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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모드 아이돌-203화 (203/320)

203.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이서호의 입술만 뚫어지게 봤다. 저 입에서 금방이라도 우리를 비난하는 말이 쏟아질 것 같았다. 길었는지 짧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침묵의 시간은, 이서호가 입술을 떼면서 끝났다.

“다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

우리를 원망하는 말에는 습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급기야 이서호의 커다란 눈이 일렁거리더니 눈물이 주륵 뺨을 타고 흘렀다. 두서없이 떠오르던 변명들이 이서호의 눈물과 함께 뚝뚝 떨어져 버렸다.

“왜 나만 빼고…….”

이서호는 입술을 사리문 채 정면에 있는 날 흘겼다. 힘이 꽉 들어간 아래턱에 새겨진 주름은 어떤 감정을 의미하는 걸까. 분노? 원망?

나는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호야.”

유찬 형이 내 어깨를 짚으면서 나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그제야 날 보던 이서호의 시선이 형에게 옮겨갔다. 막혔던 숨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기분이었다.

“혹시 들었어?”

“뭘…….”

눈물을 참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이서호의 아랫입술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하온이가 주말에 하윤이랑 저녁 약속 잡았대서 우리한테도 물어보러 왔었거든. 그렇지, 하온아?”

유찬 형은 이서호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확실히 한 걸음 떨어져서 보니 이서호는 그저 섭섭함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 했다. 이서호가 사실인지 추궁하듯 날 바라봤다. 나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맞아. 시간이 늦어서 형한테는 내일 물어보려고 했지.”

이서호에게 하윤이와 나눈 대화를 보여줬다. 이서호는 묵묵히 액정의 글자를 읽었다. 휴대폰에 고정되었던 시선을 떨군 후에도 이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서호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 대화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최근 있었던 일련의 일들 때문에 쌓여있던 감정이 터진 걸지도 모른다.

이서호는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토해내듯 뱉어냈다.

“……이게 전부는 아니잖아. 다들 나한테 비밀 만든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나 그렇게까지 눈치 없지 않아.”

말이 이어질수록 날카로운 어투에서 점점 힘이 쭉 빠졌다. 급기야 마지막엔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그냥 모르는 척했을 뿐이지.”

이서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울먹거리다가 다시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이건, 꽤 오래 참은 거다.

그 순간 형들 방에서 들리는 소리를 엿듣다가 이서호에게 걸린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서호는 수상쩍게 여겼지만 내가 말을 돌리자 넘어가 줬다. 뮤비 촬영 이후 뭔가 일이 있던 것 같다면서 날 찔러보던 이서호에게 애매하게 웃어주며 회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그동안 혼자만 소외되었다는 기분을 계속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 서호야…….”

“뭔데.”

유찬 형은 우물쭈물하다가 내 눈치를 봤다. 그러자 이서호가 폭발했다.

“이것 봐! 또! 또 나만 모르게! 왜 나만 왕따 시켜어어어……. 흐윽, 흐어엉…….”

대성통곡하는 이서호를 보다 못한 나는, 결국 질러버렸다.

“형들이 나 좋아한대!”

“헉.”

“하, 하온아!”

“흐끅, 끕?”

형들이 동시에 당황했고, 이서호는 울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봤다. 어차피 다섯 명 중 네 명이 엮인 일이다. 이 문제로 만일 일이 터지게 된다면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건 이서호였다. 그러니 이서호에게도 알 권리가 있었다.

이런저런 변명을 붙여봤자 사실 내가 질러버린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싫어. 저 천진난만한 녀석이 상처받아서 우는 꼴을 보기가 싫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나을 것 같아. 저렇게 우는 걸 보니 오히려 화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다니…….

“훌쩍. 그게 뭐, 어쨌는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묻는 이서호를 보자 말문이 막혔다. 이걸 내 입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 거야?

“형들이 너 좋아하는, 거, 크흥, 나도 알거든? 그게 뭐 새삼스러운 일이라고…….”

이서호는 손등으로 눈가를 슥슥 닦아냈다. 한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던 유찬 형은 각오라도 한 듯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이서호를 향해 똑똑히 말했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하온이랑 연애하고 싶다는 뜻이야.”

“……어?”

이서호는 눈을 홉뜬 채 여러 번 깜박였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파악하려는 듯한 시선이 이리저리 튀었다.

“그럼, 최근에 속닥거린 게 그거 때문이었어?”

“응. 우리 다 하온이한테 고백했는데 아직 답을 못 들어서. 하온이 필사적으로 꼬시는 중이야.”

유찬 형이 모든 걸 털어 놓았다. 좋아, 얼마든지 와라. 나는 이서호의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전부 받아 줄 각오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상처받지 말자, 진하온. 이서호가 화내는 건 당연한 거니까.

“서호야…… 미안해. 하지만 하온이는 잘못 없어…….”

와중에 나를 감싸면 안 되지, 정이한! 지금은 이서호를…….

“아, 뭐야! 그런 거였어?”

으, 으응? 갑자기 이서호의 분위기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눈물 자국이 선연한 뺨을 하고서는 무거운 짐이라도 떨군 것처럼 상쾌하게 웃는다. 감정 변화를 따라갈 수 없어…….

“……서호 형, 화 안 나?”

혹시라도 또 심기를 건드릴까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이서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내가 왜?”

“이런 일, 조금이라도 새어 나가면 우리 그룹에 치명적이잖아. 어렵게 이룬 꿈인데 우리가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는 거니까…….”

이서호는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

그거까진 생각하지 못했나 보네. 이서호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뭔가를 고민하는 듯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뭔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 그건 걱정 안 해. 형들 믿으니까. 솔직히~ 우리 중에 사고 칠 사람은 나 뿐이잖아. 게다가 형들도 진하온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한 것도 아니고.”

뭐지? 이서호 철들었나? 이 녀석 엿보기 스킬을 갱신해봐야겠다.

“형들이랑 진하온이 나 빼고 얘기한 이유는 알았으니까 됐어. 진하온을 연애 대상으로 본다는 걸 나한테 말하기 어렵긴 했겠네.”

이서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 그룹에 뭔 심각한 일이 생긴 줄 알았어. 지난번에 진하온이 형들 대화 엿들으려고 하기도 했고.”

악! 그걸 말하면 어떡해! 형들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걸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따갑다, 따가워.

“종종 형들끼리만 모여서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진하온까지 넷이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흘렀잖아. 나한테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고.”

이서호는 그때의 서운함이 다시 느껴지는지 아랫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다들 나를 못 믿는 줄 알았어. 나는 잘하는 것도 별로 없고, 성격도 급하고, 사고뭉치니까. 그래서 나를 피하는 줄 알았어…….”

설마, 이서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다 충동적으로 이서호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내가 형들에게 위로받았던 것처럼 이서호의 등을 토닥였다.

“아니야, 서호 형. 그런 거 아니야.”

평소에는 조금만 붙어도 장난치며 도망 다니던 이서호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얌전히 내 품에 안겨서 어색하게 움찔거리더니 푸흐, 하고 내 웃음을 터트리며 날 마주 안아줬다. 다행이다. 오해가 풀린 것 같아.

“그리고 왜 잘하는 게 없어? 서호 형 잘하는 거 있잖아.”

“뭐? 사고 치는 거?”

평소의 이서호처럼 장난기가 묻어나는 어투였다. 나는 이서호가 질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거.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지고, 그 사람들한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거. 그것도 재능이야.”

“맞아. 그런 건 서호 못 따라가지.”

유찬 형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두 팔을 크게 벌려 우리의 등에 둘렀다.

“나 서호도 좋아해.”

“이, 이한 형! 날 향한 마음을 접어줘!”

정이한이 푸하, 웃음을 터트리면서 우리를 겹쳐 안았다. 정이한을 경계하는 이서호가 내 품에서 꼼지락거렸다.

“서호도 소중하단 소리야. 우리는 다섯 명이어야 완전한 느낌이야.”

“아, 이 형들. 내 손발 다 쪼그라들겠다.”

이서호가 툴툴거렸다. 하지만 잔뜩 치켜 올라간 이서호의 입꼬리는 본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강현아! 이럴 때 빠지면 안 되지!”

“……그런 짓을 왜 자꾸.”

강현 형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이서호가 고개를 쭉 빼서 내 어깨 너머를 봤다. 그러자 짙은 한숨을 쉰 강현 형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됐어?”

결국 강현 형까지 합류해 우리 다섯 명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강현 형은 잠시 주저하다가 이서호의 머리에 손을 올려 툭툭 두들겼다.

“이서호. 미안했다.”

“강현 형한테 사과받았어!”

동그랗게 뜬 눈으로 헤실거리는 이서호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역시 너는 좀 까불이 상태여야 해.

“근데 나 배고파.”

이서호가 중얼거렸다. 알고 보니, 이서호는 배고파서 우리 방에 들렀다가 우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형들 방에 있나 싶어서 가보려던 찰나에 우리가 나온 거라고…….

타이밍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얘는 우리 얘기 다 듣고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질 않네?

“서호야, 우리 아직 컴백 전이야.”

유찬 형의 제지에 이서호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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