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야야, 진하온. 저기 봐봐.”
“어?”
이서호가 튜브를 흔들며 보채는 바람에 나는 형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해변 가는 길인가 봐!”
흥분한 이서호가 눈을 반짝거렸다. 이서호는 수영장보다는 역시 파도치는 바다가 재밌다면서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아래를 내려봤다.
“바다 가고 싶어?”
“당연! 바다에 왔으면 해수욕은 필수라구!”
그런가. 해변을 걷는 건 나쁘지 않지만, 바다에 들어가는 건 싫었다. 나와 바다의 거리감은 이 정도가 딱이란 말이지.
“진하온, 바다 싫어해?”
“보는 건 좋아해.”
“바다 입수는 무서움?”
이서호는 둥둥 떠다니는 내 오리 튜브를 제 옆으로 끌어다 놓으면서 물었다.
“응. 나 수영 못하잖아. 발 안 닿으면 무서워.”
“우리, 바다에서도 놀아야 하는데?”
“……진짜? 거짓말 아니고?”
이서호는 어이없다는 듯 날 보면서 휴대폰은 들고 다니면 뭐 하냐고 타박했다.
“아까 유찬 형이 감독님 메시지 공유해줬잖아. 우리 수영장에서 발리볼하고, 바다에서 놀고, 족구까지 해야 됨. 이거 해지기 전까지 다 하래.”
스, 스케줄이 되게 빡세네? 리얼리티 같아서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하긴. 괜찮은 장면을 뽑으려면 그만큼 많이 찍긴 해야겠지…….
“저녁 먹고 실내에서 놀고, 밤에는 옥상에서 캠파하는 것까지 스케줄 다 짜여있더라.”
이서호는 이런 촬영은 환영이라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반면 나는 울상을 지었다. 바다 들어가기 싫은데 어떡하냐고! 하지만 일이니까 안 할 수도 없고…….
그냥 해변에서 발만 적시면 안 되나?
“야야, 진하온.”
“응?”
“우리 이따 바다에 한 명 빠트리자.”
이서호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걸렸다. 동시에 이서호는 형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속살거렸다.
“내가 뒤에서 아무나 붙잡을 테니까 네가 발 들어.”
이서호는 내가 발을 잡으면 형들은 저항하지 않을 거라면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쑥덕거리는 형들을 봤다. 저쪽도 뭔가 꾸미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 나도 이서호한테 어울려줘야지! 원래 바다에선, 들려서 빠지는 사람이 꼭 한 명쯤은 나와야 하는 법이다. 나만 아니면 되지.
“좋아! 대신 한 명 정하는 게 성공률 높을 것 같은데. 누구 할까?”
내 질문에 눈동자를 또륵또륵 굴리던 이서호가 목표를 정했다는 듯 방긋 웃었다.
“강현 형!”
“너무 최종 보스 아냐?”
“그니까 재밌는 거지!”
이서호는 공략하기 어려울수록 재밌다는 자신만의 철학을 내게 들이밀면서 빽빽 우겼다. 그런데 왠지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은데? 평소에 형한테 맺힌 게 많은가 보구나…….
“알았어. 강현 형 빠트려보자.”
실패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지만, 실패해도 그건 그거대로 재밌을 것 같았다.
“서호야! 하온아!”
유찬 형이 이번에는 우리를 불렀다. 발리볼 하자는 이야기인 것 같다며, 이서호가 내 오리 튜브를 밀어줬다.
***
나는 수영장에 걸터앉아 물에 담근 다리를 참방참방 흔들었다.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 비치볼을 집중해서 보다가 비치볼이 물에 닿는 순간 손을 번쩍 들었다.
“5 대 4. 유찬 팀 승리!”
“아! 이한 형! 거기서 받았어야지!”
비치볼을 향해 몸을 날리면서 시원하게 입수한 정이한은 미역 머리를 한 채 수면 위로 나왔다.
“너무 멀었어…….”
정이한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여 귀에 들어간 물을 털어냈다.
“우리가 3 대 2로 이겼네!”
유찬 형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3 판 2선승제로 한 저녁 뒷정리 내기는 유찬, 강현 팀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래도 정이한이랑 이서호도 꽤 분발했다.
비록 둘이 유찬 형만 집중 공격하긴 했어도, 강현 형을 상대로 2점이나 따낸 건 대단한 일이다.
“힘들어어어…….”
다들 힘이 쪽 빠졌는지 수영장에서 나오자마자 선베드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나마 나는 저질 체력으로 각인이 박혀 형들이 심판으로 몰아가 줘서 다행이었다.
심판 안 했으면 이따 바다 가서도 분명 체력 달려서 해롱거렸을 거야. 대신 나만 얌체같이 빠졌으니 이따 저녁 뒷정리를 도울 생각이었다.
일단 지금부터 해줄 수 있는 것 좀 해주고. 나는 음료가 든 텀블러를 멤버들한테 열심히 날라줬다. 다들 나한테 고마워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준비는 정이한이 했는데 내가 생색내는 것 같잖아.
“……이한 형이 준비한 거예요.”
“응. 알지. 이한아, 고마워! 아직도 시원하다!”
유찬 형은 얼음을 짤랑짤랑 흔든 뒤 음료를 꿀꺽꿀꺽 마셨다. 나도 선베드에 누워볼까. 인체 공학적인 디자인인지 등과 딱 맞는 느낌이 무척 편안했다. 이대로 낮잠 자면 좋을 것 같아…….
“하온아.”
“네?”
날 부르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강현 형이 타올로 머리를 털면서 내게 다가왔다. 젖은 수영복이 몸에 딱 달라붙어서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진짜, 이 형은 무슨 조각인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남자의 적이 될 것이 분명했다. 새삼스럽지만 같은 그룹이라 정말 다행이야.
“수영 배울래? 가르쳐 줄게.”
“……어, 수영이요?”
강현 형은 수영장을 눈짓으로 가리키면서 끄덕였다. 내가 과연 물에 뜰 수 있을까……. 나는 수영장을 노려보며 고민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물 싫어한다고 피하기 바빴지, 진지하게 수영을 배워 볼 생각은 안 했다.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내 사전에 없었던 일이다. 내가 안 해봐서 그렇지 의외로 재능있을지도 모르잖아.
“배워볼래요!”
강현 형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부드럽게 웃었다. 뭐, 뭐야……. 형이 이렇게 웃을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곤란하다. 저 얼굴은 평생 봐도 내성 안 생길 것 같다니까…….
“그럼 따라와.”
“하온이 수영 배우게?
정이한이 수영장에 들어가는 내게 물었다. 나는 사다리를 잡고 한발, 한발 내려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네! 강현 형이 가르쳐 준대요.”
“어어. 강현이가, 응응. 잘 배워!”
이상하네. 평소라면 나도 가르쳐 줄게! 하면서 따라와야 하는데? 갸웃거리면서 정이한을 바라보자 정이한은 그저 날 향해 손을 흔들 뿐이었다. 오히려 이서호가 ‘이 형님이 비법을 전수해주마!’라면서 달려들었다가 유찬 형에게 붙잡혔다.
“서호는 나랑 아이스크림 가지러 가자.”
“어? 좋지! 야, 진하온! 미안하다. 대신 네 것도 가져올게!”
나는 대답도 안 했는데 이서호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네. 묘하게 차인 느낌인데, 이거.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고개를 젓고 잡념을 털어냈다. 수영이나 배우자.
“강현 형, 잘 부탁해요!”
“응. 먼저 물에 뜨는 법부터 배우자.”
정면에 선 강현 형이 내게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위에 내 손을 얹자, 형이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듯 잡아줬다.
“일단 고개만 내밀고 몸에 힘을 쭉 빼. 내가 잡아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형이 시키는 대로 물에 몸을 집어넣었다. 목만 빼고 온몸을 다 넣었는데 이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힘을 빼지? 온몸에 힘이 빡 들어가는데?
“힘을 못 빼겠어요…….”
“괜찮아. 천천히 하면 돼. 먼저 한쪽 다리부터 들어봐.”
나는 형이 조정하는 꼭두각시라도 된 것처럼,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한쪽 다리를 들고, 힘을 빼서 늘어트리고. 그다음에 반대쪽도 똑같이. 차근차근 따라 하다 보니 두 다리를 모두 물에 띄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물에 뜨는 게 아니라 팔 힘으로 내 몸을 억지로 띄우고 있는 느낌이란 말이지. 내 생각을 증명하듯 강현 형의 손을 잡은 내 팔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형은 뒷걸음질로 나를 끌고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내 다리가 바닥에 닿으면 제자리에 멈춰서서 내가 다시 다리를 띄울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조금씩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버텨.”
강현 형이 예고도 없이 내 손을 놓아버렸다. 의자 할 곳이 사라져 놀란 나는 허둥대다가 물에 쑥 빠져들었다. 본능적으로 바닥을 딛고 일어나 말도 없이 손을 놔버린 강현 형을 원망스레 바라봤다.
“잘했어.”
“……뭐라고요?”
“1초는 버텼네.”
강현 형은 진심으로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아니, 내 수영 실력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낮은 거 아니야?
“……이번에는 더 잘할 수 있어요.”
“그럼 여기까지 와볼래?”
강현 형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걸어오라는 건 아니겠지?
“팔을 물과 수평이 되게 올리고, 발로 박차면서 떠밀린다는 느낌으로 와봐.”
……이, 이렇게? 나는 일단 상체를 물에 담그고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다음 발로 바닥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구부정하게 구부렸던 허리를 펴면서 발을 띄웠다. 그러자 몸이 앞으로 쑥 밀려 나갔다.
몇 걸음 떨어진 강현 형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비록 제대로 된 수영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내 힘으로 물에 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격스러웠다.
“와! 형! 저 떴어요! 떴다고요!”
“잘했어, 하온이.”
기쁜 마음에 강현 형한테 매달리면서 폴짝폴짝 뛰었다. 덕분에 강현 형에게 달달한 칭찬도 들었다. 어린애 취급받은 느낌도 있었지만, 뭐 어때. 기분 좋으면 됐지.
“이번엔 제대로 된 자세 가르쳐 줄 테니까 이쪽으로 와봐.”
형은 나를 수영장 끝으로 데려가 벽을 짚은 채 다리를 띄워보라고 했다. 물에 젖어 미끄러운 타일에 손을 올리면서 다리를 띄웠을 때였다. 강현 형의 손이 아래로 쑥 들어와 내 배를 받쳤다.
“헉!”
내 몸집보다 큰 래시가드 상의가 물속에서 말려 올라가 있었나 보다. 맨살에 손이 닿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가 발이 미끄러졌다. 거꾸로 빠질 걸 각오하면서 숨을 멈췄다. 하지만 물 대신 날 받아낸 건 강현 형의 단단한 가슴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
“간지러워서요…….”
나는 민망함에 상의를 끌어 내리면서 헛기침했다. 그리고는 얼른 다시 자세를 잡고 배에 힘을 딱 줬다. 이번엔 놀라지 말아야지.
“만져도 돼?”
질문이 좀 이상한……. 아니야, 기분 탓이다. 기분 탓이야.
“……되,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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