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나를 끌어안은 정이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내 상체를 단단하게 감아온 팔뚝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의 감각을 통해 정이한의 팔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미안해!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닌데…….”
“…….”
내 표정이 많이 안 좋았나 보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켠 뒤 정이한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꼼짝 못 하게 나를 옥죄였던 팔이 내 작은 신호에 스르륵 풀렸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겠지? 방향을 틀어 정이한을 마주 봤다. 정이한은 예상대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형, 저 되게 이기적인 것 같아요.”
“어…?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해?”
“저는 형이 저한테 마음 접은 줄 알았어요. 그래서 거리를 두는 줄 알았거든요.”
정이한이 화들짝 놀라서는 “절대 아냐!”하고 소리쳤다. 그런 정이한을 빤히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충격인 거예요. 제 입으로 형 마음 못 받아준다고 했으면서 형이 거리를 두니까… 쓸쓸했어요. 저 진짜 이기적이죠?”
정이한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내가 옆에 없어서 쓸쓸했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이한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묻어 나왔다.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정이한이라면 어이없었을 것 같은데.
“지금 좋아할 타이밍이에요? 재수 없다고 화내야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없어서 외로웠다는데 당연히 기쁘지. 왜 화를 내?”
오히려 정이한은 내가 이상하다는 듯 굴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면서 쳐다보다가 함께 웃어버렸다.
미소를 머금은 정이한이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과장된 어투로 투덜거렸다.
“안 되겠다. 내가 참아야지. 우리 하온이 외롭게 할 순 없지.”
“뭘 참는데요?”
정이한이 멈칫하더니, 헛기침을 했다. 목부터 이마까지 빨갛게 익어버려서 용광로를 보는 것만 같았다.
“……내가.”
정이한은 한참 부끄러워하면서 망설이다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너한테 손댈 것 같았거든…….”
“그걸 왜 참아요?”
평소에 손도 잡고, 포옹도 하고. 할 건 다 하는데? 정이한은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날 보더니 뭔가를 고심하는 듯 눈매를 좁혔다. 그러다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 하온이 순수하구나.”
“…….”
뭐지. 나 지금 놀림 받은 거 같은데.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듯한 정이한의 어투와 눈빛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자니, 갑자기 머릿속에 느낌표가 떴다.
아, 잠깐. 설마…!
뒤늦게 ‘손댄다’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려고 했지만, 야속하게도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크흠, 흠.”
정이한이 헛기침하면서 반걸음 물러섰다. 젠장. 내가 눈치챈 거 알았나 봐! 확 몰려드는 어색함에 죄 없는 셔츠를 이리저리 구겨대면서 바닥만 내려다봤다.
정이한이 어떤 마음으로 날 좋아하는지 이 순간 피부로 느껴버렸다. 연애 감정으로서의 ‘좋아해’가 스킨십으로 이어진다는 건 나도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마주하는 건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정이한은 나에게…….
괜히 입 안이 바싹 말라서 입술만 오물거리고 있을 때였다.
“하온이한테…….”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눈동자만 슬쩍 굴려서 정이한을 올려다봤다.
“욕심부리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말했는데 자꾸 욕심이 생겨.”
차근차근 말하는 동안 정이한의 눈동자가 조금씩 변했다. 조금은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는 내가 여태껏 본 적 없는 강직한 시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어조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너한테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이.”
정이한은 작은 먼지도 보이지 않을 만큼 순도 높은 감정을 새하얗게, 그리고 뜨겁게 내비쳤다. 덩달아 내 머릿속도 새하얘져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점점 커져. 널 좋아하는 마음과 너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이 내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다는 걸, 어제 하온이한테 키스… 하려던 나를 발견하고 알았어.”
정이한은 조금 민망한 듯 관자놀이를 검지로 긁적이더니 머쓱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변명 같겠지만 일부러 하려던 거 아니야……. 그냥, 네가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홀린 것처럼…….”
홀렸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이한이 가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그저 멍하니 보고 있었으니까. 날 향한 애정을 가득 담은 두 눈동자가 그 순간만큼은 정말 예뻐 보였다.
“…그래도 미수였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다음에 내가 또 그러면 어떡해? 그러면 안 되잖아. 그래서 진정될 때까지만 조금 떨어지려고 했던 건데, 하온이가 속상했다고 했으니까 피하지 않을래.”
정이한은 대단한 각오라도 한 것처럼 주먹을 말아 쥐고 얼굴에 힘을 잔뜩 준 채 말했다.
“운동 더 열심히 하면 되지!”
우, 운동으로 배출하겠다는 거 맞… 지? 원점으로 돌아간 화제에 당혹해하는 사이 정이한이 짓궂게 웃으면서 내게 뺨을 들이밀었다.
“나 잘 참을 수 있게 보상으로 뺨에 뽀뽀해줄래?”
“보상을 선불로 요구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럼 후불이면 되나?”
“보통은 그렇죠.”
“좋아. 약속했다? 나 잘 참으면 뺨에 뽀뽀해주는 거다.”
정이한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가 어떨까, 하면서 생글거렸다.
“……네? 잠깐만.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요?”
“괜찮지 않아?”
“아니, 아니죠, 형! 저는 해준다고 안 했어요.”
“후불이면 된다면서? 약속… 한 거 아니었어?”
정이한은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보이면서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 와중에도 커다란 덩치가 잔뜩 쪼그라든 게 귀여워 보여,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이한은 여우가 분명해.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내가 거절 못 할 걸 아니까 일부러 저러는 거다. 안 넘어가려 해도 그럴 때마다 항상 정이한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나도 참 호구였다.
“……한 달에 한 번이라면 해줄게요.”
“정말?”
“네.”
“앗싸아!”
정이한이 제자리에서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눈꼬리를 삭 접어 화사하게 웃었다.
“하온이도 나를 좋아하긴 하는구나?”
“……형, 자꾸 이상하게 해석하지 마요.”
좋아하는 건 맞지만 정이한과는 엄연히 종류가 다른 감정이다.
“하지만 하온이가 그랬잖아. 뺨에 뽀뽀는 좋아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라고.”
언제 내가 그런 말을…… 했네. 했어. 너무도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기억에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저 여우 같은 정이한. 방심하고 있으면 매번 날 함정에 빠뜨리지. 사람이 너무 순수하면 위험하다니까.
나도 그냥 뻔뻔하게 나가야겠다.
“좋아하긴 하죠. 하지만 그건 종류가 다른 감정이라고 말했죠? 저는 아직 라이크예요, 형. 앞서가면 안 돼요.”
“넵. 명심하겠습니다!”
정이한은 장난스레 부복 자세를 취하면서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같이 실실 웃고 있는데,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아, 맞다. 형.”
“응?”
“혹시 유찬 형은 알아요?”
정이한은 듬성듬성 비어있는 내 말뜻을 명확하게 알아차린 것 같았다. 웃고 있는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으니까. 이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
“어…… 아니?”
침묵 끝에 들려온 대답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렸다.
“제가 바본 줄 알아요? 유찬 형은 어떻게 알았어요? 형이 상담했어요?”
정이한은 지퍼라도 채운 것처럼 입술을 꽉 다물고 고개만 열심히 가로저었다.
“어제 형들 방에 있었던 거 다 알거든요? 사실대로 말해요.”
“으윽……. 아침에 유찬 형이 한 말 때문이지?”
유찬 형이 한 말? 순간적으로 형이 무슨 말을 했더라, 하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정이한에게 빨리 돌아가지 않았다고 핀잔줬던 게 떠올랐다. 유찬 형 때문에 유추한 줄 아나 보네.
“그 전에 이미 알고 있었어요.”
정이한의 눈꺼풀이 빠르게 끔벅거렸다.
“어, 어떻게?”
“형 숙소 나간 줄 알고 찾으러 가려다가 벨소리 들었거든요.”
“억.”
정이한은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내게서 열심히 시선을 피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눈동자를 조용히 노려봤더니 정이한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걸렸어.”
“유찬 형한테요?”
“응. 내가 하온이 좋아하는 거 티 난대.”
“네? 그럼 어떡해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진짜 안다고 생각하니 충격적이었다. 앞으로 유찬 형을 어떤 얼굴로…, 어? 잠시만.
“강현 형은요? 그 형도 알아요?”
“으응. 강현이가 먼저 알았다던데. 그 뒤에 유찬 형…….”
“아…….”
그래, 그 눈치 빠른 형이 모를 리가 없지. 나도 한동안 정이한 앞에서 삐거덕거렸으니까 눈치 못 챌 리가 없었겠네. 결국 이서호 빼고 다 안다는 건가. 하, 미치겠다.
“형.”
“응?”
“앞으로도 우리는 절대 연애 못 하겠네요.”
“뭐? 왜! 어째서! 안 돼!”
정이한이 다급하게 외치면서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잔뜩 울상이 된 얼굴을 보니 꼭 내가 헤어지자고 말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생각해 봐요. 형들한테 다 들킬 거 아니에요. 저 그렇게 뻔뻔하지 못하거든요.”
“아, 뭐야. 그게 이유였어?”
안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이한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순진한 미소와 함께 정이한이 말을 덧붙였다.
“유찬 형이랑 강현이는 괜찮아. 나랑…….”
갑자기 정이한이 말꼬리를 늘리더니 부끄러운 듯 헤헤, 웃은 뒤 “약속했거든.”하고 말을 이었다.
“뭘 약속했는데요?”
“내가 하온이랑 잘 되면 응원해주기로.”
“…….”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이걸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랑 정이한이 연애를 하게 된다면, 머지않아 ‘디아스 이한❤하온 열애 중? 같은 그룹 동성 멤버들의 아찔한 연애 스캔들’ 따위의 자극적인 기사가 매스컴을 도배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우리 그룹은 바로 나락행이다.
당연히 멤버들이 팔을 걷어붙이며 정이한을 말렸을 줄 알았건만, 오히려 응원한다 했다니. 예상 밖이었다.
“정말이에요?”
“응. 나 이런 거로 거짓말 안 해.”
정이한은 떳떳한 얼굴로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진짜야? 설마 이 세계는 내 생각과 달리 동성애에 관대한 곳인가? 내가 살던 세계의 사회적 분위기와 다를 수도 있잖아. 확실히 형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그런 분위기인 것 같긴 한데…….
“……그래요, 그럼.”
잘 몰라서 그냥 모호하게 대답해버렸다. 나중에 검색 좀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정이한이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아, 맞다. 하온아. 그거 알아?”
“뭘요?”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아요. 계속 말했으면서 새삼스럽게.”
민망함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는데도 정이한은 꽃이 피어나듯 환하게 웃었다.
“이건 모를걸?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너를 더 좋아한다는 거.”
“……그, 읏.”
진짜… 정여우 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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