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참는 것 같아서 상체를 일으켰다. 할 말 있으면 해도 된다는 의미로 고개를 들어 올렸더니, 당황한 정이한이 허둥거리면서 손을 마구 저었다.
“아, 아니. 지금은 아니고.”
그때 유찬 형이 상큼하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하온이, 눈 좀 붙일래? 저녁 좀 늦게 먹을 것 같으니까 먹을 때 깨워줄게.”
유찬 형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정이한을 끌고 가버렸다. 분명 정이한이 ‘지금은’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러면 이따 할 말 있다는 거 아닌가. 눈매를 좁힌 채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소파와 몸을 합체시켰다. 때 되면 부르겠지, 싶어서였다. 게다가 정이한이 할 말이라면 뭐…… 조금 뻔하기도 했고.
“서호 형.”
“으응…….”
“바닥 더러울 텐데 그만 올라와.”
나는 여전히 애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이서호를 불렀다. 유찬 형과 이서호는 사라졌고, 강현 형은 안 보였다. 거실에 남은 건 우리 둘뿐이니 내 체력 회복을 위해서는 이서호가 필요했다.
“……귀찮아.”
이서호는 보란 듯이 바닥에 뺨을 비비적거리면서 손을 휘적거렸다. 나는 소파에 매달린 채 발만 쭉 뻗어서 이서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아, 왜에~”
얘는 더러움의 개념이 없나?
“형, 아이돌이 그렇게 더럽게 구는 거 아니다.”
“내 어깨에 발 올린 아이돌은 어느 그룹의 누구신데?”
“바닥보다 내 발이 깨끗해.”
이서호 앞에서 나는 언제든지 뻔뻔해질 수 있었다. 거울에 얼굴이나 비춰 보라는 내 말에 귀찮아하던 이서호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가 가득 묻은 뺨을 보면 당장 세수하고 싶어지겠지. 상식적으로 우리가 이 펜션을 빌린 사이 청소한 사람이 없는데 당연히 바닥이 더럽지 않겠냐고. 호텔처럼 매일 청소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미친! 이게 뭐야! 개더러워!”
“욕했어?”
“헙. 유찬 형한텐 비밀이다?”
이서호가 주변 눈치를 보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일단 세수하고 와.”
“어어. 하는 김에 목욕도 해야겠다.”
어? 이게 아닌데? 이서호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저 녀석이 목욕한다고 했으면 저건 욕조에 물 받아서 1시간 정도 논다는 뜻이었다. 진짜 잠이나 자야 할까 봐.
***
“하온아, 일어나자. 밥 먹어야지.”
나를 살살 달래는 나긋한 목소리가 단잠을 깨웠다. 잠깐 자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푹 잠들었던 것 같다.
“저 졸려요…….”
“그래도 밥은 먹자.”
유찬 형이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내 팔을 쭉쭉 잡아당겼다. 나는 어리광 부리면서 유찬 형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품으로 파고들었다.
“밥 먹기 싫어?”
먹기 싫은데. 아니, 그보다는 움직이기가 싫었다. 내일까지 쉴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벌써 몸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형, 지금 몇 시예요?”
“9시.”
나는 눈을 비비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더 자면 밤에 잠을 못 잘지도 모른다. 연신 터져 나오는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쭉 켰다. 그래도 잠을 푹 잔 덕에 체력이 좀 회복돼서 움직일 만하네.
“근데 저녁을 이렇게 늦게 먹어요?”
우리가 촬영을 끝내고 펜션으로 돌아왔을 땐 7시경이었다. 그래서 8시엔 먹을 줄 알았는데.
“다들 피곤해해서 씻고 1시간쯤 쉬었지. 밥 먹고 더 자고 싶으면 그때 자.”
“네에.”
나는 눈을 비비적거린 뒤 유찬 형을 따랐다. 이미 우리의 마지막 만찬인 바비큐 준비가 끝나 있었다. 그릴에서 익어가는 고기 냄새에 잠에 밀려있던 식욕이 고개를 들었다.
“진하온, 삼겹살 먹을래? 꽃등심 먹을래?”
“아무거나.”
“‘아무거나.’는 없어. ‘아무거나.’라고 하면 내가 다 먹어 버릴 거야.”
이서호는 접시에 올린 고기를 몇 점 집어 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곤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다시 뭘 먹을지 물어왔다.
“아무거나.”
“아무거나는 없다니까?”
같은 행동이 반복됐다. 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이서호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아무거나~”
“아! 진하온! 장난친 거지, 너!”
“아~ 벌써 눈치챘어?”
언제까지 먹나 구경 좀 하려고 했는데 아쉽네.
“하온이는 몸에 좋은 소고기 먹자.”
정이한은 아예 내 메뉴를 정해 접시에 내가 먹을 고기를 가져다줬다. 방금 막 구워서 딱 맛있을 때였다.
내가 접시에 채워진 고기를 반쯤 먹었을 때 강현 형은 수북하게 쌓인 소고기를 전부 해치웠다. 역시 고기 귀신은 다르다 이건가!
“강현 형, 제 것 좀 나눠줘요?”
“아니. 더 있으니까 너 많이 먹어.”
강현 형은 본인의 접시를 들고 일어나 열심히 굽고 있는 정이한에게 갔다.
“이한 형, 더 줘.”
“자. 많이 먹어!”
“땡큐.”
정이한은 잘 먹는 강현 형을 보면서 뿌듯하게 웃었다. 정작 본인의 입으로는 뭔가가 잘 안 들어가는 것 같은데. 물끄러미 그쪽을 보던 나는 부지런히 쌈을 만들어서 정이한에게 들고 갔다.
“이한 형도 먹어요. 아.”
“어? 아, 아?”
벌어진 입 속으로 쌈을 쏙 넣어줬더니 햄스터처럼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우물우물 씹는다. 조금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주홍빛 조명 때문인 건지 정이한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 귀여워.
“하온아! 나는?”
“유찬 형은 직접 먹고 있잖아요. 이한 형은 못 먹는 것 같으니까. 하나 더 먹을래요?”
“응응.”
정이한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아예 내 고기 접시를 정이한이랑 가까운 테이블로 옮겨와 쌈을 만들었다. 정이한에게 쌈 하나를 더 먹이자 유찬 형이 벌떡 일어났다.
“이한아, 이제부터 내가 구울게.”
“아, 아니야. 괜찮아.”
“사양하지 마. 너도 먹어야지.”
유찬 형은 생글거리면서 정이한이 들고 있는 집게로 손을 뻗었다. 그때 강현 형이 엄숙한 얼굴로 다가와 유찬 형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찬 형은 안돼.”
“뭐? 왜!”
“형이 구우면 태우잖아.”
“조, 조금 태울 수도 있지!”
“안돼. 고기는 나랑 이한 형만 구워야 해.”
강현 형은 제법 단호하게 굴면서 유찬 형을 물리쳤다.
“이한 형도 먹어. 내가 구울게.”
그러고 나서 형은 자연스럽게 정이한을 밀어낸 뒤 집게를 빼앗아 들었다. 제 빈손을 내려보던 정이한이 터덜터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강현 형은 이미 고기를 많이 먹은 상태라 나는 쌈을 싸던 걸 멈추고 별 생각 없이 정이한 옆에 가서 앉았다.
“하온아.”
“네?”
“나는 마늘 빼고.”
강현 형의 당당한 요구에 웃음이 나왔다.
“형은 많이 먹었잖아요.”
“모자라.”
“아하하! 알았어요. 기다려요.”
뭘 올려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서호가 내 상추 위에 마늘을 한 바가지 올리기 시작했다. 강현 형에게 덤벼서 좋을 게 없다는 걸 학습한 나는 열심히 쌈에서 마늘을 덜어냈다. 그런데 유찬 형이랑 정이한까지 거들어 내 쌈에 마늘과 청양고추를 마구 얹는 거 아닌가. 나는 결국 마늘을 덜어내는 걸 포기해버렸다.
다들 숨죽여 웃으면서 빨리 강현 형에게 가라고 날 재촉했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쉰 뒤 강현 형에게 마늘이 잔뜩 든 쌈을 내밀었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입을 벌리는 강현 형에게 나는 폭탄을 투하했다.
“푸흡, 컥.”
나는 아이돌답게 뻔뻔한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 강현 형의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온이한테 이런 거 시킨 사람 누구야.”
헐. 내가 주범이 아니라고 확신하다니. 역시 우리 형 눈치 하나만큼은 끝내준다니까.
“이서호, 너지?”
“아닌뎅? 왜 맨날 나만 지목당하는데!”
“대부분 너니까.”
“윽. 그, 그건…….”
할 말 없겠지. 결국 이서호는 강현 형에게 핵폭탄급 꿀밤을 맞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반면에 나는 정말 맛있게 싼 쌈을 새로 만들어 강현 형에게 먹여 주는 것으로 귀여움을 듬뿍 받았다.
휴.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다.
***
바비큐 뒷정리를 끝낸 뒤 나는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면서 거실로 나갔다. 이서호는 거실 텔레비전에 게임기를 연결해 신나게 노는 중이었다. 오늘만큼은 특별히 밤샘 게임을 해도 좋다는 유찬 형의 허락에 이서호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굴고 있었다.
거실에 모여서 이서호가 게임하는 걸 구경하고, 멤버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까 자다 깬 덕분인지 잠이 안 와서 눈이 말똥말똥했다. 그러다 11시가 가까워질 때쯤 유찬 형이 두 형들에게 눈짓을 보내는 걸 보게 됐다. 또 저러네.
“우리 옥상 가서 불멍하자!”
유찬 형이 슬쩍 일어나면서 운을 띄웠다. 정이한도 좋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심지어 강현 형까지 묵묵히 합류 의사를 밝혔다.
“으엥? 나는 게임하고 싶은데…….”
이서호만 아쉬워할 뿐이었다. 평소라면 같이 가자고 했을 유찬 형이 이번에는 다르게 반응했다.
“쉬는 거니까 게임하고 싶으면 게임해도 돼.”
“엇? 진짜? 나 그럼 게임할래!”
“오케이. 이서호는 게임. 이한이랑 강현이는 불멍. 하온이는?”
“저도 불멍이요.”
셋이서만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모르는 척 낀다고 했다. 날 빼놓고 가면 나와 이서호에게는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오, 좋지! 그럼 하온이도 같이 가자.”
유찬 형은 나도 같이 간다는 말에 오히려 크게 환영했다. 진짜 이게 뭐람.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나는 형들과 함께 옥상에 올랐다.
모닥불을 피워놓은 채 우리는 옥상에 빙 둘러앉았다. 장작 타는 소리와 파도치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겉으로 봤을 땐 다들 불멍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목소리만 들리지 않을 뿐, 세 사람은 또다시 서로를 보면서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소외당하는 기분에 나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들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혀 들었다.
“형들. 셋이서 할 이야기 있으면 편하게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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