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91화 (191/320)

191.

정이한의 방 선택이 끝났다는 톡이 왔다. 나는 그네에서 폴짝 뛰어내려 느긋하게 펜션으로 들어갔다. 독방이랑 트윈베드룸은 찼을 테니 1층 큰 방이 비어 있지 않으려나.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큰 방은 이미 유찬 형과 정이한이 차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등진 채 침대 끝과 끝에 앉아 있었고, 커다란 침대 가운데에는 바디필로우로 만든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어라? 이 방 다 찼어요?”

내 질문에 유찬 형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벽을 보고 앉아 캐리어를 뒤적이던 정이한도 고개를 휙 돌렸다.

“윽. 하온이 여기 먼저 온 거야?”

“네. 다른 방 다 찼을 것 같아서 온 건데 의외네요.”

다들 양보한 건가? 제일 불편할 것 같은 방이 먼저 차다니. 하여간 다들 착해 빠진 사람뿐이라니까.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네?”

어쩐지 형들이 조금 시무룩해 보이는데, 기분 탓인가?

“아니야, 아무것도. 얼른 가 봐. 하온이도 짐 풀어야지.”

“어디 비었는지 알아요?”

“모르겠어. 우리도 여기부터 온 거라…….”

유찬 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하, 그럼 전 다른 방 찾으러 가볼게요.”

문을 닫자마자 유찬 형의 목소리가 방문을 타고 새어 나왔다.

“아, 이한이 네가 양보 좀 하지!”

“나도 형이 있을 줄 몰랐지…….”

방음이 잘 안 되네. 둘 다 나랑 자고 싶었던 건 가봐. 그래서 시무룩해 보였나 보다. 정이한은 날 좋아하니 그렇다 치고, 유찬 형은…….

첫 룸메였으니까 오랜만에 나랑 같이 자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빈방은 트윈베드룸이겠지, 뭐.

“어? 진하온! 여긴 풀이지롱!”

이서호가 한발 늦었다면서 잘난체했다. 이 방은 강현 형과 이서호네. 그럼 독방만 남은 거잖아? 멤버들의 양보 덕인지 방 고르기 게임에서 꼴등이었는데도 오히려 이득을 본 느낌이었다.

“1층도 다 찼으니까 나는 독방이네.”

“엥? 진짜? 그럼 유찬 형이랑 이한 형이 1층이야?”

“응. 거기부터 들렸지. 비어 있을 줄 알았거든.”

갑자기 푸흡,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강현 형이 고개를 숙인 채 가느다랗게 어깨를 떨고 있었다. 저 형 저렇게 웃는 거 흔치 않은데… 뭐가 웃긴 거지?

“강현 형?”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강현 형은 웃으면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기를 잠시, 형이 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혼자 웃었다. 나와 이서호는 눈짓으로 ‘왜 저러는 거야?’하고 물었지만, 둘 다 영문을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우리가 뚫어져라 강현 형을 보자 형이 뺨을 붉힌 채 헛기침했다.

“크흠. 하온이도 방에 가서 쉬어.”

저 형 부끄러워서 나 쫓아내는 건가 봐.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면서 형의 의도에 따라줬다.

“네~”

나는 캐리어를 드륵드륵 끌고 독방으로 향했다. 침대와 작은 화장대가 전부인 작은 방이었다. 에어컨도 없네…….

대신 독방에는 작은 테라스로 향하는 큰 창이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침대에 기대앉아 바다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시험 삼아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라 경치를 바라봤다.

흔들 그네에 있을 때도 천국이었는데, 여기도 만만치 않네. 진짜 좋다. 나 사실은 도시보다 자연을 좋아하나 봐.

신기하다. 이번 삶을 살면서 나도 모르던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물에 빠지는 것과 추락하는 느낌을 싫어하며, 웅장한 자연경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앞으로 노래와 춤 이외에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똑똑.

“하온아, 여기 있어?”

아, 유찬 형이다. 나는 침대에서 껑충 뛰어내리면서 문을 활짝 열었다.

“네!”

유찬 형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게 내밀었다. 쇼핑백에 내 이름이 크게 쓰여 있는 걸 보니 코디 누나들이 가져다준 모양이었다.

“폰 안 보고 있을 것 같아서 올라왔어. 오늘 날씨 좋아서 야외 활동 위주로 촬영해달라고 연락이 왔거든. 수영복 갖다주는 거 보니 수영부터 해야 할 것 같아. 갈아입고 내려올래?”

“수영…….”

내가 울상을 짓자 유찬 형이 웃으면서 “홍학이랑 오리 튜브도 있대.”하고 말해줬다. 수영장은 깊지 않을 테니까 괜찮겠지.

“아, 맞다.”

나가려던 유찬 형이 방문을 닫다 말고 몸을 돌렸다. 형은 무척 진지한 얼굴로 “살 타니까 상의 지퍼 꼭 채우고 나와.”하고 말을 덧붙였다.

“네!”

씩씩하게 대답했더니 유찬 형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을 닫아줬다. 방에는 카메라가 없었기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훌렁훌렁 옷을 벗었다.

내 수영복 하의는 하얀색 베이스에, 끝 라인을 따라 과하지 않게 노란색 꽃이 있었다. 우리 데뷔곡 무대 의상과 뮤비에 사용되었던 꽃이었다. 이제는 이 꽃의 이름이 뭔지 안다. 매쉬 메리골드. 내 탄생화였다.

상의는 민무늬 하얀색 래시가드였다. 오버핏인가? 사이즈가 좀 크네. 나는 지퍼를 끝까지 잠가 올린 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우리 코디 누나들은 항상 나한테만 큰 옷을 잘 입히는 것 같아.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상의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이게 다 내 몸이 빈약해서 감추려는 노력이겠지…….

1층으로 내려가 수영복 차림의 멤버들을 본 순간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강현 형은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 수영복에, 옆구리까지 쭉 찢어져 움직이기만 해도 근육이 드러나는 헐렁한 민소매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 베이스의 반바지 수영복에는 강현 형의 탄생화가 하얀색 선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정작 본인은 수영복 차림이 어색한지 자꾸 옆구리를 가리려고 했지만 내 눈엔 그게 더 야해 보였다. 부끄러워하는 모습과 근육의 부조화라니. 이게 바로 섹시의 표본이 아닐까.

유찬 형은 나와 같은 기장의 반바지에, 지퍼 없이 걸치기만 하는 래시가드를 입고 있었다. 모자에 달린 끈이 가슴 부근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진하온, 보여? 오늘을 위해 만든 근육이다!”

이서호는 내 앞에 제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면서 보디빌더처럼 포즈를 취해 보였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수영복 하의는 색이 참 현란했지만, 이서호는 그조차도 찰떡같이 소화해내고 있었다.

“서호 형, 상의 없어?”

“응. 없던데?”

“……어.”

정이한은? 나는 마지막 멤버인 정이한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 부엌에서 꼼지락거리는 정이한과 눈이 딱 마주쳤다.

“하온이, 음료수 뭐 마실래?”

산뜻하게 웃으면서 묻는 정이한의 수영복 상의는 무려 검은색 망사였다. 촘촘한 망사였지만 희끗희끗 살이 보여서 정이한의 몸이 내 생각보다 더 탄탄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짜 나만 꽁꽁 싸맸네. 이거 끝까지 채우는 게 아닌가? 나는 슬쩍 지퍼를 잡아 내리면서 정이한에게 물었다.

“……핫초코 돼요?”

갑자기 정이한이 얼굴을 휙 돌린 채 기침을 했다. 사레들린 것 같아서 다급하게 다가가 등을 두들겼다. 그러자 정이한은 새빨개진 얼굴로 날 보면서 연달아 헛기침했다. 그리고는 슬쩍 내 지퍼를 잡아 올려버렸다.

“지퍼 내리면 별로예요?”

정이한은 목소리를 한껏 낮춘 뒤 내 귀에 속삭였다.

“그건 아닌데, 내가 좀 곤란해서.”

“……아.”

나도 덩달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진짜…… 뮤비 촬영이라 마이크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이거 리얼리티였으면 마이크에 민망한 소리 다 잡혀들어갔을지도.

“크흠, 코코아 가루 있던데 그걸로 타 줄게.”

정이한은 곧장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개별 텀블러에 내 핫초코를 포함해 각자 취향의 음료를 담은 정이한은, 내용물이 새어 나오지 않게끔 뚜껑도 꽉꽉 돌려 닫았다. 이걸로 준비는 끝이었다.

“가즈아!”

이서호가 제일 먼저 수영장을 향해 내달렸다. 반면 점잖은 우리는 담소를 나누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먼저 도착한 이서호는 다이빙하듯 수영장에 풍덩 뛰어들어 물개라도 된 것처럼 헤엄쳤다.

“형들! 진하온! 빨리 들어와! 엄청 시원해!”

이서호가 크게 팔을 흔들며 휘적거렸다. 수영장 바깥에는 성인용 노란색 튜브와 비치볼이 놓여 있었고, 홍학과 오리 튜브가 수영장에 반쯤 걸쳐진 채 물살이 일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렸다.

“진하온, 튜브 탈래? 내가 밀어줌.”

“그러면서 물속에 나 빠트릴 거지?”

나는 이서호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경계했다.

“야, 지난번에도 물 먹였는데 또 그러겠냐? 내가 같은 실수 두 번 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이서호는 볼을 잔뜩 부풀린 뒤 싫으면 말아라, 하고 오리 튜브를 끌어당겼다. 괜히 의심한 게 미안해지네.

“서호 형.”

“왜.”

이서호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대답 하나는 착실하게 잘했다.

“나 태워주라.”

“뭐, 타고 싶으면 타든가.”

이서호가 오리 튜브를 내 쪽으로 밀어줬다. 하지만 물에 둥둥 떠 있는 튜브는 자꾸만 이리저리 움직여 올라타기가 쉽지 않았다. 계속 오리 튜브 머리만 붙잡고 끙끙거렸더니 이서호가 꼬리를 붙잡아 줬다.

“너는 이것도 못 타냐? 잡아 줄 테니까 타.”

“나도 도와줄게.”

정이한이 수영장에 들어가 오리 튜브를 붙잡았다. 튜브가 밀리지 않으니, 난이도가 대폭 낮아졌다. 다리를 벌리고 튜브 위에 앉아 오리 머리를 두 팔로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자세를 잡는 걸 확인한 뒤 두 사람은 천천히 내 튜브를 밀어줬다. 물살을 가를 때마다 수영장에 잠긴 종아리가 간질거렸다.

수영장과 바다가 이어진 것처럼 보였던 이유가 있었네. 바다 쪽을 향한 수영장 벽면은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수영장 물은 그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멀리서는 해수면과 이어진 것처럼 보인 거였다.

“이한아! 잠깐 와봐!”

유찬 형이 큰 목소리로 정이한을 불렀다.

“아, 하온아. 서호랑 놀고 있을래?”

“네. 그럴게요.”

“응응.”

뭔가 싶어서 지켜보니 유찬 형과 정이한이 대뜸 강현 형까지 데려와 셋이서 가위바위보를 하는 게 아닌가. 뭐야, 이번엔 뭐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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