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뮤비 촬영지에서 돌아온 이후 우리의 일상은 의외로 평소처럼 흘러갔다. 하지만 이따금 형들의 마음이 의식돼서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몰려드는 어색함을 버티지 못해 도망쳤다.
내가 피한다는 걸 눈치챘을 텐데도, 형들은 개의치 않았다. 다시 평소와 같은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나를 대했다. 연습할 때 강현 형은 여전히 호랑이 선생님이었고, 유찬 형은 힘들 때마다 날 끌어안는 걸로 마음을 치유하려고 했다. 정이한은 언제나 그렇듯 내 껌딱지였고.
뮤비 촬영이 끝나고 2주가 지나서야 나는 예전처럼 형들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한동안 삐걱거린 탓에 수상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파고들려던 이서호도 이제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시간이 없어서 강제로 정신 차렸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게, 이제 정말 컴백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컴백 이후 각종 프로그램에 우리 얼굴을 내비치기 위한 스케줄이 빼곡하게 잡혔다. 거기에 신곡 안무 연습까지. 매일같이 하드한 일정을 소화하기에도 바빠 연애 감정까지 신경 쓰는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케이블 방송 <내 아이돌> 출연 일정이 있었다. 컴백 이틀 전에 방영될 예정이라, 방송은 약간의 앨범 스포일러를 하면서 진행됐다.
“그럼, 다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MC가 발랄하게 운을 뗐다. 우리는 다 같이 환호하며 어떤 질문이 들어올지 궁금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무인도에 간다면 꼭 데려가고 싶은 멤버와 그 이유는?”
아, 무인도. 굳이 저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우리 리얼리티 홍보도 해주려는 건가 봐. 그 답례로 나는 PPL로 받은 탄산수를 대놓고 따 마셨다.
“그러고 보니 디아스 멤버분들은 실제로 무인도에서 리얼리티를 찍으셨었죠?”
“앗! 맞아요!”
이서호는 우리가 무인도에서 겪었던 일들을 재치 있게 풀어냈다. 그리고는 폭풍이 몰아치는 날 이야기를 하다가 돌연 말을 멈추었다.
“뒷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디아스 너튜브 와 W라이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재잘거리면서 윙크를 보내는 모습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얄미운 짓을 했는데도 귀여운 걸 보니 저럴 때는 꼭 천생 아이돌 같다니까.
“여기서 이렇게 홍보를 한다고요?”
MC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쾌활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자, 그럼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 화이트보드에 데려가고 싶은 멤버 이름을 적어주세요! 컨닝하면 안 됩니다.”
“이걸 왜 컨닝해요~”
이서호는 낄낄거리면서도 제 화이트보드를 팔로 감싸며 경계했다. 누가 그걸 엿본다고 그러냐.
누굴 쓰지. 나는 화이트보드에 검은 점만 톡톡 찍어내며 고민했다.
무인도에 같이 가면 든든할 것 같은 사람은 강현 형이긴 해. 뭐든 뚝딱뚝딱 잘 만들어내니까 편할 것 같다. 정이한이랑 가면 왠지 굶어 죽을 걱정은 없을 것 같고, 유찬 형이랑 있으면 몸은 고될지언정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이서호는 위험한 상황에 부닥쳐도 심각한 줄 모르고 놀다가 망할 것 같은데?
“하온 씨?”
“네?”
“하온 씨만 남았어요!”
“헉. 진짜요?”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화이트보드를 뒤집어 놓은 상태였다. 나만 아직도 못 적었어? 나는 허겁지겁 글자를 휘갈겨 적은 뒤 화이트보드를 뒤집었다.
“됐습니다!”
다들 왜 이렇게 빨리 적었지? 설마 이서호 빼고 전부 내 이름을 적은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럼 유찬 씨부터 한 분씩 공개하겠습니다!”
유찬 형이 화이트보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어? 의외네요?”
“네? 왜요?”
유찬 형이 반문하자 MC가 작위적으로 광대를 끌어 올린 채 능글맞게 굴었다.
“아~ 디아스가 막내 사랑으로 유명하다고 들었거든요! 막내인 하온 씨 데려간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뜬소문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나 봐요~”
“아, 아니에요. 저희 막내 사랑에 진심인 그룹 맞습니다.”
유찬 형은 쓸데없이 진지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유찬 씨는 강현 씨를 골랐는데요!”
“맞아요. 일단 강현이랑 제가 룸메거든요. 강현이는 워낙 이것저것 다 잘해서 같이 있으면 든든할 것 같아서요.”
“그럼 하온 씨는?”
“하온이는 저질 체력이라 안 돼요. 고생은 원래 형들이 하는 겁니다.”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태도였다. 저질 체력이라니……. 너무하네. 나도 할 땐 하는데.
“유찬 형, 나도 동생이야.”
“응, 넌 강현이잖아.”
“……허.”
강현 형이 고개를 저으면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이한 씨도 강현 씨를 적었네요?”
“아, 네. 하온이 빼고 남는 멤버들 중에 골랐는데, 강현이가 역시 생존 확률이 높을 것 같아서요.”
“왜 하온 씨를 뺐는데요?”
“전 원래 소중한 건 아끼는 타입이라서요.”
“이, 이한 형!”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정이한을 부르짖었다. 정이한은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 막내는 소중하거든요!”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MC는 입을 쩍 벌린 채 우리를 보다가 팔을 북북 문질렀다.
“워어……. 진짜 이 사람들 막내 엄청 좋아하네.”
유찬 형과 정이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인정받아서 좋다나, 뭐라나. 여기서 부끄러운 건 나 혼자인가 봐. 나는 뜨거운 목덜미가 진정되길 바라며 괜히 보드 판 끝을 만지작거렸다.
“이쯤 되니 강현 씨 대답도 궁금하네요. 어디 보자, 강현 씨는…… 어? 하온 씨 적었네요.”
“네. 저는 옆에 두고 지킬 자신 있어서요.”
“강현 형, 저는 지켜줘야 할 만큼 약하지 않아요!”
아, 물론 형에 비하면 내가 좀 빈약한 건 인정한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보호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알아.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윽.”
진짜 이 형 훅 들어오는 데 선수네. 이러면 할 말 없잖아…….
“아니, 둘이 연애하세요?”
……우리 대화가 이런 질문이 들어올 정도였나? 나 너무 마음 놓고 있었나? 정신 차려야 되는 거 아냐?
“그렇게 보여요?”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나와 달리 강현 형은 무척 태연해 보였다. 오히려 아주 멋진 미소를 매단 채 기쁜 듯 웃었다. 그러자 MC가 디아스 막내 사랑은 소문이 너무 축소된 것 같다며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뻔뻔하면 되는 거였나?
“지금 서호 씨도 하온 씨 적었거든요? 아, 이제 물어보기 좀 겁나는데…….”
이제 MC는 이서호를 경계했다. 이서호는 형들이랑 달라서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저분은 그걸 모르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서호가 손바닥을 펼쳐 앞으로 내밀더니 정색했다.
“저는 형들이랑 달리 정상입니다.”
“그럼 우린 아니야?”
“형들은 과하다니까. 진짜 이거 보시는 분들, 저 형들 지금 방송이라고 얌전떠는 거예요. 숙소에서는 더 심하다니까요? 나 혼자 괴롭지이이!”
“이게 얌전한 거라고요?”
황망한 듯 중얼거리는 MC를 보면서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형들이 내게 고백한 이후로 나한테 더 잘해주는 것 같긴 해. 차라리 나도 형들처럼 뻔뻔하게 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슬그머니 말을 얹었다.
“요즘 부쩍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이서호가 날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는 “요즘이라니? 아니거든! 처음부터 그랬거든!” 하고 부정했다.
“그, 그랬어?”
“아니~ 그걸 어떻게 모르냐?”
“서호야, 너도 만만치 않아.”
유찬 형이 방긋 웃으면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촬영 중에 휴대폰 꺼내도 되는 거야? 도대체 뭘 보여주려고 그러지? 말려야 하는 MC도 흥미가 생긴다면서 눈을 반짝였다. 이서호 혼자 좀 찜찜하다는 듯 유찬 형의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그렇게 나온 장면은…….
- 서호 씨, 왜 하온 씨만 보면 도망쳐 다녀요?
- 쟤, 쟤가 너무…….
얼굴을 붉힌 이서호가 뒤를 힐끔거리자 루비로 분장한 내 모습이 클로즈업됐다. 이거 우리 너튜브에 있는 비하인드 영상이네.
- 예뻐서…….
“와아아아아악!”
이서호가 벌떡 일어나 손을 휘적거렸다. 이 장면 그대로 방송에 나가면 난리 나겠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이서호가 당혹스러워하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지, 진하온. 너, 너도 저거 알고 있었어?”
“응. 예전에 유찬 형이 보여줬어.”
“아오! 아, 내가 잠깐 미쳤던 거다? 진심이 아니야. 알지?”
“내가 그렇게 예뻤어~?”
“아아악!”
이서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쳤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한차례 폭소가 지나간 뒤 MC는 자연스럽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이서호에게 날 선택한 이유를 물었다.
“우으……. 그냥 쟤랑 가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MC는 지금까지 들은 대답 중에 제일 정상적이라며 칭찬했다. 그러자 기가 되살아난 이서호가 “그렇죠? 저만 정상이라니까요!” 하면서 으쓱거렸다. 하여간 단순한 녀석.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형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었다. 제각각의 기대감을 드러내는 눈빛을 보니 갑자기 부담스러워졌다.
이거 괜찮으려나.
나는 무릎에 엎어둔 화이트보드를 번쩍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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