 나서야 나는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벌어진 방문 틈새로 밝은 거실이 엿보였다. 그곳엔 나를 뺀 멤버들이 함께 있었다.

그게 마치, 너무 오랫동안 지켜만 봐왔던 화목한 가족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 순간 무언가가 나를 막아서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꼼작할 수 없었다.

별거 아닌 방문 손잡이가 뜨겁게 달궈진 쇳덩이로 변한 것 같았다. 저걸 만지는 순간 손부터 잡아먹은 열기가 내 머리까지 태워버릴 것 같다는 거부감이 일었다.

잠시 멀어졌던 방문 닫히는 소리가 다시 시끄럽게 성을 내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이 문을 열어도 될까. 내가 지금 나가도 다들 날 환영해줄까.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형들이 일부러 나를 배제할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데, 이상하게 부정적인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나가면 모두가 불편해할 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시스템: 상태 이상 발생!>

아…….

상태 이상…….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니 체력이 뚝뚝 떨어졌을 텐데, 그걸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네…….

뒤늦게 체력에 시선이 갔지만, 이미 상태 이상이 터졌으니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경쾌하게 돌아가던 돌림판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졌다.

아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상태 이상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몸이 안 좋다고 하면 응석 부릴 수 있을지도.

<시스템: 상태 이상 ‘두통’에 걸렸습니다.>

경고가 뜬 동시에 머릿속이 헤집어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머리를 꽝꽝 울려대는 고통에 나를 괴롭히던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졌다.

이럴 땐 이게 참 유용하네.

나는 잇새를 꽉 문 채 헛웃음을 삼켰다.

“으, 윽.”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을지언정, 몸은 아니었기에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방문 앞에 주저앉았다. 아픈 건 머리인데 시야까지 흔들렸다. 이 와중에 통증에 신경을 뺏기니 잡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점점 거칠어지는 숨을 헐떡였다. 그때, 영원히 열 수 없을 것 같던 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흐리게 번진 시야 너머로 고개만 빼꼼히 내민 멤버들이 보였다.

“헉! 하온아!”

문이 벌컥 열리며 유찬 형이 선두로 뛰쳐 들어왔다.

“아, 내가 뭐랬어!”

이서호가 형들을 쏘아보며 성을 냈다.

“쟤 이상하니까 살펴봐야 한댔잖아!”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 는데, 아픈 줄 몰랐어……. 미안.”

정이한이 입술을 꽉 깨물며 망연히 섰다.

“어디야? 어디가 아파?”

강현 형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내 어깨를 짚으며 물어왔다. 다들 거실에 모여 있었던 이유, 이제 알 것 같네. 나 평소랑 똑같이 군다고 굴었는데 그게 티가 났구나. 형들은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거였다.

나를 배제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해 모여 있던 거구나.

상태 이상 때문에 머리는 깨질 듯 아픈데도 웃음이 나왔다. 날 습격한 과거의 기억은 멤버들의 따뜻한 눈빛을 보며 서서히 옅어졌다.

맞아, 내 가족은 형들이야. 난 이미 그걸 알고 있었잖아.

“……유찬 형.”

“응응.”

유찬 형은 뭐든 말하라며 곧장 대답해줬다. 나는 형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잔뜩 어리광 부렸다.

“……머리 아파요.”

“내가 약 가져올게.”

강현 형이 곧장 움직였다. 거실에서 서랍을 뒤지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눕자.”

정이한이 눈썹을 축 늘어트린 채 내 팔을 부축했다. 나는 유찬 형과 정이한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끙끙거렸더니 형들이 계속 내 옆을 지켰다.

“속상하게 왜 아프고 그래…….”

유찬 형은 머리맡에 앉아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약 먹자. 진통제야.”

강현 형이 물과 함께 약을 건네줬고, 유찬 형은 내 등에 팔을 받쳐 날 일으켜줬다. 사실, 이렇게까지 극진한 보살핌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만 아픈 거라 혼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날 향한 관심이 새삼스럽게 너무 좋았다. 다시는 혼자가 될 일이 없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서, 그냥 형들한테 마음껏 응석 부렸다.

내가 약을 먹자마자 강현 형은 내게서 컵을 받아 갔다. 형과 교체하듯, 정이한이 적셔 온 수건으로 흥건하게 흐르는 식은땀을 톡톡 찍어 내듯 닦아내 줬다.

“있잖아요.”

나는 정이한의 손길을 기분 좋게 받으면서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저, 사실은요. 엄청 큰 비밀이 있어요.”

형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말을 못 해요. 못하겠어요.”

나중에 이런 말을 꺼내게 된 걸 후회할지도 몰라. 형들은 계속 궁금해하겠지.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약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털어놓아도 괜찮을까.’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뒤엉킨 충동의 결과일지도 모르고. 아무렴 어때. 나는 이미 앞뒤 생각 없이 말을 뱉어 버렸는데.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무언가가 바뀔지가 중요한 거지.

“언젠가, 는 형들한테 털어놓고 싶은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평생 못할지도 모르고요.”

유찬 형은 팔짱을 낀 채 조금 심각한 얼굴색으로 물었다.

“어떤 종류의 비밀인지 물어도 돼?”

“유찬 형.”

정이한이 형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유찬 형은 내게 미안해하며 뒷머리를 쓸어 올렸다.

“크고 작은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어. 그걸 털어놓을지 결정하는 건 하온이 몫이야. 난 네가 말하든 말든 상관없어.”

형은 날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내 손을 꼭 잡아왔다.

“하온이를 믿어. 하지만 리더로서 확인은 해야 해. 네 비밀이 우리 그룹을 흔들 수 있는 종류인지.”

“그건 아니에요.”

내가 인생 2회차라는 사실이 그룹을 뒤흔들 만한 비밀은 아니니까.

“아무도 믿지 않을 거거든요.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고……. 그런데 정말, 진심이니까 나중에, 나중에 제가 털어놓게 되면 믿어줬으면 좋겠어요.”

진중한 눈빛으로 내 대답을 듣던 유찬 형이 빙그레 웃었다.

“당연하지.”

유찬 형의 대답을 들은 나는 정이한을 봤다.

“응. 나는 뭐든지, 하온이가 하는 말이면 다 믿어.”

……이건 좀 위험하지 않나. 왠지 정이한은 내가 꼴도 보기 싫으니 꺼지라고 하면 그대로 가출해서 안 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란 말이야.

“이한 형은 제 말을 좀 골라서 믿을 필요가 있어요.”

“왜? 하온이가 나한테 해가 될 말을 할 리는 없잖아. 아니야?”

순진하게 물어오는 눈빛에 “그건 그렇죠…….”하고 대답해버렸다. 정이한은 해맑게 웃으면서 내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나는 이번엔 강현 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해줬다. 그것만으로도 날 향한 신뢰가 느껴져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지막으로 이서호…….

“뭔데 그렇게 진지하냐? 네가 인생 2회차라고 해도 믿을게.”

농담을 가득 담은 가벼운 어투였다. 하지만 나 혼자 찔리는 마음에 순간 사레에 들려 콜록거렸다.

“야! 괜찮아?”

나는 손을 휘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차례 기침이 지나간 뒤 목을 가다듬었다.

“……고마워, 서호 형.”

“고마우면 다음부턴 말을 해, 말을! 비밀을 말하라는 게 아니라 힘들면 힘들다고 좀! 오늘 형들이 전부 네 눈치 보고 있었던 건 아냐?”

나는 할 말을 잃고 어색하게 웃었다.

“……티 났어?”

“완전. 아이돌 미소 장착하고 웃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모르겠냐? 널 위해 모른 척했을 뿐이야.”

“다음에는 말할게.”

“넌 항상 다음에는 말한다고 하면서도 안 하잖아. 너 그것도 습관이야, 습관.”

이서호가 고개를 저으며 나를 타박했다.

“서호야, 하온이 아직 아프잖아.”

“……이제 좀 괜찮아 보이는데, 뭘.”

나는 형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상태 이상이 끝난 건 아니라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나는 원래 혼자서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괜찮지 않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건 아마도 혼자 버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 아닐까.

“맞아요. 저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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