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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204화 (204/320)

204.

확실히 그동안 이서호가 좀 침체되어 있긴 했었다. 뮤비 촬영 후 다시 시작된 다이어트와 하드한 스케줄 때문에 힘들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휴식 시간임에도 이서호는 연신 콧노래를 부르며 연습실을 쏘다녔다.

“야, 진하온! 지쳤냐?”

이서호가 폴짝폴짝 뛰어왔다. 자연스럽게 내 앞에 가부좌를 트는 이서호에게 쥐고 있던 텀블러를 내밀었다.

“응. 마실래?”

“아니!”

이서호는 제 발목을 잡고 상체를 흔들었다. 몸짓도 가볍고 표정도 좋았다.

“서호 형, 기분 좋아 보인다?”

“어? 응. 그러게? 기분 좋네!”

나는 아침에 갱신해 둔 이서호의 정보를 떠올렸다. ‘철없음’ 디버프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제 했던 말을 생각해 보면 철이 드는 건 시간문제 아닐까.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해야 이서호 입에서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끄집어낼 수 있지…….

나중에 우리가 팬미팅을 하거나 콘서트를 열게 된다면, 개인적으로 이서호가 악기 연주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장난 치고 떠들썩한 이서호가 진지하게 연주한다면 반전 매력이 돋보이지 않겠어?

이서호 기분도 좋아 보이는데,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물어봐도 되지 않으려나…….

“서호 형.”

“응?”

“혹시 악기 다룰 줄 아는 거 있어?”

“엉. 왜?”

이서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헐, 완전 의외네.”

“나를 뭐로 보고?”

“이서호로.”

“형은 어디 갔어!”

형에 집착하는 건 평생 갈 건가 봐.

“알았어, 알았어. 서호 형. 근데 악기 뭐 다룰 줄 아는데?”

“피아노랑 바이올린. 피아노를 좀 더 좋아하긴 해.”

이서호는 내가 질문하는 이유를 궁금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해줬다. 둘 다 연주할 수 있다는 걸 딱히 숨기고 있었던 건 아니었나 보네. 어쨌든 답은 들었다. 이제 나중에 필요할 때 이서호가 피아노랑 바이올린을 다룰 줄 안다는 걸 언급할 수 있겠지.

“근데 왜 물어봐?”

“…….”

“아, 왜 그러냐니까?”

이서호는 궁금함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궁금해할 줄은 몰랐는데? 뭐라고 말하지. 잠깐 고민하던 나는 적절한 변명거리가 떠올라 얼른 입을 열었다.

“취미를 가져보고 싶어서 고민 중이거든. 악기라도 하나 배워볼까 싶어서 그냥 물어본 거야.”

거짓말은 아니다. 내 취미를 찾아보기로 결심한 게 얼마 전이었으니까. 형들한테 고백받는 바람에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말 꺼낸 김에 진짜 한번 해 볼까.

“아! 그럼 피아노 배울래? 피아노 재밌어. 남는 거 있는데 줄까?”

“……뭐?”

“남는 피아노 준다고.”

왜 말을 못 알아듣냐는 식으로 굴어서 내가 더 당황했다. 피아노가 남을 수가 있는 거야? 그 덩치 크고 비싼 악기가?

“피아노가 어떻게 남아?”

“새로 샀으니까 남지. 별걸 다 물어보네.”

“아니, 그게 남을 수 있는 악기야?”

“왜 안 남아?”

대화가 안 통하네? 내가 답답한 만큼 이서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답답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서호가 먼저 가슴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이걸 왜 설명해야 하지? 잘 들어라, 진하온. 나한테 원래 쓰던 피아노가 있었어.”

“응.”

“근데 새 걸 샀어.”

“그래.”

“그러니까 원래 쓰던 게 남겠지?”

여기까지는 나도 이해하지. 고개를 끄덕였더니 이서호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그래! 그래서 남았으니까 준다고.”

우리의 바보 같은 대화를 남이 들으면 얼마나 어이없어할까…….

“내가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아. 내 말은 그 덩치 큰 악기가 어떻게 남아있느냐는 거였어…….”

“아, 답답하네. 새로 샀으니까 남았지!”

“나도 답답하거든! 전에 쓰던 건 어디에 뒀냐고!”

“원래 있던 곳!”

“그럼 새로 산 건!”

“옆방!”

아, 이제야 알겠다. 피아노를 여러 대 둘 수 있을 정도로 집이 넓다는 의미구나. 나랑 공간에 대한 개념 자체가 틀려서 대화가 안 통했던 거다. 답을 찾았더니 개운해졌다.

“서호 형. 나는 피아노 받아도 둘 곳이 없어. 고맙지만 사양할게.”

“우씨, 안 받을 거면 왜 괴롭혔어!”

“괴롭힌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랬지.”

“그냥 받아. 너희 집 주소 대. 오늘 당장 보내라고 할 테니까.”

우리 집…….

나는 이 세계에서 눈을 뜨자마자 맞이했던 그 작고 낡은 원룸을 떠올렸다. 피아노가 들어갈 수도 없을뿐더러, 거기에 피아노를 넣으면 다리 뻗고 자지도 못할걸.

애초에 계약도 해지됐고.

매니저 형한테 내가 살던 원룸 계약이 해지 되었다고 들었으니까. 그래서 새로운 집을 얻고 싶다면 회사가 도와줄 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숙소가 집이나 마찬가지인걸.

아무도 없는 낯선 공간보다, 멤버들이 있는 숙소가 좋았다.

“우리 집, 숙소야.”

있는 그대로 말했는데 이서호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갑자기 시선을 내리깔고 우물쭈물하더니 ‘미안…….’하고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미안해?”

영문을 모르겠네. 내가 멀뚱거리기만 하자 이서호는 내 눈치를 살살 살피더니 “그럼 바이올린 줄까? 그건 작은데.”하고 말을 돌렸다.

아…? 아아!

내 말을 오해했구나. 아니, 따지고 보면 오해는 아니지. 가족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정말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계속 내 눈치만 살피며 불안해하는 이서호를 향해 방긋 웃어줬다. 모르는 척해야겠다.

“바이올린 비싼 거 아니야? 내가 받아도 돼?”

“어. 완전 되지. 기다려! 가져다 달라고 할게!”

이서호는 벌떡 일어나더니 붙잡을 새도 없이 제 휴대폰을 찾으러 가버렸다. 가방을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내 든 뒤 몇 분이 되지 않아 이서호는 해맑은 얼굴로 돌아왔다.

“갖다준대!”

“으, 으응. 빠르네…….”

어쩌다 보니 바이올린을 배우게 생겼다. 하다 보면 의외로 재밌을지도 모르지…….

***

일요일 저녁, 하윤이와 만날 시간이 되어 우리는 예약한 식당을 향했다. 매니저 형이 연예인들도 자주 오는 곳이라며 추천해 준 장소였다. 이전에 담당했던 걸그룹도 여기서 종종 회식했었다고.

그래서 그런지 분위기가 매우 고급스러웠고, 개별 룸이 완비되어 은밀한 만남을 갖기에 좋아 보였다. 무엇보다 직원들이 이미 연예인에 익숙해서 그런지, 다들 우리를 보고도 상냥한 서비스 미소를 장착하고 대해주는 게 마음이 편했다.

예약한 룸으로 안내받아 들어가자 친절하게 미닫이문까지 닫아줬다. 적당한 사이즈의 룸 중앙에 원형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요리가 올라가면 유리판을 돌려 덜어 먹는 형식이었다.

“이따 전화해. 데리러 올게.”

매니저 형은 같이 먹자는 말에도 하윤이가 불편할 거라며 자리를 비켜줬다. 우리 매니저 형 진짜 끝내준다니까. 매번 우리 편의를 봐주는 형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말 잘 듣는 아이돌이 되어야……지, 가 아니라. 이미 사고 치고 있네. 진짜 우리 형들 어떡하냐. 아무 생각 없이 자리를 잡았더니 형들이 서로 내 옆에 앉겠다며 내 머리 위에서 조용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여기 유찬 형 앉아요.”

“어? 으, 으응.”

“옆에 이한 형.”

“응…….”

“그리고 강현 형, 서호 형.”

나는 이서호 오른쪽에 앉은 뒤 옆자리를 비워뒀다.

“여기는 하윤이 자리예요.”

“야야, 진하온. 이거 개꿀잼이다.”

“……뭐가?”

“형들이 네 말에 꼼짝 못하잖아.”

키득대는 이서호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이게 좋은 건 아닌 것 같지만, 너라도 즐거우면 됐다……. 누구 한 명쯤은 신나야 할 거 아냐.

하윤이를 기다리며 메뉴를 고르던 중, 하윤에게 톡이 왔다. 식당 분위기에 압도되어 들어오지 못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귀여워 죽겠어, 진짜!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어리긴 어리다니까. 데리러 가야겠다. 내가 일어나자 형들의 고개가 경계 태세의 미어캣처럼 동시에 날 향했다.

“어디 가?”

“하윤이 못 들어오겠대요. 데리러 갔다 올게요.”

유찬 형이 물었지만, 정이한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자.”

강현 형도 일어서려는 조짐이 보였다. 나는 다른 형들도 따라나서기 전에 원천 봉쇄해버렸다.

“혼자 다녀올게요. 어차피 코앞인데요.”

원래는 형 중 한 명이라도 끼고 갔겠지만, 이제 그러기도 힘들어졌네. 괜히 한 명만 골라서 데리고 나간다는 게 껄끄러웠다.

“얌전히 있어요. 아니면 미워할 거야.”

일어났던 멤버들이 다소 불만 어린 표정을 지으며 착석했다.

“으햐햐햑!”

이서호 혼자서만 웃긴다며 배를 움켜잡았다. 휴대폰을 챙겨 들고 룸을 나가면서도 뒤를 확인했다. 정이한이 제일 불안한 듯한 얼굴로 날 보며 찡그리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문을 닫고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마주치는 직원들이 의례적으로 상체를 비스듬히 숙여 인사를 해왔다. 이러니 하윤이가 못 들어오지. 너무 우리만 생각해서 이런 자리를 예약했나, 살짝 후회됐다.

“어? 하온 선배님.”

진짜 얘는 잊을 만하면, 의외의 장소에서 계속 만나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이제는 익숙해진 교주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은 왜 여기 혼자 계세요?”

혼자 왔겠냐. 그러는 저도 일행은 어디다 두고 혼자 서 있는 건지.

“아는 동생이랑 밥 먹으려고요.”

멤버들도 함께 있다는 이야기는 쏙 빼놓았다. 상황을 보면 식사를 끝내고 나가는 것 같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인사하러 온다고 하면 귀찮으니까.

교주는 알 수 없는 묘한 시선으로 날 봤다. 기쁨? 설렘? 교주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긍정적이고 투명한 표정에 오히려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운명 같네. 어떻게 딱, 필요한 순간에 만나지.”

이게 뭔 소리야.

“저기 저 사람, 기억해줄래요?”

교주는 내 어깨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나도 모르게 교주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기품이 느껴지는 남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내가 왜?”

교주는 아이돌 미소 전형에 합격할 듯한 멋들어진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살짝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중에 저 사람한테 스킬 써줬으면 하거든요. 선배님이 원하시는 건 뭐든 들어줄 테니까, 지금은 부탁드린 거 기억만 해주세요.”

그리고 교주는 허리를 똑바로 세우며 가볍게 말을 이었다. 마치 평범한 인사라도 나눈 것처럼.

“여기 대체로 맛있더라고요. 아무거나 시켜도 맛있게 드실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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