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모드 아이돌-195화
195.
형은 나를 한 번 보고 벽을 향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쩐지 강현 형, 좀 긴장한 것 같은데? 나는 들어온다는 말과 다르게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있는 형의 팔을 잡아당겼다.
“저 졸린데…….”
“아, 어.”
그제야 형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문을 닫은 뒤 멀거니 서 있는 강현 형의 등을 밀었다. 하지만 침대를 코앞에 두고 형은 우뚝 멈춰버렸다.
“하아…….”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내 귀에 똑똑히 들렸다. 형답지 않게 엄청 긴장했네. 침대가 좁아서 막상 같이 누우려니 민망한 건가? 형을 편안하게 해주자는 생각에 내가 먼저 침대 위로 올라갔다.
침대 안쪽으로 기어간 뒤 조금 구겨진 이불을 쫙 펼쳐 반으로 접었다. 그 뒤에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강현 형을 향해 옆자리를 두들기면서 웃었다.
“형, 이리 와요!”
“…….”
형은 그런 날 지그시 바라만 볼 뿐,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러더니 미간을 찌푸린 뒤 고개를 틀어 또 한 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지만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는 가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음. 역시 좀 불편한가.
어쩌면 날 놀리려고 했던 건데 내가 너무 덥석 물어버린 걸지도 모르지. 가만 생각해 보니 아까 바다에서도 조금 곤란한 듯 굴긴 했었다.
“형, 불편하면 굳이 저랑 안 자도 돼요.”
강현 형이 부담 없이 편한 쪽을 선택할 수 있도록 미소를 곁들여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강현 형은 본인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면서 애매하게 웃었다.
“불편한 건 아니고.”
형은 허공을 보던 시선을 내게 고정한 뒤 침을 꿀꺽 삼켰다. 형의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쩐지 나도 긴장되는 느낌이야…….
“긴장돼서 그래.”
“왜요?”
“그건 내가 하온이를.”
갑자기 말을 뚝 끊은 강현 형은 연달아 헛기침했다. 뒷말을 기다리느라 얌전히 앉아 있었더니 형은 그런 날 보고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왜 말을 하다 말고 웃어요?”
“아니, 갑자기 유찬이 말이 생각나서.”
“뭔데요?”
“너 둔하다는 말.”
뭘 보고 둔하다는 거야? 나처럼 예민한 사람이 어딨다고. 유찬 형은 언제 강현 형한테 저런 말을 한 거지?
“아, 형들 저 없는 데서 뒷담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설마 자주 그러는 건 아니죠?”
“하온이 없는 자리에서 하온이 얘기라면 많이 하지.”
“허얼. 완전 배신감…….”
나는 삐진 척 강현 형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웠다. 뒤에서 형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야. 긴장이 좀 풀린 것 같네.
강현 형이 침대에 올라온 듯 매트리스가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향긋한 향기가 훅, 하고 끼쳐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보니 강현 형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한쪽 팔을 괴고 나를 쳐다본 채였다.
“까, 깜짝이야.”
“왜 놀라?”
이걸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형은 형 얼굴이 얼마나 유해한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강현 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는 고개를 잘게 흔들면서 “형 얼굴이 이렇게 가까우면 심장마비 올 것 같다고요.”하고 말하면서 삐죽거렸다.
“내 얼굴이 이상한가.”
강현 형이 본인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미간을 좁혔다. 나는 황당해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형은 거울이란 걸 안 보고 살아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욕먹어요.”
“다른 사람이 다 잘생겼다고 해도.”
완전히 긴장이 풀렸는지 강현 형의 태도는 평소와 똑같이 돌아와 있었다.
“하온이 눈에 별로면 소용없으니까.”
이, 이거 무슨 의미지? 내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 맞나? 아님 다른 뜻이 있는 건가. 형은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 별로야?’라고 중얼거리는 형 때문에 황당한 웃음이 나왔다.
“저는 형만큼 완벽하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봤거든요? 우리 그룹 비주얼 멤버가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네.”
“너도 비주얼 멤버잖아.”
강현 형은 눈웃음을 지으면서 내 콧등을 검지로 콕 찍어냈다. 형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깜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미쳤어, 잠 다 깼네…….
“어디 가.”
강현 형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방심한 나는 그만 그대로 넘어가고 말았다. 문제는 내 머리를 받치고 있는 게 푹신한 베개가 아니라는 거였다. 나는 강현 형의 팔을 벤 채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굳었다.
“수면 베개 해 준댔으니까 괜찮지?”
“이건…… 제가 베고 있는 것 같은…….”
또다시 강현 형의 얼굴 공격에 당할 것 같아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푸흡.”
강현 형은 그런 날 보고 웃더니 내 가슴에 팔을 올렸다. 마치 날 재우려는 듯 형은 일정한 박자로 토닥토닥 날 두들겼다.
“이제 그만 떠들고 자자.”
나는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서 강현 형의 얼굴을 살폈다. 형은 길게 하품한 뒤 내 목덜미에 이마를 박고는 눈을 감았다.
가, 간지러워!
어깨에 닿은 강현 형의 숨이 간지러웠다. 슬쩍 몸을 움직였더니 강현 형은 오히려 더 강하게 날 끌어당겼다.
“빨리 자.”
형의 품에 꼼짝없이 갇힌 나만 두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었다. 수면 베개의 의미가 이런 건 줄 몰랐지…….
***
백강현은 진하온을 품에 안고 잠든 척 눈을 감고 있었다. 자리가 불편한 듯 진하온이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길래 뒤척이는 척 풀어줬더니,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형, 자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제 동태를 살피듯 꼼지락거리고 있을 진하온의 모습을 두 눈에 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평소에는 금방 잠든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못 자지? 혹시 자신을 조금이라도 의식해서 그런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백강현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씁쓸한 숨을 삼켰다.
이따금 제 얼굴을 넋 놓고 보긴 하지만, 그 시선에 특별한 감정은 없어 보였다.
‘날 좋아한다면 쉽게 같이 잔다고 하진 않았겠지.’
괜히 수면 베개 해달라고 했나. 애초에 진하온을 물에 빠트릴 생각은 없었다. 멤버들이 다 함께 장난쳤으니 같이 놀았을 뿐이었다. 진하온도 제게 달라붙어서 바들바들 떠니까 무서워하지 않게끔 장난을 좀 친 거지.
설마 빠트리는 걸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놀려주는 척만 하고 넘어가면 됐을 일이었지만, 그 순간 정이한과 눈이 마주쳤다. 불안해 보이는 정이한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진하온에게 수면 베개를 제안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다.’
그건 이 방의 문이 열리는 순간 머리를 뚫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방에는 샤워한 직후의 풋풋하고 상큼한 향이 가득했다. 게다가 진하온이 입은 품이 넉넉한 잠옷은 꽤 깊게 파여 있어서 눈 둘 데를 찾기가 어려웠다.
다른 멤버들의 가슴은 봐봤자 감흥도 없는데, 좋아하는 사람은 확실히 달랐다. 수영을 가르치다가 맨살에 손이 닿았을 때 진하온만큼 백강현도 놀랐었다. 그저 티를 내지 않아 자연스럽게 넘어갔을 뿐이었다.
그 바람에 엉뚱한 소리나 지껄였지만.
‘만져도 되는지 왜 물어봤냐고.’
오늘은 하루 종일 평소의 저답지 않은 짓을 많이도 했다. 그런데도 진하온은 제 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친한 형.
같은 그룹 멤버.
그게 제 포지션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진하온은 이 좁은 침대에 기꺼이 자신을 끌어들였다. 싫어하는 것보단 낫지만, 그래서 더 욕심이 생겼다.
나를 의식해 달라는.
그러려면 역시 고백하는 게 맞겠지. 박유찬의 말대로 진하온은 직접 말로 전하지 않는 이상 상대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오늘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백강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나를 의식해줘, 하온아.’
혹시라도 눈을 뜨고 있다면, 지금 눈이 마주친다면. 그러면 오히려 지금이 고백 타이밍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백강현은 서서히 눈을 떴다. 하지만 시야에 잡힌 건 고르게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맑은 얼굴이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달큰한 숨이 새어 나왔다.
백강현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진하온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자 불편한지 진하온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모습이 귀여워서 만지작거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진하온의 혀가 백강현의 손가락에 닿았다. 백강현은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손을 회수했다.
진하온은 입술을 몇 번 핥은 뒤 손등으로 문질렀다. 잠결에 간지러워서 반응한 모양이었지만, 백강현은 튀어나올 듯 거세게 뛰는 심장 때문에 곤란했다. 무엇보다 혀에 닿았던 손가락이, 마치 마비라도 된 것처럼 저릿했다.
백강현은 어둠 속에서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다가 다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찬물로 샤워라도 해야겠어…….’
진하온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움직여 방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와 닫은 문에 기대어 긴 숨을 내쉬었다. 다음에는 절대 진하온과 단둘이 자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 매 순간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새삼 진하온과 같은 방을 쓰는 정이한이 대단해 보였다.
‘이한 형은 어떻게 참는 거야?’
생각에 잠긴 채로 욕실을 향해 걷던 백강현은 갑작스레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두 명의 인영이 서성거리고 있던 탓이었다. 다행히 목소리를 높이기 전, 박유찬과 정이한이라는 걸 알아보고 진정할 수 있었다.
“……거기서 뭐 해.”
“어, 어? 왜 안 자고 나왔어…….”
“우리는 잠이 안 와서 잠깐 산책…….”
두 사람 다 어설픈 변명을 하는 걸 보면서 백강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걱정 안 해도 안 건드려.”
“우, 우, 우리가 걱정돼서 온 게 아니라…….”
“사, 산책이라니까, 산책.”
디아스에는 거짓말 못 하는 사람들만 모였나. 백강현은 도망치듯 1층으로 내려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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