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의아함을 느낀 것도 잠시, 잔뜩 신이 난 이서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빠트려!”
이서호의 신호에 우리는 강현 형을 든 채로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바닷물은 파도가 칠 때마다 허리까지 잠겼다가 빠지길 반복했다.
“얘들아! 신호에 맞춰서!”
유찬 형이 낄낄거렸다. 와중에도 강현 형은 어이없다는 듯 우리를 내려보고 있었다. 물에 빠지는 사람보다는 왕좌에 앉아 있는 군주를 보는 느낌이었다.
“하나! 둘! 셋!”
강현 형을 던져 버린 뒤 신나게 웃는 사이 바다에 삼켜졌던 강현 형이 일어났다. 형은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는 그런 형을 보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와 전혀 다른 서늘한 미소에 뒤통수가 찌릿찌릿했다. 장담하건대 진심이 된 강현 형한테는 우리 넷이 전부 덤빈다 해도 소용 없을 터였다. 이건 잡히면 무조건 꼬르륵이다.
“으하하! 강현 형, 한 방 먹으니까 어때?”
눈치라고는 밥 말아 먹은 이서호는 코앞에서 형을 도발했다.
“아, 오케이. 이런 거 하자는 거지?”
결국 이서호가 제일 먼저 강현 형에게 잡혔다.
“어? 어라?”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이서호가 해변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색이 된 얼굴을 보니 지금 이서호가 느낄 공포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았다. 덕분에 바다를 빠져나가려는 내 걸음도 빨라졌다.
“악! 형! 잘못했어어어억!”
이서호의 간절한 비명이 애처롭게 울렸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가 그 무거운 이서호를 가볍게 엎어치기 하는 강현 형을 보고 말았다.
“허…….”
강현 형은 이서호를 바다에 빠트린 뒤 곧바로 다음 타깃을 향해 뛰었다. 다음 목표는 유찬 형이었다. 바다에서 저렇게 빨리 뛸 수도 있는 거야? 강현 형은 순식간에 모래사장으로 올라와 뛰어다니던 유찬 형을 번쩍 들어 어깨에 둘러멨다.
“가, 강현아. 형이야. 형이…… 아악!”
버둥거리면서 강현 형의 등을 치던 유찬 형은 속절없이 바다로 끌려갔다. 헉, 이제 나까지 두 명 남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잠자는 사자의 코털에 불을 지핀 모양이었다. 어디 숨을만한 곳 없나? 이 좁은 모래사장에서는 뛰어봤자 강현 형의 손바닥 위일 텐데.
나는 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모래사장 왼쪽 끝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뒤에 숨으면 못 찾지 않을까? 나는 상체를 수그린 뒤 살금살금, 하지만 열심히 발을 놀렸다.
“하온아, 어디가!”
“아! 이한 형! 이쪽으로 오지 마요!”
“……왜, 왜에.”
“형이랑 나만 남았잖아요!”
“어, 어어?”
“이한 형. 찾았다.”
음습한 목소리가 서라운드 스피커 볼륨을 맥스로 튼 것처럼 강렬하게 내 귓가를 때렸다. 안돼! 잡혀서 바다에 빠지고 싶지 않아!
나는 필사적으로 내가 찜해둔 바위를 향해 내달렸다. 등 뒤에서 정이한이 버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잠깐. 나 이미 위치 들통 난 거 아니야? 그럼 여기 숨어도 의미 없지 않나?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데로 도망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정이한 빠트리면 바로 날 잡으러 올 거야!
일단 숨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커다란 바위를 눈앞에 두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 망했다.”
내 몸을 숨기기에 적합할 크기의 바위였지만, 가까이 와서 보니 뒤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없었다. 날 숨길 수 있는 곳으로 가려면 징검다리처럼 뾰족 솟은 바위들을 뛰어 넘어가야 했다.
저렇게 위험한 길을 건널 순 없잖아. 어떻게 해야 쉽고 안전하게 넘어갈 수 있을까 싶어서 주변을 살피던 때였다.
“자, 이제 하온이 차례야.”
“……어?”
강현 형의 목소리가 들려서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우뚝 선 강현 형을 마주 보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하, 한 번만 봐주면…….”
형이 잠깐 방심한 틈을 타서 옆구리 쪽으로 잽싸게 몸을 날렸다. 하지만 강현 형의 반응속도는 천상계였다. 형은 나를 가볍게 붙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형은 한쪽 팔로 내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받쳤다.
“으앙, 강현 형! 잘못했어요!”
나는 우는소리를 하면서 강현 형의 목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형은 그런 나를 붙잡고 성큼성큼 바다로 들어갔다.
“가, 강현아. 하온이는 봐주지…….”
유찬 형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강현 형에게 봐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강현 형은 묵묵히 나를 끌고 바다로 데려갈 뿐이었다.
“강현아, 하온이 물 무서워하잖아.”
우릴 쫓아온 정이한이 강현 형의 어깨를 잡았다. 두 사람은 사정없이 바다에 내팽개쳐졌으면서 나를 위해……!
“형드을…….”
감격해서 형들을 부르던 순간, 강현 형이 입을 열었다.
“하온이는 봐줄까?”
강현 형의 목소리가 유하게 풀려있어서 이때다 싶은 마음에 얼른 대답했다.
“네, 네!”
“다른 멤버들은 다 빠졌는데?”
나는 울상을 지은 채 필사적으로 강현 형을 끌어안는 수밖에 없었다. 아까 이서호한테 다른 사람으로 타겟 바꾸자고 좀 더 강력하게 주장했어야 했어!
“그래도 무섭단 말이에요…….”
어느새 바닷물이 강현 형의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파도가 칠 때마다 내 종아리까지도 바닷물이 올라왔다.
“하온이만 봐줄 수는 없는데, 그럼 다른 벌칙 받을래?”
물에 빠지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좋았다. 강현 형의 핵폭탄급 꿀밤을 맞더라도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뭐든지 다 할게요!”
형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춘 뒤 ‘뭐든지…….’하고 중얼거렸다. 잘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밤에 내 수면 베개 해 주기, 이대로 빠지기. 둘 중 하나 골라 봐.”
이건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나는 0.1초 만에 “수면 베개요!”하고 즉답했다. 날 응시하는 강현 형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당황스러워하는 듯한 기색이 느껴져서 ‘이게 아닌가?’하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알았어.”
형이 어쩐지 멋쩍게 대답하며 해변가로 방향을 틀었다. 그제야 안심한 나는 바짝 굳어 있던 몸의 힘을 풀었다.
“……강현이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정이한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뭔 소리래.
“아~ 이래서 우리가 빠트려도 얌전히 굴었던 거야?”
유찬 형도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강현 형의 옆구리를 찔렀다. 강현 형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왜 부끄러워하세요. 어라? 이거 혹시. 강현 형, 처음부터 날 빠트릴 생각이 없었던 거 아냐?
“강현 형, 저랑 자고 싶었어요?”
“컥, 쿨럭. 쿨럭.”
“헉. 형, 괜찮아요?”
나는 강현 형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날 올려보는 형의 얼굴은 햇볕에 익은 듯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괜찮아.”
강현 형은 여전히 부끄러워하면서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이 형은 가끔 귀여워 미칠 것 같은 짓을 한다. 나는 작게 웃으면서 편안하게 강현 형에게 기댔다.
“여기서 내려줄게.”
강현 형이 내려 준 곳은 모래사장이 아니었지만, 수위가 종아리까지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얕은 곳이었다. 역시 사람은 땅을 딛고 살아야 해. 안심되니 마음이 느긋해져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이따 네 방으로 갈게.”
“아, 근데 제 침대 좁은데 괜찮아요?”
“어.”
형만 괜찮다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모래사장 쪽으로 향했다.
***
우리는 바다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형들은 수영 대결을 했고, 나는 튜브에 올라 파도를 타는 재미를 알게 됐다. 조금이라도 깊은 곳으로 가기엔 무서웠던 탓에 자주 해변가로 밀려 모래사장에 박히긴 했지만.
그러다가 형들이 돌아가면서 내 튜브를 잡아줘서 제대로 파도를 타고 놀 수 있었다. 얕은 곳에서 물에 뜨는 연습을 하다가 파도 때문에 바닷물을 잔뜩 먹기도 하고, 이서호를 따라서 파도가 치는 쪽에 앉아 있다가 코앞에서 휩쓸려 굴러보기도 했다.
이게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는데, 이서호는 무척 즐거워했다. 나중엔 정이한과 유찬 형까지 합류해 다 같이 떼굴떼굴 굴렀다. 멤버들이 파도에 쓸려 굴러다니는 걸 보니 좀 웃기긴 했다. 바다와 아주 조금 친숙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오후 5시가 넘은 뒤에야 다시 펜션으로 돌아왔다. 수영복에 모래가 가득 묻어서 꼼꼼하게 씻어 낸 뒤 밖으로 나오니, 테니스 코트에서는 족구판이 벌어져 있었다.
아직 남은 체력이 여유로워 슬쩍 끼어든 나는, 공식 트롤이 되고 말았다. 공을 발로 차서 네트 너머로 넘기기만 하면 된대서 쉬운 줄 알았는데…….
왜 내 발에 맞았는데 바닥으로 수직 하락하는 거야?
“우리 이제 밥 먹자…….”
이서호가 주린 배를 움켜쥔 채 끙끙 앓았다. 유찬 형은 흐르는 땀을 닦아내면서 눈으로 감독님을 찾았다. 곧이어 형이 “밥 먹자!”하고 명쾌하게 외쳤다. 감독님이 오케이 사인을 보낸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놀라는 건 다 놀았네.
***
강현 형 언제 오는 거지? 벌써 새벽 2시가 다 되어간다. 씻고 온다고 했는데 늦네…….
펜션에 돌아와서도 놀아야 할 게 많아서 옥상 캠프파이어를 정리했을 땐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피곤함에 강현 형을 기다리다가 반쯤 졸고 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온아. 나 들어가도 돼?”
나는 곧장 침대에서 뛰어 내려 문을 활짝 열었다.
“형, 어서 와요!”
형은 조금 어색한 듯 헛기침했다. 강현 형이랑 둘이 자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왠지 좀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생글거리면서 문을 잡고 있는데 강현 형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 들어와요?”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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