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01화 (201/320)

201.

모두의 시선이 내 화이트보드를 향했다.

“저는 저희 매니저 형이랑 갈래요.”

“정곤 형이 여기서 왜 나와…?”

유찬 형은 어안이 벙벙하다는 얼굴로 홀린 듯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방긋거렸다. 카메라 한 대가 머리를 돌려 매니저 형을 잡았다. 촬영장 구석에 서서 팔짱 끼고 있던 형이 입을 떡 벌렸다.

“정곤 형이 특수부대 출신이거든요. 아무래도 멤버 형들보다 생존에 유리할 것 같아요.”

“이, 이럴 수가…….”

유찬 형은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좌절했다.

“나 특수부대 입대할 거야.”

정이한 선 넘네. 이 방송을 볼 디어리들 곡성이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았다.

“이한 형은 군대 가려면 아직 멀었어요.”

“으윽.”

정이한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고, 강현 형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은근슬쩍 내게 근육을 어필했다. 이서호가 ‘저 형들 또 시작이네.’라며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었다. 그 틈에서 나는 곤란해하는 매니저 형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형! 저랑 무인도 가주실 거죠?”

나는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만드는 매니저 형을 보고 흡족하게 웃었다.

“정곤 형이 최대 라이벌일 줄이야.”

유찬 형이 가느다란 눈으로 매니저 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예능에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말라고…….

“네~ 이것으로 디아스 형들은 막내 하온 씨를 짝사랑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MC가 쾌활하게 웃으면서 멘트를 날렸다. ‘짝사랑’이라는 비유 때문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애써 웃기는 했는데, 어색하지 않게 잘 웃고 있는 건지는 자신이 좀 없었다.

“아~ 그러니까요. 우리 막내가 언제쯤 제 마음을 받아 줄는지.”

불안한 건 나 뿐인지, 유찬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슬픈 척 연기했다.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검지를 구부려 콕콕 찍어내자 MC가 폭소했다.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넘어갔고, 몇 개의 질문을 더 주고받은 후에 우리는 다음 코너로 넘어갔다.

***

촬영이 끝난 뒤 밴에 오르고 나서야 꽉 막힌 듯한 숨을 토했다. 오늘 촬영에서 형들의 위험한 발언은 계속 이어졌었다.

심심할 때 뭐 하냐는 질문에 유찬 형은 날 보고 있으면 즐거워서 심심할 틈이 없다고 했고, 가지고 있는 물건 중 소중한 게 뭔지 물었을 때는 정이한은 나한테 받은 흰오목눈이 인형이라고 대답했다. 최근 기억에 남는 TMI를 묻는 말엔 강현 형이 뮤비 촬영 끝나고 나와 같이 잤다는 발언을 하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덕분에 나 혼자 지레 놀라서 가슴을 벌렁거렸다. MC는 그저 ‘막내 사랑에 진심인 그룹’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라 괜찮은 것 같았지만…….

촬영하는 동안 내 정신력은 갉작갉작 갉아 먹혔다. 간단한 토크쇼 촬영이었는데도 체력 상태가 처참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숙소 가면 형들 모아 놓고 혼내야겠어. 평소에는 별다른 일 없는 것처럼 굴더니, 왜 방송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날뛰는지 모를 일이었다.

보통은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헐, 하윤이 떨어졌네?”

유찬 형이 전한 소식에 사고가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다.

“오디아이요? 하윤이 탈락했어요?”

“어, 어어. 기사 링크 보내줄게.”

나는 얼른 톡방에서 유찬 형이 올려준 링크를 클릭했다. 정말이었다. 방송이 나간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는데 지금 연락해도 괜찮은 걸까. 나는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주저했다.

“하윤이한테 연락해 보려고?”

정이한이 날 힐끔거리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윤이와 대화했던 톡방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하윤이가 탈락한 이후부터 대화가 뚝 끊겼다는 걸 깨달았다. 그 전엔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안부 인사를 꼬박꼬박 건네줬었는데…….

아, 그렇구나.

매번 하윤이가 먼저 연락을 줬었어.

내가 먼저 연락했을 때는 하윤이가 악편의 희생양이 되는 게 싫어서, 그걸 돕기 위해서, 가 전부였다. 그 뒤에는 여론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신경 쓰지 않았고, 매번 하윤이에게 인사가 와서…….

“하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하윤아, 방금 알았]

[하윤아, 조금 전에 들었는데]

[기분 괜ㅊ]

이리저리 쓰다가 결국 나는 아무 말도 보내지 못하고 톡을 꺼버렸다. 꽤 시간이 지나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 진짜 말주변 없네.

“톡 보냈어?”

“……아뇨. 못 보냈어요.”

“왜?”

“벌써 사 일이나 지났잖아요. 왠지 너무 늦은 것 같아 미안해서요…….”

알 수 없는 부채감이 날 지그시 내리눌렀다. 하윤이가 열심히 한 걸 내 눈으로 보고, 겪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노력한 보답을 받지 못했을 때 느끼는 좌절과 상실감을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연락하기 힘들어질 텐데 괜찮겠어?”

그건 나도 안다. 하윤이가 먼저 연락해 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계속 멀어져서 다음에 번호를 바꿀 땐 연락처를 공유하는 것조차 어려워지겠지.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온 것도 하윤이의 노력 덕분이었잖아. 이번엔 내가 먼저 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윤이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정이한의 팔에 기대버렸다. 차라리 이대로 포기할까? 처음에 바랐던 대로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 거잖아.

하지만 나는 숙소에 도착해 샤워하고 난 뒤에도 하윤이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잠이라도 잘까 싶어서 침대에 올랐지만 나답지 않게 휴대폰을 꼭 쥐게 되었다.

되게 싱숭생숭하네……. 안 되겠다. 이런 마음으로 연습한들 제대로 되겠어? 하윤이랑 이야기를 하자. 그리고 연습에 집중하는 거야.

오후 10시.

연락하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이 시간에 하윤이가 자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결심했다고 아까는 찾을 수 없는 답이 번뜩이는 건 아니었다. 나는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한 형. 도와줘요…….”

“응. 뭔데?”

정이한이 방긋 웃으면서 곧장 내 침대로 건너왔다. 내가 침대 안쪽으로 이동하자 자연스럽게 옆에 착석한 정이한이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하윤이한테 뭐라고 보내야 할까요?”

“그걸 아직도 고민하고 있었어?”

혼자 고민하면 밤을 새워도 답이 안 나올 것 같은걸…….

“첫 메시지가 어려운 거지? 그냥 평범하게 말 걸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될까요?”

“응. 하윤이는 널 좋아하잖아. 만약 내가 하윤이라면 기뻐서 방방 뛸걸.”

“그건 형이 절…….”

좋아한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정이한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맞아,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런 거긴 해. 그치?”

“윽.”

기껏 말을 아꼈건만 보람 없네, 진짜. 멋쩍음에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더니 정이한이 작게 어깨를 떨며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을 쑥 뻗어서 내 휴대폰을 가져가 버렸다. 방심한 틈에 비어버린 손을 멍하니 내려봤다. 내 휴대폰을 왜 가져갔지?

“자, 보냈다.”

“……뭐라고요?”

화들짝 놀라서 정이한에게서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나: 하윤아, 자?]

“이, 이걸 이렇게 보내면 어떡해요!”

“그거면 돼. 기다려 봐.”

자신만만하게 구는 정이한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잠시 후 숫자 1이 사라졌다. 나는 정이한의 존재도 잊은 채 액정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시선을 고정했다.

[하윤: 헉! 아뇨 >

[하윤: 형 바쁜거 아니에요?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ㅠㅠ!]

여느 때와 같은 친근하고 명랑한 어투였다. 긴장이 탁 풀려서 정이한을 돌아봤다. 진짜 저걸로 되는 거였어? 정이한은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더 도와줄까?”

“……아니요.”

하윤이의 태도가 변함없음에 안도한 나는 두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 자판을 두드렸다.

[나: 미안해... 내가 늦게 봐서 오늘 소식 들었거든.]

[하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윤: 저 이미 다 털었어요!]

[하윤: (토끼가 주먹 쥐고 있는 이모티콘)]

꿈이 미끄러질 때의 좌절감은 쉽게 이겨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날 위해 거짓말하는 하윤이에게 미안했고, 어린데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함이 기특했다. 이래서 전생의 하윤이가 사람들에게 귀여움받았던 거구나. 내게만 못 된 동생이었을 뿐, 남들에게는 잘했었나 보다.

[나: 다음엔 꼭 될 거야. 하윤이는 열심히 하니까.]

하지만 1이 사라졌음에도 한참 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나는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서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이한에게 다시 도움을 구하려고 했을 때였다. 하윤이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윤: 죄송해요. 사실 저.......]

[하윤: 으음...]

[하윤: 아이돌 포기했어요...]

“아.”

그래서 나한테 먼저 연락을 못 했었구나. 나한테 이 말을 하는 게 어려워서. 나는 쓰게 웃으면서 답장을 보냈다.

[나: 하윤이의 인생이잖아. 왜 나한테 미안해?]

[하윤: 형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는데 면목 없어서요...ㅠㅠ]

[나: 아니야. 그런 생각하지 마. 다음에 밥이라도 먹자. 형이 사줄게.]

[하윤: 제가 계속 연락해도 돼요? 이제 연생도 아닌데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는 깜짝 놀라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나: 당연하지. 내가 바쁘면 대답 늦어질지도 모르지만 언제든지 연락해.]

[하윤: (오열하는 토끼 이모티콘)]

[하윤: 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하윤: (하트를 날리는 고양이 이모티콘)]

[하윤: 제가 형 진짜 좋아하는 거 아시죠?ㅠㅠㅠ]

하윤이가 쉴새 없이 보내는 톡을 보면서 키득거렸다.

“해결됐어?”

“네. 형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말했잖아. 좋아할 거라고.”

가슴을 내민 채 턱을 치켜드는 정이한을 보고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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