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02화 (202/320)

202.

정이한은 웃고 있는 날 다정한 시선으로 보면서 매끄럽게 입매를 올렸다. 어쩐지 나보다 더 기뻐 보인다?

“저 하윤이랑 마저 대화할게요.”

통화하는 것도 아닌데 정이한은 입을 다문 채 얌전히 옆을 지켰다. 이 인간, 쫓아내지 않으면 침대에서 내려가지 않을 생각인가 봐. 뻔히 보이는 속셈이 그저 귀엽기만 해서 가만히 내버려 뒀다.

하윤이와 저녁 약속 날짜까지 잡은 채 대화를 끝냈다. 물론 혼자서 저녁 약속에 갈 생각은 없었다.

“저 이번 주말에 하윤이랑 저녁 먹을 건데 형도 같이 갈 거죠?”

“당연하지.”

“그럴 줄 알고 형들도 간다고 했어요.”

정이한은 눈을 반짝이며 “우리 데이트하는 거야?”하고 물었다. 그러다 이내 “형들?”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되는 멤버들 있으면 다 같이 갈 거라고 했거든요.”

웃음기를 머금은 대답에 정이한은 일순 섭섭해했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생글거렸다.

“그래. 다 같이 정정당당하게 하기로 했으니까.”

“그러면 제가 서호 형이랑 방 같이 써야 하는 거 아닌가?”

“뭐? 안돼! 이건 내가 게임 승자로서 얻은 당당한 권리야.”

“음흉한 권리 아니고요?”

내가 놀리듯 말하자 정이한이 눈매를 삭 접고서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는 고개를 뒤로 물렸다.

뭐, 뭐야. 왜 이래?

“음흉한 게 뭔지 보여줘도 돼?”

“아니요! 제가 잘못했어요!”

나는 얼른 항복하면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합장했다. 아쉽다면서 입맛을 다시는 정이한을 보면서 놀리는 것도 선을 잘 지켜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대뜸 정이한이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버렸다.

“뭐 해요?”

“그냥, 좋아서.”

“뭐가요?”

정이한은 웃는 가면이라도 쓴 사람처럼 연신 생글거리고 있었다. 이불째로 내 다리를 꼭 끌어안고 뺨을 비비적거리며 응석 부렸다.

“다음에도 고민 있으면 뭐든지, 꼭 상담해줘.”

정이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부끄러운 듯 뺨을 붉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혼자 고민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쿠, 쿨럭.”

또 불시에 습격하네…….

“그냥 톡 어떻게 보낼지 상담한 것뿐인데 너무 거창한 거 아니에요?”

당황하면 아무 말이나 꺼내는 내 주둥이가 또 제멋대로 말을 뱉어냈다. 그러자 정이한이 뒹굴거리던 몸을 일으켜 세워 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 진지한 태도에 장난으로 넘기려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하온이 문제라면 사소한 건 하나도 없어.”

“…….”

“예전에 그 사람 때도, 하온이는 혼자 고민하고 결정했잖아. 우리한테는 그저 통보했었고.”

아……. 소파남 이야기구나. 정이한이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통보…가 아니라 도와달라고 한 거였어요.”

정이한은 살포시 웃으면서 고개 저었다.

“우리가 안 된다고 해도 혼자 할 거라고 했잖아.”

“…….”

“그래서 기쁜 거야. 비록 하온이한테 사소한 일이어도 상담을 청해 줬다는 게. 나는 네게 많은 걸 의지하지만 하온이는 항상 혼자 결정하니까.”

내가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 나는 항상 혼자 고민하고 혼자 답을 냈다. 그게 익숙하니까. 오히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상담하는 게 더 낯선 일이었다.

그런데 나, 조금 전에 되게 자연스럽게 정이한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나?

“…….”

정이한은 웃으면서 내 턱을 받쳐 올렸다. 그제야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이마에 콩, 하고 정이한의 이마가 부딪혀왔다. 상냥한 온기가 나의 두 뺨을 감쌌다.

“너도 의지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어.”

내가 멤버들을 파악하고 있는 만큼 멤버들도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구나. 그게 우리들의 관계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 같아서, 어쩐지 마음이 몽글몽글하게 차올랐다. 의지해도 돼.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혼자 어떻게든 해내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나에겐 도와줄 사람들이 있었다. 아, 이거 처음 유찬 형이랑 만났을 때 내가 형한테 했던 말이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멤버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었지. 형은 나와 다르게 친한 사람들이 많으니 그러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내게도 해당하는 말이네. 지금까지 다들 날 소중히 여겨준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 마음속의 고민을 상담해도 된다고까지는 이상하게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네. 맞네. 예전처럼 미련하게 혼자 고민할 필요 없구나.

어쩌면, 어쩌면 혹시.

교주의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을까. 언젠가는 내 진짜 삶에 관해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과거를 말하고, 홀로 느꼈던 외로움을 덜어내도 되는 걸까.

하지만 허무맹랑한 말을 그 누구도 믿어줄 리가 없잖아. 뭔가 눈에 보여 증명할 수 있는 거면 모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어느 순간 웃음이 나왔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그저 하윤이한테 어떻게 톡을 보낼지 상담한 거였는데. 내가 혼자 키득거리자 정이한이 뚱한 얼굴로 날 봤다.

“왜 웃어. 내가 믿음직하지 않아서 그래?”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냥, 재밌는 생각이 나서요.”

“그래? 그게 뭔데?”

“음. 비밀이에요.”

나는 방긋 웃으며 속내를 감췄다. 왠지 입 밖으로 내기 부끄럽단 말이야…….

“아~ 너무해!”

“이제 형 침대로 돌아가요. 저 잘 거니까.”

정이한은 토라진 척 콧바람을 세게 뀌더니 제 침대로 굴러 들어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말은 참 잘 듣는단 말이지.

정이한은 흰오목눈이 인형을 붙잡고서는 ‘하온이가 볼일 끝냈다고 날 쫓아냈어. 넌 어떻게 생각하니, 하온눈이야…….’하면서 혼잣말을 했다.

황당한 마음에 그 모습을 보다가 하윤이 때문에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오목눈이 인형을 보니까 생각났네.

“이한 형.”

“응? 왜?”

나는 침대에서 내려가며 정이한에게 손짓했다.

“따라와요.”

“어디 가는데?”

정이한은 궁금해하면서도 착실히 날 따라 일어났다. 거실엔 아무도 없군. 이서호는 제 방에서 게임하고 있을 테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는 곧장 정이한을 데리고 형들의 방문을 두들겼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닌 덕에 형들은 우리를 환영해줬다. 이유는 묻지도 않고 그저 내가 온 게 좋은 모양이었다. 나는 형들을 주르륵 앉힌 뒤 내게 집중시켰다.

“오늘 촬영에서 형들 너무 과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들키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세 사람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결국 뭐가 문제인지 내 입으로 하나하나 다 말해줘야만 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심각한 사람은 나 한 명뿐이었다.

“하온아, 자고로 남돌이란 말이야.”

유찬 형은 별일 아니라는 듯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멤버들 간에 우정이 깊을수록 좋을수록 셀링 포인트가 되는 거야.”

우리는 ‘우정’이 아니게 됐잖아. 그게 문제인 건데? 하지만 유찬 형이 괜한 말을 하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일단 뒷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내린 편견은 우리 사이를 우정으로만 보지, 다른 감정으로 여기지 않아.”

……그런가?

“게다가 우리는 이미 막내 사랑으로 유명하잖아. 그런데 갑자기 우리가 하온이를 평범하게 대해 봐. 그럼 오히려 이상해지는 거야. 자칫하면 불화설까지 돌 수도 있어.”

……그, 으런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이것 봐.”

유찬 형은 내게 너튜브 영상을 보여줬다. 유찬 형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썸네일로 지정되어 있었다.

제목은 <디아스 리더의 막냉이 주접 모먼트>였다. 유찬 형이 뿌듯해하며 영상을 재생했다.

“우리 디어리도 인정하는 내 주접이 이 정도야.”

“30분…… 도 넘네요?”

“응.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싸우게 되더라도 방송에서는 무조건 부대껴야 할 것 같지 않아?”

“……그러게요.”

“그러니까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네에…….”

뭐지? 뭔가 말린 것 같은데. 그런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형의 말은 다 맞는 것 같단 말이지.

“게다가 우리가 선 넘은 발언 했으면 매니저 형한테 혼났을걸?”

대수롭지 않은 듯, 툭 던져낸 정이한의 말도 제법 그럴듯했다. 만약 우리가 이상한 낌새를 보였다면 귀신 같은 매니저 형이 조용할 리 없었다. 진짜 내 기우였나 봐…….

“그런 의미에서, 하온아.”

“네?”

유찬 형이 날 향해 두 팔을 쫙 벌렸다.

“오늘은 형아랑 잘까?”

“……아니요.”

유찬 형은 잠깐 아쉬워했지만, 딱히 진심이 아니었는지 더는 우기지 않았다.

“아, 맞다. 그리고 하윤이랑 이번 주말에 저녁 먹기로 했거든요. 같이 가실래요?”

“어, 당연하지!”

“나도 가.”

“네, 그럼 다 같이 저녁 먹고 연습해요.”

내일 이서호한테도 물어봐야겠다. 형들은 일어서려는 나와 정이한을 굳이 문 앞까지 배웅해주겠다고 나섰다. 거실만 가로지르면 되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말리는 것도 시간 낭비였으니 내버려 뒀다.

하지만 방문을 연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서 이서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설마 여기 계속 있었어? 우리 대화를 전부 들은 건 아니겠지?

평소라면 신나게 떠들어 댔을 이서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 서호…….”

뒤늦게 이서호를 발견한 유찬 형도 움찔거렸다. 이서호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우리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저 촐랑이가 얌전할 리가 없는데. 우리 대화를 들은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뭐라고 변명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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